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52)
레필리아 레소드-152화(152/398)
레필리아 레소드 152화
아키서스 공방전(7)
“리엘…….”
리에르 자신을 지탱해 주던 옛 기억. 그 속에 남아 있던 그녀의 온화함을 보자 가슴속이 미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와…… 이젠 나보다 키가 커!”
에레사는 리에르를 올려다보면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예전에는 자신의 어깨밖에 오지 않았던 작은 소년이었다.
“니, 니가 작은 거지.”
리에르는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는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안아버릴 것 같은 충동. 그것을 밀어내기 위해 억지로 심술 맞게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그의 귓불이 붉어진 것을 보고 에레사는 입가를 가리며 웃어 보였다.
누가 뭐라 해도 두 사람은 소꿉친구였다. 서로의 버릇과 성향 정도는 가족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와, 목소리도 굵어졌어…….”
“바보냐…….”
에레사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성질만 부리며 목소리만 크던 말썽꾸러기 소꿉친구.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그의 목소리는 이제 남자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에레사는 그런 그의 모습이 묘한 설렘을 느꼈다.
“진짜 리엘이야…….”
“…….”
에레사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졌다. 그녀는 리에르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예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자신보다 작았던 리에르였기에.
“잘 지냈던 거야?”
에레사의 안쓰러운 목소리. 그것은 이겨내기 힘든 유혹이었다.
“살아 있으면 됐잖아.”
마음과는 다르게 리에르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그의 까칠한 말투에도 에레사는 미소를 일그러뜨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뭐가?”
리에르는 알 수 없는 에레사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시큰둥한 그의 얼굴을 보며 에레사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파엘 오빠랑 정말 형제란 게 실감이 나.”
칭찬인지 불평인지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이었다.
“내가 어렸어도 남자 보는 눈은 확실했나 봐.”
리에르는 에레사가 부끄러운 말을 서슴없이 해대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리에르는 그녀의 남자 보는 눈이란 것에 대해서 반론을 펼치고 싶었다.
리에르 자신은 이름만 대면 공포에 딸을 만큼 두려운 존재였다. 더군다나 지금 북벌을 하는 교단의 사령관은 그녀의 옛 연인이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애써 반론을 펼치진 않았다.
괜히 그런 말을 해서 그녀의 밝은 얼굴을 어둡게 만들고 싶진 않았기에.
“에렌, 넉살 좋아졌다?”
“후훗, 너한테 배웠잖아.”
“너도 더 예뻐졌어.”
리에르도 그렇게 말을 내뱉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리에르의 말에 에레사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이쪽저쪽 그의 얼굴을 훑어봤다.
리에르 아르빈트. 적혈의 악마. 포스 오브 석셔너, 세컨드 포스 각성자.
그 이름과 칭호를 얻은 채로 목숨을 갉아먹고, 핏빛 전장을 휘젓고 다닌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던 그가 첫사랑 소녀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리에르는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에레사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제는 계속 함께 있자.”
“…….”
“떨어지지 말고.”
에레사의 다정한 손이 리에르의 차가운 손을 붙잡았다.
온기가 전해진다. 전신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리에르는 에레사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응…….”
만족스러운 듯이 에레사가 미소를 머금었다. 밝은 햇살과도 같은 미소였다. 하지만 리에르는 그녀를 따라 웃지 못했다.
계속 함께 있자고 말하지만, 살날이 길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죽고 싶었고, 그렇게 괴로웠는데 지인을 만나니 다시 살고 싶어졌다. 죽고 싶지 않아졌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유이가 혼자 바깥으로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레온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
레온은 어색해진 자신의 손을 다시 내렸다. 도도한 공주.
북방의 꽃.
유이는 이미 페리안에서 아름다움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그녀에게 청혼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남자는 레온 폴 하르츠였다.
옛 주인과의 우정을 잊지 않고 주저 없이 자신의 기반을 내준 하르츠 후작.
그리고 가문의 장남이자, 페리안 최고의 기사인 레온은 페브리안 가문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안 그래도 레온과 유이의 약혼 이야기가 자주 거론되고 있었다.
유이도 그 사실을 알기에, 되도록 레온과 연관되는 것을 피해왔다. 조용히 유이의 뒤를 따르는 레온은 못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훈남에 가까운 외모였다.
그렇다고 강제적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사려는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기다렸다. 그녀의 뒤에서.
그런데도 유이는 다른 곳을 바라봤다.
애써 치장한 드레스도, 오랜 시간 말아 올린 머리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유이는 자신을 봐주지 않는 녀석이 얄미웠다. 물론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정말 만나고 싶고 걱정했던 상대를 만났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 자신의 거리가 멀어진 것 또한 아니다.
하지만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상하고 아름다운 금발 소녀를 항상 눈도 떼지 못하고 바라보던 검은 머리칼의 소년. 그런 소년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은발의 꼬마.
세월이 흘렀지만, 서로의 거리는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상관없지만…….’
유이는 스스로 핑계를 대며 리에르와 에레사에게 멀리 떨어졌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에르의 시선은 잠시 유이의 뒷모습을 향했다.
평소의 왈가닥 같은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방금 꽃 피운 제비꽃처럼, 이슬을 머금어 보인 것처럼 청초한 유이.
