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58)
레필리아 레소드-158화(158/398)
레필리아 레소드 158화
노스텔지어(2)
이마에 닿는 리에르의 손길. 에레사는 차가운 그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미소를 머금었다.
에레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이 리에르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볼에 갖다 댄다. 기분 좋은 그녀의 중얼거림.
“따뜻해.”
리에르는 에레사의 따뜻한 온기와 속삭임을 들었다.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감촉들이었다. 리에르는 손끝에서 전해져오는 온기에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눈앞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마치 떨어지는 꽃잎처럼 혈화를 흩날리며 차갑게 굳어가던 그녀를 기억했다.
그것은 분명히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다.
리에르는 에레사가 눈앞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피보라를 뿌리는 악마가 되었다.
이미 수년 전의 일이지만 페이서스 항구는 예전에 찬란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인산인해로 북적이던 그곳은 폭룡 네버 에이지의 영역으로 바뀐 지 오래다.
“나 때문에 네가 그렇게 되었단 이야길 듣고 너무 무서웠어.”
에레사의 청아한 목소리가 숲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말과 함께 주변에 잔잔하게 울려오던 풀벌레 소리마저 정적으로 바뀌었다.
리에르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무거운 마음이 찾아들었다.
그로서는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싫은 기억이었다. 그는 그저 미쳐 버린 살육자가 되었다.
인사를 건네던 사람들, 자신이 뛰어다녔던 골목 모두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것은 분명히 쾌락이란 것이었다.
그가 지금껏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 핏물을 머금은 분홍빛 내장들은 소중한 온기로 가득했다.
뺨 위로 닿는 혈화의 온기, 소중한 것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들. 공포로 젖어 있는 그들의 눈동자는 말도 못 할 희열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다니던 카이샤는 사라지고, 같이 떠들던 친구들은 전부 죽고,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던 아빠, 엄마도 없고…… 내가 좋아하던 남자애는 내 곁에 있어줄 수 없었고.”
에레사는 흐느끼듯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마치 가벼운 넋두리처럼 들려오기도 하였다.
리에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가를 흐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죽음이 덮어줄 때까지 자신을 따라다닐 죄의 무게. 절대 없어지지 않을 저주들.
리에르의 손은 에레사의 볼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평범하고 행복했던 그녀가 고향을 잃게 된 원인은 리에르였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손이 멀어지자 양손을 들어 붙잡았다. 그러고는 맑게 입을 열었다.
“가족을 잃은 나에겐 너만이 전부였어. 정말 보고 싶었어, 리엘.”
“응…….”
“많이 힘들었지?”
“…….”
리에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타닥타닥.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던 장작이 이제야 불길이 일어났다.
“그동안 이야기 많이 들었어. 이제부턴…… 내가 쭉 같이 있어줄 테니, 혼자 짊어지고 가지 마.”
리에르는 에레사의 손을 통해서 다정함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죽음의 길로 내달리려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기억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뛰지 않을 것 같던 심장은 잠잠하게 고동친다.
“난…… 모르겠어.”
“응?”
리에르의 말에 에레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너무나 답답했다. 가슴속에서 미어지는 말들은 오랫동안 함께했던 에레사이기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유트들 옆에 있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고귀한 생활을 하는 두 사람에게 나라는 재앙이, 나라는 존재가 그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리에르는 자신의 손을 눈앞으로 들어 보였다.
아무것도 묻어져 있지 않은 깨끗한 손. 하지만 리에르의 눈에는 항상 피로 적셔진 듯 느껴졌다.
“내가 원했던, 원하지 않던. 나라는 존재로 인해 내일을 볼 수 없는 사람들. 그것을 너무나 감당하기 힘들어. 매일 같이 악몽을 꿔. 매일 같이 원망하는 원령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아.”
리에르의 눈동자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고통으로만 깃들은 눈빛을 보며 에레사의 눈동자에 슬픈 빛이 그리워졌다.
그녀는 맞잡았던 리에르의 손을 들어 조용히 입술을 갖다 댔다.
손끝에 닿는 에레사의 부드러운 입술은 믿기 어려울 만큼 따뜻했다. 마치 데기라도 할 것처럼.
“항상 싸움과 죽음이 있는 곳에 있어서 그럴 거야.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 있으면 안정될 거로 생각해.”
평화와 안정. 그 거만한 사치에 리에르는 비아냥거림하고 싶었다. 자기 자신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었다.
많은 생명의 무게를 앗아간 자에게 이런 소소한 행복마저도 내일이면 깨서 없어질 것 같은 꿈이었다.
“나랑 조용한 곳에 가서 단둘이 살지 않을래?”
에레사는 눈빛을 빛내며 미소하였다. 리에르는 너무나 의외인 그녀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평화로운 일상.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포기하고 살았던 인생이었다.
자신이 포스라는 존재였다는 것을 잊는다. 자신이 적혈의 악마였다는 사실도 잊는다. 자신이 사람을 해치는 검을 내려놓는다.
그 모든 것을 잊고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행위는 막역한 ‘꿈’이었다.
그 꿈이라는 녀석에게 에레사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하지만 리에르의 심장은 죽음이 잠식하고 있었다. 언제 멈출지 모르는 생명을 갖고서 바랄 수 없는 행복을 꿈꿀 수는 없다.
리에르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평범한 소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곧 찾아온 현실은 뜨거워진 가슴을 차갑게 식혀주었다.
리에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에레사의 눈빛은 슬픈 듯이 흔들렸다.
리에르를 다시 만나게 되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에레사는 상처 입은 리에르를 자신의 곁에서 쉬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그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난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어째서……?”
