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43)
레필리아 레소드-143화(143/398)
레필리아 레소드 143화
여명(2)
엘프라는 존재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워낙 아름다운 미형이니, 나물을 따는 것도 한 폭의 유화처럼 보였다.
새삼 감동하던 그의 귓가에 흐느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운디라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역시나…….’
리에르는 그녀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비록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던 짝을 잃었다.
비록 저주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라지만, 끝맺음한 것은 리에르였다.
리에르는 억울하지 않았다. 이미 씻어낼 수 없는 수많은 죄가 있었다. 그중에 죄가 몇 개 더 얹어진다고 해서 달라질 상황은 없었다. 이것 또한 그가 짊어져야 할 죄였다.
그렇다 해도 그녀의 눈물을 보자 리에르도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무거운 마음에 고개를 돌렸을 때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얘들아 미안해…… 너희들이 희생당해야 우리는 내일을 살 수가 있어…….”
리에르는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싶어 잠시 멍해졌다.
운디라는 나물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참회하는 천사처럼 눈물을 토해냈다. 그러곤 가죽이 벗겨져 나간 토끼를 보면서 더욱 오열하였다.
“토끼님, 당신의 희생으로, 당신의 그 육질로 내 아이와 동료들은 포식할 거예요. 한때 토끼님도 사랑하는 가족과 들판을 뛰놀던 때가 있었겠죠.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우리는 당신을 섭취함으로써 내일을 살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는 죄인의 마음으로 당신들 가족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질 거예요. 미안해요, 토끼님. 고마워요. 토끼님.”
운디라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토끼를 요리하기 위해 리에르에게 손을 뻗었다.
식칼(아르카)을 달라고 요구하는 운디라를 향해 리에르는 고개를 저으며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냥 제가 할게요.”
리에르는 울먹이는 운디라를 겨우겨우 달래서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혼자 식사를 준비했다.
파슬리를 얹은 토끼 구이. 그리고 배고픔을 달래줄 옥수수 수프.
리에르는 유이에게 식사를 맡겼다간 일행이 몰살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귀찮은 식사 담당이 되었고, 재료는 현지 조달을 해왔다. 여행 중의 식사는 괴로운 편에 속했다.
마을을 나설 때는 도시락이 있어 괜찮지만, 다음 날이 되면 빵은 건조해지고, 식량은 눅눅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숙성되거나 건조되어 더 이상 입에 댈 수 없는 것들로 돌변했다.
그럴 때 배고픔을 이기는 방법은 숲의 과일, 혹은 다른 작은 마을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다수 상황에선 그런 행운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여행자들은 건조 식량을 갖고 다녔다.
말린 육포, 비스킷, 말린 과일은 어느 정도의 영양분은 제공하지만 먹어도 포만감과 맛은 제공되지 않았다.
이럴 때 따뜻한 베이컨이라도 한 입 베어 물면 좋겠지만 여행 중의 사치스러운 망상에 불과했다.
전투도, 여행도 먹어야 힘이 생길 수 있었다. 그렇기에 리에르는 최소한의 요리를 공부했다.
대륙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던 적혈의 악마. 그 존재가 요리한다는 걸 알면 사람들의 반응은 꽤 재미있을 터였다.
“좋아.”
리에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운 좋게 토끼 사냥도 잘되었고, 먹기 좋은 향신료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에게 있어 요리는 이제 기쁨이 되어 있었다.
이제 곧 엘프 모자와는 헤어질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엘프들의 성지이자, 엘프들의 고향인 북쪽 숲. 님 바르시아가 있었다. 그곳이 엘프 모자와 이별할 장소였다.
리에르는 되도록 그들 모자를 안까지 데려다주고 싶었다. 하지만 폐쇄적으로 지내는 엘프들이 인간 일행을 반길 리 만무했다.
그들 모자가 엘프의 영역 안으로만 들어간다면 안전할 터였고, 금방 평화로운 일상에 젖어들 것이었다.
