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55)
레필리아 레소드-155화(155/398)
레필리아 레소드 155화
아키서스 공방전(10)
리에르는 유이의 표정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광전사 사건 때 그녀의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던 것을 생각했다.
리에르는 그때 자신도 모르게 유이를 안았던 것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땐 내가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가슴속에서 복받치는 꿈틀거림은 목마름을 느끼게 하고, 머리를 뜨겁게 태워냈다. 태워진 머리는 이성의 끈을 제어하지 못했다.
“얼른 가자, 오랜만에 유이랑 대화하면서 식사를 하고 싶어.”
에레사는 기지개를 켜면서 리에르를 보챘다. 리에르는 그녀를 보면서 불현듯 느껴지는 묘한 감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레사를 곁에 둔 지금 갑자기 유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에 리에르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리에르가 아니었다.
또한, 손을 잡아끌며 보채는 에레사의 손길은 금방 고민을 털어내게 했다.
지금 누가 뭐라 해도 리에르는 행복함을 느꼈다. 좋아하는 여성이, 꿈에도 잊지 못했던 여성이 눈앞에 있기에.
두 사람이 성안에 들어서도 그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왕의 손님인 그들은 성 어디에서도 환영받는 사람이었다.
성문을 지키는 가더는 두 사람이 지나가자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둘이 지나갈 때마다 시종과 시녀들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덕분에 리에르와 에레사는 부담스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리에르는 갑자기 지체 높은 귀족들이 고개가 뻣뻣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아랫것들이 예를 취하고 인사를 해도 고개 하나 까딱거리지 않았다.
하지만 겪고 보니 성안에 있는 시종의 수는 너무나 많았다. 일일이 인사를 받아주다 보면 목이 남아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두 사람은 일일이 그들의 인사를 받다가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있었다.
리에르는 차라리 에레사를 엎고서 유이가 있는 곳까지 뛰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왕의 친구씩이나 되어서 품위 없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리에르와 에레사는 다른 시종보다 연륜 있어 보이는 중년인과 마주했다. 그는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깍듯하게 예를 갖추었다.
“안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중년인은 마치 속마음을 꿰뚫기라도 하듯이 두 사람을 인도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은 유이가 거주하는 실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마치 눈을 덮은 풍경처럼 꾸며진 복도와 테라스. 그 안에는 유이가 의자에 앉아 시큰둥한 얼굴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이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었는지 굉장히 편한 자세로 있었다. 치렁치렁한 레이스 치맛단은 무릎 위까지 올라와 매끄러운 다리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그런 유이의 모습을 보고 리에르는 피식 비웃음을 머금었다. 왈가닥인 유이가 불편한 옷을 걸치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마마 체통을 지키시지요.”
턱을 괴고서 책을 보던 유이는 리에르의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얼마나 놀랐던지 머리카락이 토끼 귀처럼 곤두서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에레사와 리에르는 실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유이는 눈에 띄게 붉어진 얼굴로 드레스 자락을 무릎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리에르를 쏘아보았다.
“유이야 정말 오랜만이야. 정말 너무 예뻐졌어!”
에레사는 눈부시게 아름다워진 유이를 보고 감회에 젖은 듯 미소하였다. 그런 에레사의 반응에 유이는 콧잔등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놀리지 마요, 언니.”
유이가 뚱한 얼굴로 답하는 것을 보고 에레사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리에르의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동의를 구했다.
“그치?”
“눈은 여전히 충혈 눈알이고, 성격은 절벽 가슴만큼이나 낭떠러지지.”
리에르는 팔짱을 낀 채로 코웃음을 쳐보였다. 그러자 유이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
“네가 봤어?”
“고의는 아니지만 몇 번 만져 봤…….”
퍽!
유이가 들고 있던 책이 리에르의 안면에 날아들었다. 콧잔등을 얻어맞은 리에르는 고통스러워했다. 그 모습을 보고 에레사는 쯧쯧 혀를 차 보였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바보 원숭이, 감옥에라도 넣어줄까?”
리에르는 두 여자의 비아냥거림을 들으니 골이 아파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유이가 에레사에게는 얌전한 것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유이는 리에르에게 항상 잡아먹을 듯이 굴었다. 그런 주제에 다른 연상에게는 얌전하니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억울함을 생각하던 리에르는 화풀이도 못 하고 코만 움켜잡았다. 그러던 그의 시야 안으로 펼쳐진 책이 보였다.
“뭐야, 공주마마께서도 이런 책을 읽나?”
리에르의 말에 유이가 움찔했다. 그녀가 보고 있던 책은 교육용 도서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소녀 취향의 삽화가 그려진 로맨스 소설이었다.
“장미의 기사…… 프란츠……? 너 이런 것도 보니?”
-ㅋㅋㅋㅋㅋㅋ.
이번만은 아르카도 리에르의 편이 되어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이는 홍시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조그만 주먹만 부들부들 떨어 보였다. 평소처럼 리에르를 갈구고 싶어도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말에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이를 바라보았다.
“장미의 기사 프란츠, 너도 보는 거야?”
“응?”
에레사의 눈빛이 이상하게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리에르는 내심 당황하여 웃음을 그쳤다.
유이의 눈이 에레사를 향하며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언니도……?”
리에르는 왠지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쩜 좋아. 그 작품 너무 재미있지? 아, 마지막 결말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돌아.”
“에렌 언니 다 본 거예요?”