리에르의 말을 에레사가 처연하게 되물었다. 용기를 내서 말해준 그녀에게는 너무나 고마웠다.
리에르는 마치 울 것처럼 눈을 굴리는 에레사의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어졌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중얼거렸다.
“아직 할 일이 많거든.”
리에르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에레사에게만은 죽음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분명 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하자면 희망이 없지만은 않았다. 될 수 있다면 살고 싶었다.
“일이 다 끝난다면…….”
리에르는 작게나마 소망했다.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죽지만 않는다면, 과거를 청산할 수 있다면 그녀와 함께하는 조용한 삶도 나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라면 내가 너에게 부탁하고 싶어.”
“리엘…….”
에레사는 기쁜 듯이 리에르에게 다가가 포옹했다. 부드러운 금발 머리카락이 리에르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부드러운 그녀의 체온이 리에르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때까지 내가 지켜줄게, 리엘.”
타닥타닥.
소리 내어 불티를 흩날리는 장작불. 에레사의 따뜻한 체온, 그리고 잔잔하게 들려오는 풀벌레의 연주. 은은한 달빛의 아래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미래에 대해 약속을 하게 되었다.
리에르로서는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희망으로 바뀌었던 순간이었다.
또한, 죽음을 향해 검을 들었던 그가 살기 위한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는 계기였다.
-잘하고 있습니다. 이제 껍질을 벗기고 넘어뜨리면 짝짓기를 할 수 있습니다.
아르카의 말투는 평소와 다르게 격앙되어 있었다.
리에르는 덕분에 이마에서 힘줄이 잡혔다. 에레사는 아르카의 말에 풉, 웃음을 터뜨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나, 이 빌어먹을 고철 자식.’
아르카가 산통을 깨준 덕분에 에레사가 리에르의 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동안 리에르는 아르카가 자신을 정말 도우려는 것인지, 방해하려는 것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아르카가 신경이 쓰인다면 아르카는 잠시 산책을 다녀옵니다.
이미 커플 브레이커로서의 숙명을 타고난 녀석이었다. 그런 주제에 뒤늦게 하는 말이 더 얄미워져 리에르는 아르카를 한껏 쏘아보았다.
-Master 방해가 된 것 같으니 아르카는 산책을 갑니다.
아르카는 발 같지도 않은 거로 쓸쓸하게 수풀 속을 걸었다. 아르카의 축 늘어진 뒷모습을 보니 리에르는 괜스레 측은함이 느껴졌다.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아르카를 다시 불러 세울까 생각하던 리에르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되었다.
-ㅋㅋㅋ.
‘저 녀석 웃었어. 분명히 웃었다!’
리에르는 당장에라도 뛰어 쫓아가서 아르카를 담금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밤의 수풀 사이로 숨어 들은 녀석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엘과 잘 어울리는 검이야.”
옆에서 에레사가 웃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울컥했던 마음을 풀지 못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레사는 배시시 미소를 그리며 손을 뻗어 리에르의 양 볼을 감싸 안았다.
따뜻한 그녀의 손안에 체온. 그것을 느끼며 리에르가 의아함을 품는다. 그때 에레사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닥불의 탄내가 리에르의 코끝을 스친다. 부드러운 그녀의 금발이 그의 귓가와 볼을 간지럽힌다.
풀잎이 머금은 이슬처럼 촉촉한 그녀의 입술. 리에르는 자신에게 입 맞춰지는 놀랄만한 부드러움에 동공을 열었다.
에레사는 천천히 리에르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그리곤 홍조를 그리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내 말을 잘 들어줘서 상 준 거야.”
“어, 어…….”
리에르는 쑥스러움에 멋쩍게 대답했다. 에레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곤 양쪽 검지를 맞대며 꼼지락거렸다.
리에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래?”
“저기…… 그런데.”
달빛이 어스름하게 빛의 커튼을 내렸다. 그 안에서 에레사의 얼굴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붉혔다. 뒤늦게 찾아온 쑥스러움이 가득한 눈빛.
“난 뽀뽀만 하려 한 건데…… 리엘, 뭔가…… 능숙해.”
에레사의 말에 리에르는 속으로 뜨끔함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움직여진 것을 어찌하랴. 의혹에 가득한 에레사의 시선을 받으며 리에르는 고개를 돌리고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은 이후 성에서 싸온 샌드위치, 음료 등을 나눠 먹었다. 모닥불 사이에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리에르의 그동안에 일이라고 해봤자 에레사에게 들려줄 만한 것은 없었다.
하나같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간이었으니 대화 소재론 최악이었다. 덕분에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에레사가 되었다.
그녀의 대화 주제들은 여행 동료였던 엘과 카르샤였다.
그들과 함께했던 여행도 길었던 만큼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존재했다.
카르샤가 위대한 블루드래곤 종족이란 것을 알았을 때 에레사는 말도 붙이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의외로 카르샤가 엄청 붙임성이 좋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금방 친해지게 되었다.
카르샤는 굉장한 목욕 광이라 온천이 있는 마을에 들르면 종일 온천욕을 즐겼다.
한 번 끌려가면 손과 발의 지문이 쭈글쭈글해지는 것은 일상이었다. 아울러 그녀는 굉장히 스킨십을 좋아했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면 아무나 입을 맞췄다. 그리고 껴안고 주물러대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 상대 또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이후 에레사가 꺼내는 엘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찬양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엘 파실드, 전설의 남자. 아름다운 꽃미남에 성격은 온화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한, 엘은 여행하는 동안 여성들을 배려하여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가사 실력 또한 천하일품이라 웬만한 가정주부 못지않은 우월함을 지녔다.
에레사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하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대륙 최강의 대마법사이자 최초의 포스가 손빨래의 달인이라는 말은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