광전사 리안덴 프리하르트.
그를 구할 순 없었지만, 최소한 그가 지키려고 했던 존재들은 구했다. 그 하나만으로도 리에르는 슬픔이 가라앉는 듯 느껴졌다.
리에르는 다 만들어진 요리를 먹기 좋도록 썰었다. 그리고 샘에서 길어온 물과 함께 일행들에게 각자 나누어주었다.
악마 같은 가이와 유이도 식사시간엔 조용했고, 엘프인 운디라는 언제 울었냐 싶게 음식을 잘 먹었다.
날씨는 기존의 쌀쌀했던 것이 누그러지고 포근함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꼭 헤어짐을 준비하는 이들을 축복하듯이 느껴졌다.
리에르와 유트는 소화도 시킬 겸 오랜만에 대무를 벌였다. 다행히도 유트의 발목 부상은 크지 않았고, 전용 무기도 되찾은 상태였다.
“오랜만에 붙어볼까, 유트?”
“예전이랑 다르다 이거지?”
유트의 말에 리에르는 미소하면서 아르카이제를 들어 보였다.
은발의 귀공자와 흑사자의 대무.
운디라는 일찍이 좋은 자리를 선점하여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가이라도 두 사람의 대무를 관심 없는 척, 하면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기본적으로 엘프는 검술에 대해서 좋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으나 두 모자는 달랐다.
소중했던 존재가 엘프로서는 특이하게도 검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유트는 제자리에서 퉁퉁 튕기듯이 점프하며 근육을 풀어주었다. 리에르는 아르카이제를 변형시켜 롱소드 형태로 만들었다.
“자, 간다. 유트.”
“이번엔 검 놓치면 안 된다?”
“언제 적 이야길 하는 거야.”
리에르가 먼저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손에 쥔 검은 유트의 어깨너머로 베고 들어간다. 수인사에 불과한 첫 공격.
유트는 오른손에 들었던 도로 가볍게 받아치고 나서 왼손의 검을 동시에 리에르의 목을 찌르고 들어갔다.
유트의 빠른 공수에 깜짝 놀란 리에르가 머리를 뒤로 피하면서 볼멘소리로 외쳤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기야?”
“왜 엄살이야, 천하의 흑사자님께서.”
유트는 그동안 얌전히 있던 덕분에 근육이 쑤신 모양이었다.
짓궂은 친구의 웃음을 보면서 리에르는 시큰둥한 눈길로 가이라 쪽을 바라보았다.
엘프로서 태어나 기본적으로 마나의 축복을 가진 가이라. 엘프로서의 시선으로 보자면 두 사람은 천박하고 야만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이라의 시선으로 보자면 강함의 지표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잘 봐둬라.”
리에르는 듣든지 말든지 가이라를 향해 중얼거렸다.
가이라에게 들릴 리 없는 속으로 뇌까리며 검을 고쳐 잡았다.
레필리아 레소드.
리에르는 그 마검술을 아르미안에게 전수받았다.
가이라에게 있어선 자신의 아버지가 사용했던 검술을 볼 유일한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때 유트의 좌수가 날카롭게 리에르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레필리아 2식, 체이셔(Chaser).”
리에르의 손에서 레필리아 레소드 최고의 카운터를 자랑하는 검식이 펼쳐졌다.
상대의 검이 일으키는 검풍, 그 바람을 타고 추격하듯 따라가는 빠른 반격술.
유트는 리에르의 반격을 당황하지 않고 우수로 받아냈다. 하지만 유트의 검과 맞부딪힌 리에르의 검은 미끄러지듯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덕분에 유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레소드 2식, 섀도우 워드(Shadow Word).”
공기를 베어낼 듯한 쾌검식. 실초와 허초를 교모하게 섞은 검술은 상대와 자신 간의 공간 지배에 큰 위력을 발휘했다.
