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5)
레필리아 레소드-15화(15/398)
레필리아 레소드 15화
최악의 약혼자(4)
리에르는 순간 뜨끔, 하는 기분이었다.
“거, 검술도 제대로 못 하는 녀석이 마법 같은 고등교육을 배울 리가 있나.”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엘빈은 리에르를 관찰하듯이 바라봤다. 그러고는 차갑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예전에 왕실에 스파이로 들어온 적국의 이교도마법사를 벤 적이 있지.”
“마법 같은 건 이제 없어진 것 아니던가요?”
“아니, 다 그런 건 아니지.”
엘빈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라는 부분에 힘을 주었다.
“그때 베었던 마법사와 네가 가진 기운이 비슷해서 말이야.”
엘빈은 일부러 베었다는 말만 힘주어 말했다.
리에르는 왠지 모르게 상대에게서 살기를 느꼈다.
이 녀석에게는 그 어떤 것도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마법은 지금까지 구경도 못 하고 살아봤네요. 한번 보고 싶긴 하네요.”
리에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엘빈이 음험하게 웃어 보였다.
“너도 나중에 전쟁에 나가게 된다면 느끼겠지만, 일반인과 기사를 베는 느낌이 다르지. 더더군다나 기사와 마법사를 베는 감촉은 두말할 것 없겠지.”
‘뭐지, 이 녀석.’
리에르는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
척추부터 목뼈까지 소름이 돋으며 팔, 다리가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 위험한 느낌이야. 동물적인 감각도 있는 듯하고…….
리에르가 긴장하는 모습을 보고 잠자코 있던 아르미안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엘빈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여기 우리 둘밖에 없는 것 같은데,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군.”
리에르와 아르미안은 둘 다 말문이 막혔다.
이 이상한 사내는 무서울 만큼 동물적인 감각으로 반응하였고 전부 들어맞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대화였다. 마법사라 해도 훔쳐 듣는 것은 어려웠다.
“무, 무슨 소리야. 부엌에 있는 우리 엄마 말하나?”
“아니, 아니…… 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는데 말이지…….”
엘빈은 당황하는 리에르가 수상쩍다는 듯이 점점 더 거리를 좁혀오며 말을 했다.
그때 라일라가 리에르를 불렀다.
“리엘, 오늘 네 방은 제이미에게 빌려주렴. 귀한 손님이 멀리서 왔는데 마루에서 잘 순 없잖니.”
리에르는 적절한 시기에 말을 걸어준 라일라의 배려에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구원의 손길이 리에르를 집어 던져 버리고 말았다.
“엘빈 경도 불편하겠지만 리엘과 함께 소파에서 쉬셔야겠네요. 미안해서 어쩌죠?”
“아아…….”
리에르의 안타까운 심정을 뒤로한 채 엘빈은 그를 흘낏 한번 바라봤다.
그러고는 한쪽 입꼬리를 추어올리며 웃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르빈트 부인.”
* * *
불청객인 제이미는 라일라와 밤새도록 수다를 떨다 자러 들어갔다.
리에르는 제이미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자러 가냐.”
“그럴 생각이네.”
“뭔 놈의 사내자식이 지지배배 수다를 떨어 대냐.”
“걱정하지 말게. 그대와는 단 일분일초도 떠들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제이미는 리에르를 향해 거만한 눈빛을 한번 보여주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거참 다행이네.”
리에르도 친해질 생각이 없으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는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저기……? 아저씨?”
“아저씨?”
“경……?”
“왜 부르나?”
소파에 누운 엘빈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리에르는 문득 생각되었다. 사람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온다면, 자신의 뒤통수에는 구멍 두 개가 생겼을 거라고.
엘빈의 동물적 감각 때문에 아르미안은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어쩌면 아르미안도 자신이 대화하는 것을 들킨 것은 처음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한 사람과 한 검은 엘빈이 두려웠다.
“혹시 남색(男色)이라도 하시나요?”
“그랬으면 좋겠나?”
“아니, 계속 절 바라보니…….”
“신경 쓰지 말게.”
