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56)
레필리아 레소드-156화(156/398)
레필리아 레소드 156화
아키서스 공방전(11)
리에르는 형제라는 말이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져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온화해 보이는 엘, 음흉해 보이는 리즈.
그 두 사람은 둘째 치고 네 번째 포스는 고개가 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일 하사드는 같은 포스 사용자였지만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때는 아르미안의 존재 때문에 사이가 나빴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굳이 그녀의 존재가 아니라 하더라도 리에르와 아일은 서로를 죽이고 싶어서 했다.
엘은 신의 대적자였다. 세상의 만물을 파괴하려 한 악당이라는 서사시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단의 서적에 기록된 이야기에 불과했다.
실제 엘에 대한 역사는 인류에게 찾아온 멸망의 길을 몇 차례나 막아온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위대한 순백의 마도사.
그것이 엘 파실드에 대한 역사서의 평가였다. 그에 관한 이야기로는 책 한 권이 부족할 정도로 전승된 이야기들이 많았었다.
리에르 역시 어릴 적에 읽었던 엘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흥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들이 있었다.
그랬던 인물이 눈앞에 있으면 기뻐야 했지만 기쁘지 않았다.
“저에게 할 말이란 것이 심장에 관련된 이야기인가요?”
엘은 이미 리에르의 의중을 읽고 있었다. 리에르는 짐짓 할 말이 없어져 머리를 긁적여 보였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속으로 고민하던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네. 리즈에게 들었나요?”
“리즈는 리에르를 매우 걱정하고 있었으니까요.”
리에르는 리즈의 얼굴을 떠올렸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살육자. 항상 살기 어린 눈빛을 지닌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말은 전혀 와 닿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리에르는 혹시나 하는 희망 어린 표정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엘의 입에서는 기대 이하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고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리에르는 왠지 손아귀에 힘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엘이라는 존재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리에르가 아는 내용에 의하면 엘 파실드는 죽었던 사람도 되살리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같은 마력은 지금껏 유일무이한 권능이나 다른 바 없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확정된 바나 다름없었다.
“심장이 문제가 아녜요.”
엘 파실드는 창가에 기대며 안타까운 듯이 고개를 저어 보인다.
“강력한 힘으로 운용되던 당신의 신체는 이미 밸런스가 무너졌어요. 그 무너진 육체에는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을 겁니다.”
리에르는 엘의 말을 들으며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것 하나를 떠올렸다. 마침 아르카를 떼어놓기 위해 발코니 쪽으로 자리를 이동한 점.
덕분에 이런 이야기 때문에 이제 만난 에레사를 슬프게 하고 싶지도, 유이의 얼굴에 그림자를 생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엘은 낙심하는 리에르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신 제 마력으로 당신의 소실된 시간을 메워줄 순 있어요.”
리에르는 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즉, 리에르가 죽지 않도록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어요. 그렇게 유지된 시간 동안 당신은 단 하나만 생각하면 됩니다.”
리에르는 대답 대신 재촉하듯이 눈빛을 굴렸다. 잠시 말을 멈추고 엘은 부드럽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리에르가 회복될 방법은 단 하나였다.
“포스를 잃어 생긴 병은 포스를 회복시키면 됩니다. 리에르의 힘을 앗아간 존재가 그 힘을 소유하고 있을 테니까요.”
리에르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아르미안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날.
아르미안은 악랄하게 웃으면서 리에르를 비아냥했다. 하지만 그 눈빛에 걸린 애처로움이 무엇인지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할 필요가 없었다. 아르미안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었기에.
살고 싶다면, 삶을 갈구한다면 자신을 다시 만나고, 자신을 죽여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으로는…….”
아르미안을 죽이는 것으로 포스 오브 석셔너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엘은 그 이외에 방법도 알고 있었다.
“리에르의 또 다른 권리를 각성하는 것.”
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잠시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지워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자상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웃음기를 지워낸 엘의 모습은 리에르에게 이상할 정도의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손과 발을 경직시키는 무언의 압박감이었다.
“그게 무슨…….”
리에르는 엘의 말에 반문하였다. 엘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저와 리즈는 같은 힘을 지닌 형제를 그렇게 쉽게 보낼 생각 따윈 없어요.”
엘은 부드러운 발걸음을 디디며 리에르에게 다가왔다. 마치 비단 천 조각이 허공에 떠도는 듯 정적인 모습이었다.
엘의 손이 리에르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스킨십에 리에르는 당혹감을 느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점점 각혈이 심해지고 있군요. 심장의 병이 진행되고 있는 거예요.”
리에르의 각혈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고통은 극심해졌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으나 간헐적으로 옥죄이는 고통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리테 엘 파티시아.”
엘의 속삭임과 함께 리에르의 몸은 황금빛에 감싸졌다. 정확히는 엘이 잡은 리에르의 손목에서부터 황금 물결이 휘몰아쳤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릴 것 같은 나른함을 느꼈다. 혈액을 타고 전신에 퍼지는 따뜻한 기운은 너무나 편안하고, 너무나 따뜻했다.
