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57)
레필리아 레소드-157화(157/398)
레필리아 레소드 157화
노스텔지어(1)
“후우…….”
가녀린 등을 전부 감싸는 듯한 은빛 머리카락. 그것을 소유한 소녀는 테라스에 홀로 선 채 한숨을 내쉬었다.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머리의 관. 고급 재질로 만들어진 순백의 드레스. 그것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누구나 눈을 마주하면 사랑을 노래하게 만들 것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 그 눈동자는 테라스 바깥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신분은 걱정 하나 없이 살아도 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깊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유일한 혈육은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이겨도 불안한 것이 전쟁이었다. 하물며 굉장히 불리한 상황에서 치러지는 전쟁이다.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키서스 성에서 벌어진 전초전이었다. 선봉대로 간 근위 기사 프세는 페리안에게 첫 승전보를 안겨주었다.
프세는 용병단 출신으로서 많은 전투를 경험한 인물이었다. 용병단은 대다수 약탈전, 혹은 백병전에 특화가 되어 있는 것이 정석이었다.
성을 먼저 선점한 프세는 아키서스에 남아 있던 잔존 병력과 함께 수성을 시작했다.
처음엔 극소수의 병력을 보고 우습게 보던 교단은 가볍게 전초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전초전은 제대로 된 공성 장비도 없는 상태에서 벌어진 우격다짐 식의 전투였다.
첫날은 당연히 교단의 패배였다. 둘째 날은 약이 바짝 오른 교단군이 총공세를 가했다.
둘째 날의 공성전으로 인해 선봉 전의 결과는 결정되었다. 겨우 오백 명의 페리안이 이천 명이 넘는 교단군을 패퇴시켰다.
초반 기선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리함이 뒤집힌 것은 아니었다.
전장의 발판을 지켰으니 일단 최악의 사태를 벗어난 것에 불과했다.
유이는 유일한 혈육이 곁에 없으니 성안에는 잘 알지 못하는 타인들만 가득 남게 되었다.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유이를 보석 다루듯이 대했다. 마치 부서질 것 같은 예술품을 대하듯이, 혹은 고귀한 미술품을 보듯이.
유이는 차라리 활을 들고 전장에 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여성이기에 근력의 불리함을 이기고자 검을 버리고 활을 택했다. 애초에 격투 감각이 있는 유이는 어렵지 않게 활을 배웠다.
무엇보다 그녀의 무술 스승은 대륙 오제 중 한 명인 신궁의 아로운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실력은 페리안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의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속박당해야 했다.
새장 속의 새.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은빛의 공주는 불안함에 휩싸여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행을 다녔었다. 비록 잠자리나 먹거리는 불편했지만 무엇을 하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 자유로움은 그녀에게 있어 오래전의 추억처럼 그리움이 생겨났다.
지금 유이의 곁에는 에레사도 떠나고 없는 상태였다.
소꿉친구인 리에르마저도 성을 떠나고 없었다.
“하아…….”
유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해서든 리에르를 따라가야만 했다. 지금 리에르는 페리안을 위해 밀명을 전하러 갔다.
반 코스모스 연합.
리즈는 실각했던 로이스타가 다시 대원수의 자리에 올라온 것을 들었다. 그리고 로빈타와는 비밀리에 동맹을 맺은 것도 알았다.
페리안도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답은 결정되어 있었다.
자신의 친부를 암살한 비열한 교단을 유트가 용서할 리 없었다. 리즈는 연합을 결성하기를 원했다.
그 동맹 건을 위해 리에르는 에레사와 함께 아렌 왕국을 향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 전날. 리에르는 어색한 표정과 행동으로 유이를 찾아왔다.
유이는 갑자기 찾아온 그를 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하지만 리에르의 입에선 의외에 말이 튀어나왔다.
“혹시, 나랑 같이 가주지 않을래…….”
