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54)
레필리아 레소드-154화(154/398)
레필리아 레소드 154화
아키서스 공방전(9)
사람들도 이제 들뜬 열기가 사그라지자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사람들은 술집으로 향하며 전쟁의 판도에 관한 이야기로 갑론을박을 펼쳤다.
이번에도 기적의 젊은 왕은 승전보를 안고 돌아올 것이란 이야기. 그리고 이번만큼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가십거리로 사용되었다.
“유트는 너랑 다르게 똑 부러지는 아이였잖니.”
에레사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며 리에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도 예전이랑 다르다고.”
리에르는 눈썹을 찌푸려 보이며 투덜거렸다.
“그래, 그러시겠지. 유트 남매를 일반인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니까.”
“유이도 누구랑 다르게 공주님 분위기를 풍기던데?”
리에르가 유이에게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평소 유이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귀엽다곤 생각했었다.
유이의 흰 피부와 어우러지는 순백의 드레스. 흰 장갑을 낀 손이 움직일 때마다, 윤기가 흐르는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뭇 남성들의 시선을 강탈한다.
리에르의 말에 에레사는 한쪽 볼을 부풀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나도 그런 옷 입으면 달라지거든? 여자애에게 원래 옷은 날개와 같은 거야.”
“나도 유트처럼 은색 머리카락이면 분위기가 확 달라질걸?”
“그건 무리.”
에레사는 담백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리에르는 어쩌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찌뿌둥하게 내려 보았다.
생기 넘치는 에레사의 얼굴. 쿡쿡 웃는 그녀의 목소리가 리에르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리에르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고장 난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한다.
-Master 번식하기에 좋은 시기인 듯합니다.
리에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한동안 잠잠하다고 했었는데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하기 위한 타이밍은 놓치지 않았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팔목에 감겨 있는 검은 건틀렛을 쿡쿡 찍어 누르며 중얼거렸다.
“얘는 주인 닮아서 음흉한가 봐. 말끝마다 번식 아니면 짝짓기래.”
리에르와 계속 함께 지내다 보니 에레사도 아르카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퍽 신기한 얼굴로 대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리에르와는 달리 에레사는 아르카를 퍽 귀엽게 보는 눈치였다.
-에레사라고 불리는 것에게 말합니다. 수컷에게 번식은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에레사는 아르카의 말을 듣고 리에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래?”
“내, 내가 알게 뭐야.”
리에르는 에레사의 눈웃음을 보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너도 얘 말처럼 수컷이잖아.”
에레사는 아르카의 표현방식을 빌리면서 스스로 웃겼는지 배시시 웃어 보였다.
“하기야 남의 속옷을 가지고 곰 인형의 머리 위에 씌우고 다닐 때부터 변태 기질이 다분했었지.”
“그건 그냥 내가 예술적 감흥 때문에…….”
에레사가 예전 일을 들먹이자 리에르는 대번 홍시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어렸을 적 에레사의 관심을 자신에게 향하기 위한 치기 어린 장난들이었다.
사고를 친 장본인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지만, 피해자는 그 기억의 양피지를 펼치며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뒤에서 껴안아 보질 않나.”
“그건…… 날이 추워서…….”
리에르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고 있는데 볼에다 키스하고 사라지질 않나.”
“넘어진 거야!”
리에르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에레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흐른, 하는 숨소릴 내뱉었다.
“리엘은 넘어지면 그런 짓을 하는구나…… 난 또 특별해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 음.”
리에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가 죄 없는 아르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사리물어 보였다.
“야, 이 멍청한 고철아. 말투 좀 바꾸랬지?”
-Master는 피의자로서 피해자의 취조에 정당한 발언을 할 것을 권고 합니다.
“취조? 내가 심문이라도 당해서 감옥 신세 되면 너도 좋지만은 않을 건데?”
-괜찮습니다. 다른 Master를 선정하여 기생하면 됩니다.
아르카의 담백한 대답에 리에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리에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낯익은 장소 하나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서슴지 않고 걸어 나갔다.
에레사는 리에르가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려나 싶어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향하는 곳은 대장간이었다.
리에르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면서 대장간 안에 들어섰다. 그 안에는 터질 것 같은 근육을 가진 남성이 망치로 연금 질을 하고 있었다.
“일 좀 의뢰할 수 있나요?”
“얼마든지 말하쇼.”
리에르의 말에 대장장이가 각진 얼굴을 돌리며 대답했다.
정글을 연상시키는 가슴의 굵직한 수풀들. 두툼한 입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라난 수염들. 그는 전형적인 마초남이었다.
“이 물건 좀 연금해 주길 바라는데.”
리에르는 말하면서 오른팔에 얹힌 건틀렛을 들어 보였다.
-지금 Master가 행하는 행동은 매우 감정적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길 권합니다.
불안함을 느낀 아르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음을 내보였다. 리에르는 잔혹한 미소를 비추며 광기 어린 눈동자를 지어 보였다.
“호오, 진귀한 물건인 것 같은걸.”
대장장이는 리에르가 보여준 건틀렛을 보고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대장장이에겐 일종의 직업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새로운 물질, 신기한 물건을 보면 연금을 하고 싶어 좀이 쑤시는 버릇.
그런 마초남의 모습을 보고 아르카는 처음으로 공포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완성품인 것 같은데 정말로 연금할 건가?”
재질을 알 수 없는 시커먼 금속으로 이루어진 건틀렛. 그것은 대장장이의 눈길을 집중시켰다.
리에르는 아르카의 떨리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씩, 웃으며 말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두들겨 주면 돼요.”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대장장이의 목에서 들려왔다.
