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47)
레필리아 레소드-147화(147/398)
레필리아 레소드 147화
아키서스 공방전(2)
영주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일하는 주민들의 얼굴을 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지역보다 평화로우면 평화로웠지, 살얼음 같은 분위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겨우 몇 년 만에 만든 세력에 불과했다. 북부를 하나로 만드는 마법 같은 일을 벌이는 젊은 지도자.
리에르는 새삼 그와 친구라는 것이 영광스러워질 정도였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은발의 머리카락. 그 아래 있는 맑은 눈동자는 수풀의 잎사귀처럼 싱그러웠다.
조각처럼 잘 다듬어진 콧날 아래 오뚝한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누구보다 믿음직했고, 청아한 음성을 내뱉는다.
유트는 생김부터 기품이 흘러나왔다. 리에르는 그런 유트가 마차를 모는 모습이 새삼 황송하다고 생각되었다.
‘폐하, 귀한 옥수로 마차 따위를 몰면 아니 되나이다. 당장 그 성은을 멈추어 주소서.’
리에르는 문득 유트에게 머리를 굽히면서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유트의 마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애써 참아냈다.
리에르는 신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멱살을 붙잡아 흔들고 싶어졌다. 왜 이렇게 인간을 불공평하게 만들은 것이냐고.
불공평한 존재는 하나 더 있었다. 마차 안에서 고개를 배꼼. 내밀은 은발 소녀.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폭포수의 물알 같은 은빛. 입술을 열면 천상의 목소리가 나올 것 같은 기대감. 하지만 생각하는 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바보 원숭이, 너 왜 우리 오빠만 고생시켜?”
유이는 아침에 일어나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오빠만 마차를 몰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너희 성에 도착하면 부려먹고 싶어도 못 부려먹어. 지금 실컷 부려먹어야지.”
절친한 친구니 무리한 부탁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에 도착하면 그런 말도 조심스레 해야만 했다.
물론 유트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하지만 리에르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식사 준비하잖아.”
실제로 유트의 요리 실력은 기대할 부분이 없었다. 유이의 요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맹독이었기에 시킬 수도 없었다. 덕분에 리에르는 일행에서 식사 담당 전문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네 어설픈 요리를 먹지 않아도 될걸?”
“넌 네가 만든 음식 먹어보고도 그런 소리 하냐?”
“아직 경험 부족이라 그렇거든? 나도 연습하면 잘할 수 있거든?”
리에르는 유이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자신이 최대한 지을 수 있는 비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네가 능숙해지면 먹고 기절하는 거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리에르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하는 파격적이고도 원시적인 음식을 먹고도 오장육부가 남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유트 역시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유이가 한 음식들을 생각하니 속이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씨!”
유이는 이번만은 할 말이 없었는지 리에르의 등짝을 쳤다.
유이의 손이 어찌나 매운지 리에르는 등에서 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대 맞은 리에르는 으르렁거리며 유이에게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유트가 페리안의 왕이면, 넌 왕녀 아냐? 야, 어느 나라 왕족이 품위 없게 주먹질을 하냐?”
“괜찮아,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보는 검은 있습니다.
유이는 아르카를 쏘아보았다. 리에르는 자신의 오른팔에 감겨 있는 아르카를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어휴, 똑같은 것들끼리 만나서는. 바보 원숭이랑 검둥이 마음 잘 맞아서 좋겠어.”
-유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상합니다. 구태여 Master를 자극하는 말을 합니다. 당신은 왜 굳이 Master와 많은 단어 할당을 위해서 모순된 말을 합니다.
아르카의 뜻밖에 말을 듣고 유이는 할 말을 잃고서 멍해져 버렸다.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다 듣고 보니 그런가 싶기도 했다. 덕분에 순식간에 얼굴만 붉어졌다.
리에르는 희희낙락한 얼굴로 아르카를 연신 쓰다듬었다.
“그건 다 네 마스터님이 잘생긴 원, 아니, 잘생긴 인기남이라 그런 거야.”
유이는 리에르의 뺀질거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앞 창문에서 멀어지더니 이내 주섬주섬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그것을 보고 리에르는 불안한 듯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이…….”
-야생의 유이가 나타났다.
피쉭!
아르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살 한 발이 리에르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리에르가 뒤를 돌아보자 유이는 활을 들어 올린 채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리에르는 폭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유이는 공주님, 왕녀님, 기품 있는 레이디 따위에는 안중도 없었다.
유트는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며 실웃음을 흘려 보였다.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페리안의 수도. 라니엘 성문의 문이 일행을 반겼다.
북의 패자, 위대한 지크 페브리안이 세운 얼음의 성, 수도 펠튼.
흰 성벽은 마치 얼음을 깎아 쌓은 듯 보였고, 높은 첨탑은 언제든 적군을 요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리릭!
도르래의 쇠사슬들이 마찰음을 일으켰다. 이윽고 쿵, 내려앉은 성문 안으로 문지기들의 경계서는 모습이 보였다. 안에서는 많은 사람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리에르는 갑자기 무장한 기사들이 몰려나오자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 하나 공격적인 행위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렬횡대로 늘어선 그들은 유트의 마차가 다가오자 손을 가슴에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베리타스의 축복을!”
리에르는 한꺼번에 혈기왕성한 목소리들이 울려 퍼지자 귀를 막았다. 대단히 실례되는 행동이지만 질책할 수 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국가마다 최고 지도자를 의미하는 호칭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제국령에 따른 호칭을 사용하지만, 지역적 특색에 맞게끔 다르게 부르는 곳들이 존재했다.