유이는 너무나 의외인 리에르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자리에는 없지만, 그가 에레사가 쉬고 있는 방을 모를 리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유이는 얼굴에 홍조가 그려졌다.
유이는 에레사보단 아르빈트 집안과 인연이 덜했다. 당연히 에레사가 가는 것이 리에르에게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리에르와 단둘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일행에 엘 파실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엘은 수도 근처까지만 함께했다. 텔레포트로 두 사람을 데려다준 뒤에 엘은 다시 페리안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즉 아렌 왕국으로 가는 몇 일간은 단둘이었다.
“에레사 언니는……?”
유이는 자신도 모르게 응하고 대답할 것 같아서 화제를 돌렸다. 유이가 아는 리에르라면 훼방꾼이 없어야 더 좋아할 터였다.
그녀는 두근거림과 설렘을 담아 리에르의 답변을 기대했다.
“에렌이랑 가면 좀 쑥스럽잖아.”
유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리에르는 그런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계속 말을 이었다.
“너야 하는 짓은 얄미워도 유트 동생이고, 나만 가서 아버지들을 보기는 용기가 안 나고…….”
“날…… 뭐로 보는 거야.”
유이는 울컥 화가 치밀어서 리에르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반응에 리에르는 당황스러워했다.
“오빠는 전쟁하러 나갔는데 내가 여행이나 가게 생겼니?”
“아니, 어차피 동맹 건 이야기 할 거면…… 아렌 왕국의 여왕과 대화도 해야 할 거고…… 너도 일단은 공주니까.”
“난 바빠.”
유이의 말에 리에르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냉랭한 그녀의 반응에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유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생각해서 말을 해준 것 같은데 너무 쌀쌀맞았노라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와 함께하는 여행이 싫지는 않았다. 유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리에르는 마침 에레사와 마주쳤다.
리에르는 에레사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더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유이는 들어보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좀 좋게 설득을 하든지, 아니면 한 번 더 말이라도 하든지.’
유이는 리에르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그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 보였다.
유이는 왠지 모르게 리에르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일부러 쳐다도 보지 않았다.
결국, 리에르는 에레사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혼자 남게 된 유이는 왠지 모를 적적함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냥 같이 갈 걸 그랬나…….”
듣는 이는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중얼거림이었다. 유이의 시야 안으로 테라스 바깥이 보였다. 밖은 이미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녀의 시야 안으로 활기차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 에일 맥주를 위해 가게에 들어서는 사내들. 그리고 외식하러 다녀온 가족들.
“어차피 에레사 언니에게 정신도 못 차리고 있으니…….”
유이는 헤실거리는 리에르의 모습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쳐보였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올려 있는 장미의 기사 프란츠 단행본을 바라보았다. 다시 유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죄 없는 단행본을 침대 위로 힘껏 집어 던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아무렇게나 펼쳐지는 책 사이로 보이는 삽화.
사랑을 위해, 국가를 위해,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기사.
고귀한 장미의 프란츠가 흰 치아를 반짝이며 웃는 삽화가 보인다. 유이는 그것을 보고 뚱한 표정으로 테라스에 등을 기댔다.
“바보.”
* * *
“엣취.”
리에르는 재채기하면서 코를 문질렀다. 에레사는 리에르에게 걱정스레 입을 열어 보였다.
“감기라도 걸렸어?”
“설마.”
어스름한 노을이 햇볕을 가리고, 시커먼 달이 고개를 내밀자 벌레들의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의 바람이 몸을 움츠리게 했다. 그 움츠려진 어깨는 모닥불을 피우고 싶게 만들었다.
엘 파실드는 리에르와 에레사를 아렌 왕국 수도 근처까지 텔레포트 시켜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다른 볼일을 위해 곧바로 길을 떠났다. 곧 수도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리에르도 마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엘이나 리즈처럼 전문적인 마법사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텔레포트, 공간이동과 같은 편리한 기술이 부럽게 느껴졌다.