상대에게 들어가는 가벼운 찌르기들은 잽처럼 빠르고 견고했다. 공격을 받는 이는 마치 세 개의 검이 찌르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공격에 피해를 입었을 터였다. 하지만 리에르의 앞에 있는 청년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유트는 좌수와 우수를 거의 동시에 움직여 공격을 쳐냈다. 그리고 남은 공격은 허리를 뒤로 제치며 아크로바틱을 했다.
리에르는 유트를 추격하려다 동시에 날아드는 올려 차기를 피해 뒤로 주춤했다.
두 사람 사이에 빈 곳이 생겨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트는 부드럽게 몸을 낮추며 발을 내디뎠다.
리에르는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드는 유트의 우수를 막았다.
그리고 동시에 카운터를 하는 순간 좌수가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리에르는 목을 젖히며 회피함과 동시에 발을 차올렸다.
쉬이익!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울린다.
주변에 있던 풀밭의 잎사귀들이 검날의 바람과 함께 춤추었다. 검격을 막고 검격을 뻗어낸다.
거의 동시에 사방으로 베어 들어오는 유트의 공격은 리에르로서도 막기 힘든 것이었다.
유트의 이도류 중 좌수(左手)는 항상 견제와 수비에 중심을 두었다. 우수(右手)는 결정타와 날카로운 공격을 할 때 사용했다.
하지만 순수하게 공격만 한다면 공격력은 증가한다.
리에르는 페인트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검을 내밀어 공격을 막았다.
곧 다가올 다른 쪽 검을 막기 위해 리에르는 시선을 들었다. 하지만 검은 보이지 않았다.
유트는 검을 교차하여 공격을 쳐냈다. 덕분에 리에르는 뒤로 물러서며 손목의 시큰함을 느꼈다.
“아직 순수한 검만으론 힘들지?”
심술 맞은 유트의 말에 리에르는 흥, 하는 코웃음을 쳤다.
“확실히 그러네. 그럼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리에르는 눈을 지그시 감아보며 후우,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머릿속에 오직 단 하나만을 그리면서 마나의 공간을 열기 시작했다.
가이라에게 진정한 레필리아 레소드를 보여주기 위해 리에르는 맑은 마나를 잔뜩 끌어모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귓가에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챙!
리에르는 반사적으로 검을 뻗어 유트의 좌수를 막아냈다. 하지만 다시 우수는 리에르의 빈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이것을 회피하면 다시 유트의 공간이 되어 사정없이 양쪽에서 검날이 번뜩였다. 그것을 보고 리에르는 빼엑 소리를 질러 보였다.
“야, 치사하게 준비하는데 오냐?”
“너 또 마나 쓸려고 그러지? 알면서도 그럼 기다리고 있냐?”
거침없이 바람을 찢으며 날아드는 유트의 검격. 좌수고, 우수고 할 것 없이 하나같이 육중한 공격이었다.
리에르는 문득 유트의 검식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예전에 검을 몰랐을 때는 유트의 검술이 보이지 않았었다.
휘두르고 베어내는 검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리에르는 본능적인 감으로 검을 휘둘렀다. 적의 공격을 포착하고, 혹은 예측하여 몸이 반응하듯 움직였다.
하지만 유트의 검술은 리에르와 달랐다.
허공에 선호를 그려넣는 것도 이유를 부과했다. 좌로 한 번, 우에서 두 번. 그 모든 공격이 하나하나 승리를 위한 포석이었다.
즉, 유트는 상대의 공격을 예측하고, 이미 자신이 이길 수 있는 방정식을 갖춘 상태에서 계산적인 검술을 선보였다.
덕분에 리에르는 뒤로, 뒤로 밀려나기만 했다. 결국,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졌을 때 리에르는 패배를 선언했다.
결국, 리에르는 검술만으론 천재 유트를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아울러 아무리 친구지만 준비 시간도 주지 않는 유트에 대한 치사함을 기억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