“응, 프란츠 마지막에…… 아, 말하면 안 되지. 정말 완결 난 것이 아쉬울 정도로 사랑의 대서사시지. 작가가 이 이상의 작품을 쓸 수 없다면서 절필한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리에르는 갑자기 시작된 두 여성의 대화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에레사는 페이서스 카이샤에 다닐 때부터 순정 소설 마니아였다. 덕분에 집에 있을 땐 항상 저런 부류의 소설들을 끼고 살았었던 과거가 있었다.
리에르는 에레사의 그런 모습을 보고 항상 놀려댔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두 여성은 서먹서먹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존재감이 사라진 것은 리에르였다. 두 여자는 장미의 기사 프란츠 이야기로 대화의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리에르는 배가 고팠다. 애초에 식사하기 위해서 찾아온 방문이었다.
하지만 에레사와 유이는 프란츠라는 가공의 인물 이야기를 하느라 배고픔도 잊은 채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심심해진 리에르는 쥐고 있던 책을 열어서 내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내용은 대충 비극으로 시작해서 애절한 사랑과 음모의 대서사시로 보였다.
순간 리에르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책의 삽화를 보니 주인공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또 속눈썹은 어찌나 긴지 댕기를 따도 될 정도로 보였다.
애써 책을 덮으려다 리에르는 좀 더 소설을 읽어보았다. 두 여자의 사이에서 혼자 따돌림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그녀들이 말하는 기본 모에 요소는 깨닫고 싶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곧바로 좌절하고 말았다.
-사랑과 열정을 그대에게!
-너의 눈은 내 고향의 별님을 떠올리게 해.
-그대의 아름다움에 찬미를, 그대의 향기로움에 건배를.
리에르는 주인공의 대사들을 보고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책을 덮었다.
프란츠와 그의 연인 이실리아. 그들의 영원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두 여성을 보고 리에르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리에르의 배에서 연신 꼬르륵 소리가 울려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리에르는 덕분에 답답함만 점점 쌓여갔다.
-Master 정말 인기 없군요.
“고철 따위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리에르는 배고파서 짜증 나 있는데 아르카까지 들이대자 울컥하는 마음들이 솟아났다.
-Master에게 페로몬이 부족해서입니다. 남의 탓을 하지 않습니다.
리에르는 아르카의 말을 듣고서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젖힌 뒤 아르카를 잡아 뜯었다. 덕분에 아르카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Master 감정적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너 어차피 다리도 생기잖아. 떨어져도 다시 기어 올라오면 되지.”
-Master가 암컷들에게 인기를 끌 방법을 제시합니다.
다급한 아르카의 말에 리에르는 잠시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때는 이때다 싶어서 아르카는 말을 이었다.
-Master의 견적은 불리한 규격이 아닙니다. 하지만 암컷들에게 보내는 음성 신호를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에르는 아르카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뭔 말이야.”
-암컷들은 분위기 조성에 약합니다. 예를 들자면 Master가 몸이 안 좋은 것을 이용해서도 유혹할 수 있습니다.
“가령?”
리에르는 아르카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배는 고프고, 할 것도 없었기에 시간 때우기가 필요했다.
-난 오래 못 산다. 하지만 너와 번식함으로써 자손을 남기고 싶다.
리에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픈 모습을 보여줘서 암컷의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리에르는 아르카의 이번 말은 그럴듯하다고 느꼈다.
-오빠 믿습니다. 혹은 손만 잡고 잡니다.
리에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 지금 장난치는 거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이후로 있습니다.
아르카는 진지하게 다음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나랑 살 겁니다, 아니면 죽을 겁니다. 아니면 문이 열립니다, 그대가 내 마음 안에 들어옵니다. 등등을 시작으로 합니다.
결국, 리에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억지로 아르카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이번만은 정말로 위험했기에 아르카는 팔을 만들어서 버텨냈다.
“검과 무척 사이가 좋군요. 리에르 님.”
그때 리에르의 등 뒤에서 낯설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리에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야 안으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순백의 미남자가 보였다.
엘 파실드. 신의 대적자이자 첫 번째 포스로 유명한 전설의 남자였다.
“어제는 서로 기회가 없었죠. 가능하다면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엘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신비함을 가진 사내였다. 하지만 리에르에게는 그러한 엘의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리에르는 상대를 함부로 믿지 않는 성향이었다. 달콤할수록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다. 그는 이제 누구보다 그런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리에르는 엘의 비상한 관심이 불편했다. 그리고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 머릿속으로 고민하였다.
단순히 사람이 좋아서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아직 엘에 대해 알지 못했다.
같은 포스 각성자이기에 친분을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종족이라는 편견으로 믿기엔 포스란 것들은 개인주의가 강했다.
하지만 얻을 것은 있었다. 리에르는 원하는 정보와 지식을 갖기 위해선 엘과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 했어요.”
“리에르 님이 저를요?”
엘은 리에르의 말이 의외라는 듯이 놀라워했다.
리에르는 어차피 지금 시간이 남아도는 상태였다. 같이 식사를 하려 했던 일행은 변태 같은 소설 내용을 교류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앞으로 우리가 자주 볼 사이라고 생각되는데, 극존칭은 불편하네요.”
리에르의 말에 엘은 음,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수없이 많은 대륙의 사람 중에 같은 힘을 지닌 형제들끼리 거북함을 가지게 할 수는 없지요. 리에르도 그냥 엘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러죠, 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