페리안에서는 세력의 최대 지도자를 베리타스(진리)라고 불렀다.
북방 지역의 거친 전사들에게 있어 단 하나의 왕. 단 하나의 진실을 의미하는 젊은 통치자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마차에서 내려왔다.
어린 시절부터 소꿉친구였던 유트의 또 다른 모습.
리에르는 항상 의젓하고 듬직했던 친구의 뒷모습은 후광이 넘치고 패기가 넘쳤다. 비록 아직 국가 선포를 하지 않았지만, 페리안은 어엿한 왕국이었다.
유트는 신하들에게 손을 들어 환대에 답했다.
리에르는 다소 긴장해서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유이는 리에르를 놀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요조숙녀처럼 얌전했다.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공주였다.
리에르는 이 어색함 속에서 어찌해야 할지 볼을 긁적였다. 그 순간 그의 시야 안으로 익숙한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은색의 땅 위에 어울리지 않는 한 사람. 마치 일렁이는 잔잔한 불꽃처럼 붉디붉은 긴 머리카락.
핏빛을 머금은 듯한 붉은 로브를 걸친 미남자는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위인이었다.
리즈는 유트가 다가와도 유일하게 무릎을 굽히지 않고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리타스.”
리에르는 리즈의 요염한 목소리를 듣고서 불쾌한 기억들 대신에 반가움이 일어났다.
분명 그가 포스가 되기 이전에는 리즈와 적으로서 만났었다. 그를 두려워하고, 또한 그와 싸워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의 사술에서 벗어난 지금은 두려움 대신 든든함을 느꼈다.
좋으나 싫으나 리즈는 리에르에게 있어 동족이었고, 의지할 수 있는 선배였다.
리즈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포스를 지니고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유트를 도왔으니 이 정도 세력을 모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여러분.”
유트의 말이 전달되자 은의 기사들이 고개를 들어 군주와 얼굴을 마주했다. 리에르는 그들의 움직임만 보아도 정예 중의 정예란 것을 느꼈다.
온갖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백병전을 해온 은의 기사들은 그 어떤 기사들과 붙어도 밀리지 않았다. 리즈는 유트 너머로 보이는 리에르를 보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반가운 얼굴들이 많군요.”
“누가 또 찾아왔나요?”
페리안에서 대외적으로 리즈는 유트가 부하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에게 존칭을 받는 페리안의 총사령관이었다.
살아 있는 전설의 세컨드 포스이자 많은 생명을 학살한 핏빛의 마도사. 갑작스레 자취를 감춘 이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유트는 리즈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세력을 하나둘씩 복속시키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 있어서 리즈가 보여준 행보는 대단한 것이었다.
유트는 페브리안 가문의 고유 도법, 테네 엑소르(Tenebrous exorcizo)을 혼자 습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사사받지 못하고 기억에 의존한 도법은 한계를 맞이했다.
그런 유트에게 리즈는 도법을 사사했다. 아니, 정확히는 페브리안 고유 기술인 테네 엑소르를 가르쳤다.
리즈는 이전에 페브리안 가문의 영웅들과 교전을 자주 펼쳤었다. 그러니 싫어도 그들의 기술은 눈에 익혀질 수밖에 없었다.
리즈의 도움 덕분에 유트는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리즈는 검술만으로는 유트를 이길 수 없게 되었다.
리즈는 검술 이외의 것들도 유트에게 교육했다. 그가 베리타스로서 갖춰야 할 정치적 관점, 실전 전략과 전술, 아울러 제왕학마저 강의했다.
리즈는 단지 사람 죽이는 기술만 갖고 있진 않았다. 그는 굉장히 다재다능했으며, 페리안의 토대를 다시 세웠다. 그 결과 겨우 3년 만에 유트는 북방의 패자로서 성장했다.
물론 그 이면에 리즈가 지크 페브리안의 이름을 이용해 재규합한 세력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베리타스께서 좋아할 만한 손님입니다.”
리즈는 언뜻 보면 여성처럼 보이는 붉은 입술을 요염하게 그려냈다. 그 모습은 마치 수수께끼라도 내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덕분에 유트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정답을 유추하려고 했다.
“리에르 군도 기뻐할 사람이고요.”
리에르는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기뻐할 사람이라는 것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었던 그녀.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의 끈이 끊기는 그날까지 찾아갈 생각도 못 했었다.
오랜만에 보는 젊은 베리타스를 보고 예를 취하던 기사들은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시기에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위험한 길을 떠난 군주. 그가 그렇게 만나려고 했던 남자가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어쩌면 자신의 상사가 될 수도 있기에.
“일단 안으로 드시죠. 이야기가 많습니다.”
리즈는 망토를 펄럭이며 길을 열어 보였다.
유트와 리즈, 그리고 은빛 갑주를 걸친 기사들이 내성 안으로 들어섰다.
외성 안에도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평화로운 일상들이 보였다.
이웃과 인사하는 사람들, 빨랫줄에 옷을 널고 있는 아낙들 등.
건물이 만들어진 좁은 골목 사이를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미소 속에서 평화가 비췄다.
겨울이 다른 지역에 비해 굉장히 길고 추운 곳이니만큼 체온을 보호하는 장신구들이 거리에 널려 있었다.
고향인 페이서스의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또 다른 평온. 반사광을 일으키며 눈을 어지럽히는 은의 갑옷들. 기사들의 옆에 차여진 검들은 마찰음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