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48)
레필리아 레소드-148화(148/398)
레필리아 레소드 148화
아키서스 공방전(3)
기사. 모든 사람의 로망이자 평민이 귀족으로 신분 상승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사의 맹세를 하고, 존경하는 주군에게 충성의 맹세를 한다. 그들의 서약은 자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대신하는 기사의 이야기는 애절한 노래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항상 낭만적이진 않았다.
대체로 기사들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결투를 할 수 있었다. 그 상대는 자신과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실력자를 상대로 명예를 지키려 들지 않았다.
검을 잡아본 적도 없는 평민, 제대로 된 집조차 없는 천민들을 벌레 보듯이 했다.
또한, 함부로 위세를 과시하며 일반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나 일렬로 늘어선 기사들의 행진을 보면 멀찍이 도망치는 것이 상식이었다.
만약 그들의 앞을 실수로라도 가로막는다면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검을 뽑을 수도 있으므로.
처음 기사도를 만들고, 기사라는 직책을 만들었을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거대한 제국이 분열되어 서로의 이권을 위해 혼란이 가중되자 자연스레 안전이 사라졌다.
하지만 페리안의 수도만은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걸음이 느린 노인들이 길을 막아도, 그를 부축하는 아낙이 지나가도 은의 기사들은 기다렸다.
거리를 노닐던 아이가 넘어져도 그들은 웃으며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그들은 약자를 지키고 강자의 권리를 제어했다.
정말 웃기는 것은 이러한 강력한 규율을 만든 게 리즈란 것이다.
대륙의 학살자로 이름 높은 악당이 내세운 규율이 정의라는 것은 굉장히 아이러니했다. 물론 리즈의 정체를 알지 못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들의 청년 왕의 행렬을 보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잘생긴 그들의 왕을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의 시선은 선망과 희망으로 가득했다.
리에르는 그러한 모습을 보며 유트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비해 페리안의 치안이 상당히 좋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세간에 알려진 소문과는 정반대였다.
페리안의 도시를 가로질러 내성 안에 이르자 수려한 아치 형태를 이룬 건물이 보였다.
내성을 수호하는 근위대는 창을 바짝 들고 일행을 맞아들인다. 앞장서서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유트와 유이는 편안해 보였다.
왕성에 어울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리에르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웃고 떠들던 기억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리에르는 왠지 유트와 유이가 먼 곳으로 가버린 느낌이 들었다.
“만찬을 준비했으니 잠시 후 뵙겠습니다.”
리즈의 말에 유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리에르는 갑자기 유트의 신분이 느껴져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껌벅거렸다. 하지만 유트는 마차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의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조금만 있다 보자.”
유트는 짧은 말을 남기고 먼저 걸음을 움직였다. 리에르는 그의 미소를 보고 긴장감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유이는 리에르를 돌아보면서 콧잔등을 찡그리며 조그맣게 입술을 뻐끔거렸다.
‘바보 원숭이.’
리에르는 유이의 입 모양을 보니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유트 남매가 신분이 달라졌다 하여도 예나 지금이나 다른 바 없었다. 리에르 역시 적혈의 악마였어도 그들의 소중한 존재인 것처럼.
“그들이 이 성에 어울리는 주인으로서 갈아입으러 갔으니, 당신도 그에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겠죠.”
리에르는 갑자기 등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미소. 하지만 웃는 얼굴로도 맹독을 숨긴 사나이. 리즈는 리에르의 옷자락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항상 리엘 군의 옷은 피 냄새가 그득하군요.”
“당신이 할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리에르는 리즈의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전설의 학살자. 포스 오브 머더러.
그런 무시무시한 칭호를 달고 다니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니었다.
리즈는 리에르의 항의를 듣고서 호오 하는 소리와 함께 눈웃음을 그려 보였다.
“몸만 커진 것이 아니라 담력도 커진 듯하군요.”
리즈는 당장에라도 핏빛의 창날을 만들어낼 것처럼 위압감을 풍겨냈다. 리에르는 대번 꼬리를 말면서 하하 웃어 보였다.