엘빈은 그렇게 말하며 낮게 웃어 보였다.
결국, 리에르는 최후의 방법을 시도했다.
‘양이 한 마리, 양이 두 마리…… 양이 열일곱 마리.’
나무 담장을 뛰어넘는 양.
그들의 평화로운 미소 속에서 반복적으로 양들의 일탈이 그려졌다. 하지만 갑자기 양들을 노려보는 늑대의 안광이 번뜩였다.
“헉……!”
헛숨을 들이켜며 리에르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음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오지 않는가 보군…….”
마치 잘 갈아진 검을 뽑아 드는 듯한 음성이었다.
리에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사춘기 때의 남성은 원래 밤잠을 설치는 법이죠. 다 큰 어른은 내일을 위해 푹 자둬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도 않지. 성인이 되어서도 여러 가지로 사춘기처럼 도취하게 마련이지. 가령 예를 들자면 상대를 베고 베는 흥분되는 싸움이라든지……. 자네는 알고 있나, 아르빈트 군?”
‘아, 도저히 이 녀석이랑 소름 끼쳐서 대화를 못 나누겠다.’
리에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진저리를 쳤다. 사람을 베고, 베는 이야기로 날밤을 새우려는 기세였다.
아르미안은 털이 북슬북슬한 남성만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리에르와 대치하고 있는 짐승남도 그녀에게는 상극이었다.
그 의미로 수다쟁이 아르미안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잠잠했다.
카에르의 여학생들은 검술보단 검술을 사용하는 미소년들을 감상하기 위해 수업을 신청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검술 수재들은 힘이 넘치는 오크 같은 녀석들이 대다수였다.
그녀들이 떠올리는 호리호리한 수수깡 소년들이 검술에서 활약할 일은 결단코 없었다.
리에르는 문득 자신의 엉뚱한 생각을 밀어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여성들이 상상하는 백마 탄 기사라는 이미지가 그러했다.
지금 리에르의 눈앞에 있는 엘빈은 진짜 기사였다. 그것도 꽤 작위도 높은 듯 보였다.
하지만 여성들이 꿈에 그리는 그런 몰골은 아니었고, 깨끗한 기사도와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결투할 때 상대의 눈에 흙을 뿌릴 것 같은 인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했다.
리에르는 엘빈과 자신을 비교하자면 자신이 꽃미남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자신이 실력이 없는 이유는 순전히 외모지상주의 때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봐.”
“헉!”
리에르는 엉겁결에 벌떡 일어날 정도로 깜짝 놀랐다.
“잠이 오지 않는가?”
“아, 뭐. 잠자리가 갑자기 바뀌다 보니…….”
사실은 엘빈 때문에 신경이 쓰였었다.
“어떤가? 나도 잠이 오질 않는데 대련이라도 하겠나?”
“아…….”
아레스트를 수호하는 십일검 기사단. 그중 토벌 부대로 유명한 기사님께서 야밤에 유혹하고 있었다.
피에 젖은 고기 조각을 먹고 싶다는 듯이.
리에르는 저절로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떠냐. 잠이 오지 않는 동지들끼리…….”
“아쉽게도……. 전 내일 검술대회 본선이 있어서 자야겠네요.”
“검술대회?”
엘빈은 끝도 없이 물고 늘어졌다.
리에르는 엘빈이 하루라도 누군가를 베지 않는다면 잠을 잘 수 없는 체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최대한 성의 없이 대답하고서 자리에 잽싸게 누웠다.
“페이서스 카에르에서 하는 축제 있어요. 이제 서로에게 관심을 지우고 잠이나 자는 동지가 되길 바랍니다.”
‘이 이상은 말을 걸지 말아다오.’
리에르는 그렇게 속으로 뇌까리며 억지로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검술대회라……. 그거참 재미있겠군.”
불행인지 다행인지 엘빈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리에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신도 깊이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그 순간 건물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리에르는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에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주변에 다른 이상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드르렁! 쾅쾅!”
리에르는 설마 싶어서 고개를 돌아보았다.