리에르는 평소처럼 이죽거리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리에르와 유이. 두 사람은 닮은꼴이었다.
불행함을 겪었던 소년 소녀. 그리고 서로 엇갈린 감정이 교류했다.
이들을 지켜보는 백의를 걸친 남성은 입가에 미소를 그려 보였다.
“잘 어울리는군요.”
백의를 걸친 남성의 말에 붉은 로브를 걸친 남성이 웃으며 받아들였다.
첫 번째 작전 회의는 끝났다.
세 번째 근위 기사, 프세 앤드류가 선발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이제 곧 두 번째 작전 회의가 시작될 것이다. 이때 모든 전략과 전술이 결정될 것이다.
엘과 리즈는 페리안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겨우 남녀 간의 애정행각을 훔쳐볼 여유 따위는 없다. 하지만 그들은 급한 일을 전부 미뤄두고서 지켜보았다.
“리에르 군은 더 이상 포스가 아닙니다.”
리즈는 리에르가 더는 포스가 아님을 지적하였다.
포스로 인해서 뛰던 심장, 소실되어 사라진 포스 덕분에 그의 심장은 언제까지 제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단언할 수 없는 생명의 끈. 그것은 차근차근 불행이란 이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럴까요? 저에게 있어서 그는 아직 제 희망으로만 보이는군요.”
엘은 리즈나 카르샤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깃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직 피지 않은 찬란한 날개. 수없이 많은 세월을 기다리며 그려놓은 그림이 이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올 불행을 예견치 못하는 리에르. 그의 얼굴에서 피워지는 웃음을 보면서 엘은 온화한 눈동자를 굴렸다.
‘리에르 님, 당신은 아직 죽을 시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다가올 때까지 삶에 대한 애착을 갖도록 하세요.’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안배들은 잘 들어맞는 톱니바퀴처럼 굴러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가 정해진 대로.
그래야만 대가를 들여서 에레사를 살린 이유가 증명될 수 있었기에.
***
“아키서스를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에 따라 이 전쟁의 명맥이 달려있습니다.”
붉은 머리카락의 미남자가 입을 열었다. 식사가 끝난 뒤 작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실에는 유트와 근위 기사 레온, 텟사가 있었다. 그리고 지휘관급 몇이 참여한 상태였다.
지금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은 리즈였다.
그는 사실상 페리안의 재상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일에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키서스는 페리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산세가 험하고, 자연환경이 험난한 페리안에게 있어서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된 길이 확보되는 곳은 아키서스다.
즉, 여기는 페리안의 빗장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만약 이 빗장문이 풀리면 그 안으로는 모든 국토가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페리안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대문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을 잃는다면 수비해야 할 곳이 많아진다.
수비할 곳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병력이 나눠진다는 의미였다.
만약 전쟁에 승리한다 해도 일만 시민들과 농가에 입을 피해는 막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피해는 곧 신생 세력인 페리안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한다. 좋을 것은 없다.
페리안은 신생이니만큼 아직 신뢰와 명망이 부족한 상태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적과 조우해야 합니다. 내일 바로 출병을 해야만 시간을 맞출 수 있으며, 그에 따른 군대는 약 이천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2천. 적은 어림잡아 1만 이상이었기에 회의실 안에 사람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섯의 병력 차이였다. 더군다나 상대는 신군의 빅스터 나이브만이었다.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 중엔 고민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페리안 건설에 바친 이도 있었다.
그런데 페리안이 무너지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참가하는 영주들도 있었다.
“전쟁을 피할 방법은 없는 겁니까?”
벨른 남작. 페리안에 가장 뒤늦게 복속된 영지의 영주였다. 그의 질문에 리즈는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벨른 남작에겐 수치심 따윈 없었다. 그는 애초에 페리안에 대한 충성심도 애착도 없었다. 그렇기에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경멸스럽게 쳐다봐도 당황하지 않았다.
“뭐, 좋은 질문입니다. 피할 수 있는 전쟁은 좋은 거지요. 양쪽이 피해를 볼 필요가 없으니깐요. 이전에 페리안에 손을 든 그대처럼요.”
리즈는 벨른 남작과의 전투를 빗대어 보였다.
그제야 남작의 얼굴은 수치심에 붉어지게 되었다. 그는 페리안의 선발대가 당도하자 칼 한 번 맞대보지 않고 항복하였다.
하지만 모든 영지가 군비가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조그만 영지 같은 경우엔 사병이 겨우 백여 명에 지나지 않는 곳도 있었다.
“교단이 페리안에 요구한 것은 코스모스 교리를 따를 것입니다. 매우 간단하지요? 하지만 그 종속되는 권리에 비해, 대가는 크더군요.”
리즈의 말에 사람들은 시선이 모였다. 리즈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흰 치아를 내비쳤다.
“영지에서 생산되는 모든 물품에 대해서 교단은 세율을 정한다. 종교 건물을 각 영지에 지어야 하며, 또한 신께 바치는 헌납금의 액수는 그대들이 바짝 허리를 졸라매어도 빠듯할 거요. 코스모스의 규율 아래 신성 국가가 되는 모든 영지는 신이 명하신 성전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더군요.”
무리한 요구. 애초에 한 판 붙어 보자고 하는 의미 이외엔 다른 것이 없었다. 회의실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은 숨을 죽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