“자, 따라오시죠. 당신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준비했으니.”
리즈는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리에르는 공격받지 않고 끝난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했다.
리에르가 포스를 잃지 않았다면 몰라도, 지금 싸웠다간 달걀로 바위 치기밖에 되지 않았다.
리즈는 적이 되면 참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것을 생각하며 리에르는 안도의 한숨을 쉬어 보였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가 보군요.”
리즈는 다소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 아니, 어쩌면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는 편이 리에르에겐 좋을지도 몰랐다.
“당신이 어떻게 유트와 함께 있는 거야?”
“변덕일 뿐입니다. 제가 소망하던 계획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니까요.”
진녹색의 여성. 심연의 공주. 교단의 선지자.
여러 가지로 불리는 아르미안은 리즈와 닮은꼴이었다. 두 사람은 오랜 세월을 함께했었다.
그 세월의 흐름 동안 리즈는 단 하나를 소망했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준 이성을 위해서, 포스에 미쳐 있던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그녀를 위해서.
리즈는 다시 붉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영웅의 길을 갈 수 있는 소년을 찾았다.
그의 광기 어린 집착과 사랑은 연인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했다. 이미 아름다운 기억들은 모두 빛바래진 추억에 불과했다.
리즈는 삶의 목적을 잃게 되었다. 목적을 잃은 인형은 광기만을 표출하고 폭주할 수밖에 없었다.
차선책으로 리즈가 찾은 것은 베리타스의 혈족인 유트 페브리안을 키우는 일이었다.
굳이 리즈가 아니라 해도 유트는 영웅이 될 만한 자격들을 갖출 수 있는 인재였다. 하지만 리즈에게는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을 목적이 필요했다.
“왜요. 한때 당신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였던 내가, 리엘 군을 버린 것 같이 느껴지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리에르는 돌아다보는 리즈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유이의 붉은 눈동자는 맑고 고와서 토끼를 보는 듯한 귀여움이 있었다. 반면 리즈의 붉은 눈동자는 탁하고 어두웠다.
비록 눈꼬리는 웃음을 달고 있지만, 그것은 사냥감을 유혹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당신은 이제 영웅의 자격 따윈 없습니다. 미쳐 버린 살인자에 불과하니까요.”
“…….”
리에르는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노골적으로 핵심을 파고드는 리즈의 말과 눈동자는 조소를 날리는 듯 보였다.
“폭주 각성을 하게 된 포스는 죽을 때까지 핏빛으로 칠해진 옷을 벗어내지 못합니다. 고귀한 옷을 입어도 비싼 비단은 붉게 물들며, 벌레 슬은 곰팡이 옷을 걸친다 해도 그것은 역겨운 피비린내를 풍길 겁니다. 포스의 저주를 우습게 보지 마세요.”
리즈의 말처럼 리에르는 이미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그 죗값은 죽는 그 순간까지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한 번 각성한 저주는 소실이 된 것 같아도 죽음이란 자유를 얻는 그 날까지 당신의 머릿속에 뜨거운 미열로 남을 겁니다. 죽이라고, 즐기라고, 웃으라고.”
리즈는 멈추어 선 채로 리에르를 돌아다보았다. 빙긋, 웃어 보이는 리즈의 웃음은 싸늘한 광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리즈는 유트의 곁에서 참모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살인의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더 확실하게 느끼고 말았다.
포스의 저주는 죽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지만 죽여야 했다.
맛있는 케이크의 겉포장을 뜯어낸다. 먹기 좋게 썬다. 잘라낸 곳에서 즙과 알갱이들이 묻어져 나온다.
그것은 목마름과 욕구를 해소해 줬다.
퀴퀴한 피 냄새를 맡으면 머리는 진정되고 몸은 흥분되었다. 이율배반적인 그 감정들은 전신에 쾌락을 느끼게 했다.
살인하면 할수록 죄의식이 사라지고, 무게는 깊어졌다.
심연으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 망가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리즈는 유트의 군대를 양성시키는 일을 전담하였다.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아도 세 치 혀로 대리만족을 즐길 수 있었다.