엘빈은 세상 모르게 잠든 상태에서 간헐적으로 천둥소리를 내고 있었다.
-잠을 자든, 안 자든 무서운 사람이다…….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지적에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천둥의 화음이 계속 공격해 오자 베개로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절대로 잘 수 없을 것 같은 소음은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 * *
“사, 살려줘……!”
갈색 머리칼의 소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원초적인 감정, 공포에 떨며 입술을 열었다.
커다란 호박 빛 눈망울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은 새하얀 볼을 타고 입안으로 스며 들어간다.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호박빛 눈망울 안으로 어린 백작의 시선을 받기 위해 아첨하던 호위병들이 보였다.
호위병들은 이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곧 썩어 문드러질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곁에 남은 사람이라곤 유모밖에 없었다.
나이 많은 유모는 이 참혹한 상황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커다란 생명체는 기이한 울음소릴 내고 있었다.
탐욕스러운 주둥이에서는 진득한 액체를 끊임없이 흘렸다.
다른 괴물들은 호위병의 시체가 식어가는 것이 아깝다는 듯이 게걸스럽게 살점을 먹어 치웠다.
놈들은 사슬로 엉켜진 갑주를 몇 개의 고리만 부수고서 알맹이만 먹었다.
꽤 지능이 높고, 경험이 많은 괴물이란 의미였다.
이 녀석들의 이름은 학시엘이었다.
큰 파충류에 뒷다리만 튼튼하게 성장한 녀석들은 달리기나 점프에 특화되어 있었다.
놈들은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웠다. 입에 잔뜩 피를 묻힌 녀석들은 비릿한 침을 흘려대며 메인디쉬를 바라봤다.
“도와줘……. 제발…….”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꾹 감고서 중얼거린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기원이라고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살아날 가망성은 없었다.
“오, 신이시여.”
유모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학시엘의 머리통 하나가 공중에 피를 흩뿌리며 회전했다.
통, 토르르.
바닥을 구르는 학시엘의 머리통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던 거로 보였다.
서걱.
학시엘은 갑자기 뒤쪽에서 무언가가 공격해 오는 것을 보았다.
놈들이 급하게 뒤를 보며 공격 태세를 갖췄다.
서걱, 서걱!
사정없이 난도질당하는 소리와 함께 학시엘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마치 열매가 떨어지듯이 잘려 나가는 광경은 끔찍한 것이었다.
“아르빈트 경이 왔습니다! 아가씨! 오, 신이시여!”
유모는 안도하듯이 두서없이 말했다. 그녀의 품에서 소녀는 살육의 현장을 바라봤다.
그녀가 아는 아르빈트 경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아버지의 친우이자, 대륙 최강의 기사라고 불리는 신검의 아르빈트였다.
그 누구보다 바쁜 그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 소녀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자신이 아는 중년의 아르빈트가 아니었다.
뒤로 묶은 긴 검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남성은 가장 선두에서 학시엘을 베고, 또 베었다.
혈흔은 마치 벚꽃잎이 흩날리는 것과 같아 보였다.
젊은 아르빈트와 부하들은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시켰다.
남은 학시엘은 전부 살기 위해 도망갔다. 그 뒤를 다른 기사들이 추격하기 시작했다.
“무사하십니까.”
“아아, 경이 우리를 구했습니다.”
유모는 아직도 격한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 흐느꼈다.
소녀는 유모의 품에서 젊은 아르빈트를 올려다보았다.
갑옷과 망토는 온통 학시엘의 피로 적셔져 있었다.
무서워해야 할 광경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젊은 아르빈트는 놀라울 만큼 잘생긴 외모였다.
날렵하고 단단해 보이는 단련된 근육들. 그러고는 온화하고 자상해 보이는 미소.
“칠검의 파에트 아르빈트가 영애를 뵙습니다.”
젊은 미남자가 소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취했다.
남은 칠검의 기사들이 미남자를 따라서 기사의 예법에 맞게 예를 취했다.
소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제이미 룬 아레스트. 후작의 단 하나뿐인 영애가 첫사랑과 만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