“그것이 제가 가진 마법력의 이름이에요.”
신의 정원 엘 파티시아. 신의 혈액, 신의 샘물이라 불리는 엘 리테.
황금빛으로 충만한 이 기운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침범하고, 허용하고, 분석한다.
리에르는 매우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엘은 놀라는 리에르의 표정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이 마력을 이용하면 당신의 몸을 어느 정도 회복시킬 수 있어요.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끼얹어야 의미는 없습니다. 손상된 부위를 회복시켜야만 비로소 완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리에르를 향해 엘은 맑게 웃어 보였다.
“그래요, 이 마력만 계속 흡입한다면 당신은 죽지 않을 수 있는 거지요.”
리에르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엘의 말은 자신의 유한한 생명을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뿐만 아니에요. 이 마력은 아직 잠재된 당신의 포스를 조금이나마 사용할 수 있게 해줄 겁니다.”
“포스를?”
엘의 말은 리에르에게 있어 희소식이나 다름없었다. 리에르는 기대 이상의 희소식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죽음으로 뒤덮인 인생이었다.
“하지만 앰플을 흡수한 그 순간만 가능한 거라 효과는 크지 않아요. 어디까지나 이 마력은 당신의 회복을 위해 준비된 것들이니까요.”
“아, 고맙습니다.”
리에르는 엘이 건네준 앰플을 받으며 얼떨떨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손에 놓인 앰플들은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분명 기뻐해야 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가슴 한편에 의혹이 자리잡혀갔다.
리에르는 회복 마법 쪽으론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기적을 선보이는 마력, 그것도 그 마력을 담는 앰플이라면 어지간한 금액과 정성, 시간을 들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엘은 마치 미리 준비해 놓았다는 듯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처럼 그것을 리에르에게 건넸다.
“이점만 가득한 물건이고, 희망만 가득한 이야기네요.”
리에르는 앰플들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단순한 자애? 단순한 호의? 단순한 배려? 그딴 것들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어야 했다. 리스크 없는 행운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엘은 리에르의 그런 말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같은 존재란 이유만으로 이 모든 도움을 드리겠다 단언하는 것은 아니지요. 세상은 주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어야 하니까요.”
“제가 내놓을 수 있는 부분이 있나요?”
리에르의 입장에선 안심이 될 수 있을 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의심이 불끈불끈 머리를 내밀었다. 마치 이것도 상대의 의도 같다는 괴팍한 의심처럼.
“속고만 살아왔던 당신에게 있어 생각을 감추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요.”
엘은 그렇게 말하며 소년처럼 맑게 웃어 보였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말투였다.
“저 혼자선 절대 이길 수 없는 강력한 적이 있어요. 그를 잡기 위해선 리즈와 리에르의 도움이 필요해요. 아울러 당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도 그 적은 쓰러뜨려야 할 존재예요. 즉, 우리의 목적은 전부 일치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상대의 말은 뜬구름을 잡는 듯했다. 리에르는 엘의 말에 다른 대답 대신 듣기만 하였다.
“일단은 그것을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너무나 고마운 선물이군요.”
리에르는 엘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였다.
거짓은 단 한 점도 보이지 않는 맑은 눈동자.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리에르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뭔가요?”
리에르는 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 그냥이라거나 호의라거나 하는 말 따위는 믿을 수 없었다.
오히려 거래라면 리에르의 입장에선 편안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리에르가 생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당신은 친구를 위해 전장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거예요.”
“네.”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현재 몸이 망가진 상태가 아니라면 리에르는 어떤 억지를 부려서라도 따라 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리에르는 지금 전투를 하면 할수록 목숨이 깎여 나가고 있었다.
“전장에서 적을 베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일이 있어요. 친구를 돕고,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일이죠.”
“뭔가요?”
리에르는 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잠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엘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가죽끈으로 묶인 양피지를 리에르에게 넘겨주었다.
리에르는 엉겁결에 엘에게서 양피지를 받아들였다.
손안에 들어온 양피지는 언뜻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소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보안을 위해 끝은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페리안의 문양?”
리에르는 양피지에 찍힌 페리안의 인장을 보고 엘을 바라보았다. 엘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리에르에게 입을 열어 보였다.
“유트와 리즈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대전을 위해, 대륙의 미래를 위해서 페리안은 코스모스 연합과 전면전을 펼칠 예정입니다.”
그 부분은 리에르도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리에르가 아는 코스모스는 절대 만만한 단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제4대 포스도 존재하고 있었다.
“반 코스모스 연합의 첫 번째 구성원으로서 대륙의 신검, 로이스타 아르빈트가 있는 아렌 왕국과 동맹을 하려 합니다. 당신은 그에 대한 사절이 되어주셔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