리에르는 아르카를 손목에서 떼어냈다. 이번 기회에 누가 우위에 있는지 확실하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순간 건틀렛의 각 귀퉁이에서 손과 발이 튀어나왔다.
아르카는 리에르의 손목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 망할 고철이……!”
리에르는 아르카가 온 힘을 다하는 것을 보고 마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모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대장장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왔다.
“내가 도와주지.”
마초남의 팔, 근육은 리에르의 다리보다 두꺼웠다. 마치 게 집게발을 연상시키는 손이 다가오자 아르카는 재빨리 리에르의 손에서 벗어나며 도로를 질주했다.
리에르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아르카가 자유롭게 변형하는 재질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발까지 만들어내서 도망칠 거라곤 상상도 하지를 못했었다.
황당해하는 리에르와 대장장이의 시선을 무시한 채로 아르카는 바닥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도주했다. 그러고는 에레사의 다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깜짝 놀란 에레사가 꺅,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르카는 능숙한 솜씨로 에레사의 정강이를 올라탄 뒤 매미처럼 매달렸다.
“그놈 참 빠르기도 하네.”
리에르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리에르는 한참 동안 씨름을 해서야 겨우 아르카를 에레사에게서 떼어냈다.
대장장이는 엄청난 것을 본 덕분에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덕분에 리에르와 에레사는 엉뚱한 일을 당할까 무서워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아, 진짜 이 고철 덩어릴 어떻게 버릇을 고쳐야 하나.”
“왜, 귀엽기만 하던데?”
에레사는 아르카를 두둔하고 나섰다. 어처구니없는 그녀의 말에 리에르는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항변했다.
“너 정말 눈에 문제 있는 거 아냐?”
리에르는 에레사의 눈에 심각한 질병이 있다고 판단했다. 시커먼 건틀렛이 팔과 다리를 달은 채 뛰어다니는 것을 귀엽다고 말할 여자는 없었다.
“응, 나 눈에 문제 있는 건 맞나봐.”
에레사는 그렇게 말하며 리에르의 얼굴을 유심히 올려다보았다. 목 언저리에 닿는 금발 머리카락은 건강하게 찰랑거린다. 그녀의 생기 넘치는 눈동자는 장난스럽게 구부러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리에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어차피 유트는 떠났고, 인제 와서 뒤쫓기엔 늦었다. 리에르는 그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리엘.”
“응?”
에레사는 식당을 찾는 리에르를 만류했다. 리에르는 그녀가 말하는 의미를 모르고서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다.
“성안에서 먹어야지.”
리에르는 에레사의 말에 비릿한 신음을 내뱉었다.
성안에서의 식사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허리를 쭉 펴고 나이프와 포크로 품격 있게 잘라먹는 식사법. 그것은 남 보기 좋을지 몰라도 귀찮디귀찮은 방법이었다.
식사하는데 주변에 서 있는 시종들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실수로 밥풀 하나만 흘려도 근처에 있던 시종이 닦아가니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넌 엘이란 사람이랑 같이 다니다 보니 그런 곳의 식사법이 잘 맞았어?”
리에르의 말에 에레사는 픽, 웃어 보이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고개를 흔들 때마다 목 언저리에 내려오는 찰랑거리는 금발.
그것이 눈 안에 돌아올 때마다 리에르는 못내 아쉬움이 느껴졌다. 지금처럼 세련된 단발도 좋지만, 이전의 긴 머리카락이 그녀에게 더 어울렸다.
“유이 혼자 식사하게 두려고?”
에레사의 말을 들으니 리에르는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유일한 혈육인 유트가 전쟁에 출정했으니 유이는 혼자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왕족이 된 그녀와 같이 식사할 만한 인물이 수도에 있을 리 만무했고, 유이의 성격상 누군가와 허물없이 지낸단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유이는 여전히 말수가 없더라. 내심 얼마나 외롭겠니.”
“걔가 말이 없어?”
리에르는 에레사의 말에 최대한의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말 수가 두 번만 없으면 귓속의 달팽이관이 도주할 일이었다.
유이는 말보단 다른 행동이 더 문제였다.
어릴 적부터 심심하면 리에르는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그뿐만 아니라 되지도 않는 바보 원숭이란 말로 호칭 당하며 온갖 시비에 걸려왔다.
어릴 적엔 성격이 나빠서 그렇다고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아가씨가 되어서도 광폭한 녀석이 말이 없고 외로움을 탄다는 표현과는 맞지 않았다.
리에르는 에레사의 눈이 절대로 잘못되었단 것을 피력하기 위해 손사래를 쳤다.
“넌 정말 눈이 나빠.”
“네가 여자애들 심리를 얼마나 잘 안다고 그래. 원래 표정이 없는 사람일수록 속은 더 여린 법이야.”
에레사의 말에 리에르는 허, 하는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확실히 어렸을 적의 유이는 꼬마치곤 무표정했었다. 원래 주변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감정이 결핍된 것인지.
그녀는 호기심이 왕성해야 할 나이에도 모든 일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나이를 먹으니 유이도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여행하면서 본 그녀의 얼굴은 정말이지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줬다.
비웃음으로 상대를 폭행할 수 있다는 것과 비아냥거림으로 상대를 죽고 싶게 만드는 방법 등등.
유이는 몇 마디로도 리에르를 충분히 그로기 상태로 만들고도 남는 여장부였다.
항상 찌푸린 얼굴. 심술 맞은 얼굴. 하지만 가끔 보여준 환한 웃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