리즈는 강력한 힘을 지녔어도 전면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목마름을 참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끊임없는 갈증은 살인에 대한 욕구만 상기시켰다.
부드러운 살결을 찢을 때, 꾸물꾸물 흘러나오는 선명한 핏방울. 죽음에 이를 때 자신의 소중한 것을 부르짖는 입술. 그리고 살고 싶다는 욕구를 나타내는 일그러진 얼굴.
살인하는 것은 술보다, 여자보다 더 지울 수 없는 쾌락이었기에 그것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었다.
이미 석셔너로서의 힘을 소실한 리에르도 전투가 시작되면 머릿속에 죽이는 것밖에 떠올리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당신은 나에게 살 방법을 묻지 않는 거겠죠.”
갑작스러운 리즈의 말에 리에르의 안면은 경직되었다. 리즈는 정답인 줄 알았다는 듯이 킥, 웃어 보이더니 다시 복도를 걸었다.
“순수했던 당신의 기억들이 지금의 괴물을 용서할 수 없을 겁니다.”
또각, 또각.
아무도 없는 긴 복도에 마찰하는 발끝의 소리.
“살고 싶지 않겠죠. 당신의 소중한 이들을 마주 볼 자신이 없으니까.”
리즈의 말은 하나 같이 리에르의 심정을 짓밟았다.
“그런데도 고개를 추켜올리는 본능은 단 하나뿐이겠지요.”
리즈는 잠시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진홍의 눈동자는 광기와 자애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살고 싶다? 이거 아닌가요?”
“닥쳐……!”
리에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 표정을 기다렸다는 듯이 리즈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다시 앞을 걸었다.
리에르는 자기 할 말만 지껄이는 리즈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잘난 척하지 마. 당신도 어차피 이용당하고 버려진 소모품에 불과하니까!”
리에르의 외침. 뭐든지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실제 리에르의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리즈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덕분에 복도 안은 스산한 정적이 감돌았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은 죄의 깊이가 두려워 그것을 보지 않고 회피하는 사람, 즉 죽음이 편하다고 포기하는 쪽도 있었다.
상처받은 마음, 심장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지 못하고 아르미안에게 복수할 생각도, 친구의 곁을 지킬 마음도, 사랑하던 소녀를 만날 수 없는 허약함도.
“그렇게 죽고 싶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 드릴까요?”
고개를 돌린 리즈의 눈빛이 진한 루비색으로 물들었다.
그가 착용한 망토는 바람도 없는데 부풀려 펄럭였다. 낯익은 붉은 빛의 깃털이 리즈의 등 뒤에서 하나, 둘씩 피워 오른다.
포스 오브 머더러 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지독한 살기였다. 리에르는 자신도 포스였지만 리즈에게 느껴지는 강력한 압박감을 느끼고 침을 삼켰다.
리에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도 모르게 리즈의 살기에 반응해서 아르카이제를 뽑아낼 뻔했다.
만약 그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리즈와 전투로 이어질 것이 당연했다.
머더러는 누군가의 목숨을 취해야만 목마름이 가실 수 있기에.
“너무 화내지 말아요, 리즈.”
냉랭한 살기가 감돌던 복도에서 제삼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에르는 분명 복도에 다른 이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었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선사했다.
리즈의 붉은 망토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는 애써 살기를 억누르며 붉은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
“왔군요, 엘.”
엘이라 불린 순백의 남성은 눈이 아릴 듯이 청아한 미소를 그리며 둘에게 걸어왔다.
“아직 그는 각오가 부족한 것뿐이에요.”
리에르는 엘이란 사내가 리즈 못지않은 미남자인 것을 보고 시큰둥해졌다.
자신의 주변에는 하나같이 잘생긴 미남자들만 가득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라면 환영할 일이겠지만.
단 두 사람은 성향이 많이 달라 보였다. 리즈는 예리한 칼날 같은 살기를 지녔고, 엘은 모든 것을 감싸 안을 듯한 청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리에르 아르빈트, 드디어 만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