“나도 텔레포트나 배워볼까.”
“네가?”
에레사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어 보였다. 리에르는 눈을 부릅뜨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이거 왜 이래? 나 안 그렇게 보여도 기본 마법들은 사용할 줄 알거든?”
“정말?”
에레사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리에르를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인과 달리 특별한 존재로 바라봐 왔었다. 그리고 실제로 리에르는 굉장히 강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에레사의 기억 속에 있는 리에르는 그저 풋내기 같은 소년에 불과했다.
“곧 보여줄게. 일단은 여기서 좀 잤다가 새벽에 다시 출발해야겠다.”
리에르는 엘이 준 지도를 펼쳐 보였다. 대략 하루, 이틀 정도면 충분히 아렌의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굳이 지도가 없어도 찾아갈 수 있을 거리였다.
리에르는 짐 가방을 내려놓고서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장작들을 주워 보았다.
“오늘 밤은 둘만 있네.”
리에르의 등 뒤로 에레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밝은 음성이었으나, 묘하게 상기된 것처럼 들려왔다.
“응, 너 조심해.”
리에르는 주운 장작들을 끌어안으며 심술 맞게 이죽거렸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어 보였다.
“왜?”
“남자는 다 늑대니까.”
리에르는 장작들을 모아 에레사 쪽으로 걸어오며 대답했다. 건조한 겨울철이라 그런지 쓸 만한 나뭇가지들이 상당수 모여들었다.
리에르는 장작들을 불 피우기 좋게끔 끌어모아 나열했다. 에레사는 그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눈동자를 구부려 보였다.
“하긴 우리 리엘 아저씨도 성인이니까.”
“내가 아저씨면 넌 아줌마잖아. 나보다 두 살 더 많으면서.”
“어머, 난 그래도 동안이라 10대로 보는 사람들도 있던걸?”
“그럼 난 꼬마겠네.”
리에르는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배 이상 키가 컸다. 그런 주제에 스스로 꼬마를 자처하는 그를 보며 에레사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킥킥거렸다.
“세상에 이렇게 징그러운 꼬마가 어디 있어?”
“오랜만에 만나서 잘생겨졌다고 얼굴 붉히던 여자가 누구시더라.”
리에르의 능글맞은 웃음을 보면서 에레사가 불만스럽게 눈썹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아, 저거 봐. 진짜 아저씨 같아. 심술은 여전하셔.”
에레사의 즐거운 말투를 들으며 리에르는 모인 장작 쪽으로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지그시 감아버린 눈. 그 바깥으로 보이는 마나의 공간이 불꽃의 연소점들을 보이게 만들었다.
생명의 꽃을 피우지 못하는, 이제 장작이나 비료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나뭇가지에 보이는 붉은 점을 손가락으로 찌르고 들어가자 투득, 소리와 함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와.”
에레사는 리에르가 손만 가져다 대었을 뿐인데 불이 붙는 것을 보고 신기하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인 엘과 맹약의 블루드래곤, 카르샤와 함께했던 에레사지만 마법을 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엘 파실드는 그냥 보면 일반인과 다른 바 없었고, 마법은 불필요하게 사용하는 법이 없었다.
카르샤가 사용할 줄 아는 마법들은 대다수 전투용이었기에 에레사가 볼 일이 없었다.
“훗, 이정도야.”
에레사가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리에르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역시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구나.”
에레사의 목소리는 다소 처연하게 들렸다. 리에르는 고개를 원위치하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왠지 모를 우울함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은 밝아 보였고,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겉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림을 담고 있었다.
“왜 그래?”
리에르는 에레사의 분위기가 묘해지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올렸다.
에레사의 눈 안으로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리에르의 커다란 손이 보인다. 걱정스럽게 다가오는 리에르의 손이 에레사의 이마를 짚었다.
“안 아파.”
에레사가 콧잔등을 찡긋하면서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