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6)
레필리아 레소드-16화(16/398)
레필리아 레소드 16화
최악의 약혼자(5)
“말도 안 돼요!”
소녀의 앙칼진 외침에 아레스트 후작이 식은땀을 흘렸다.
평소엔 엄하고 의젓한 후작도 무남독녀에게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십일검 기사단의 단장인 로이스타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영애의 생각이 더 중요한 것이지. 싫은 이유를 확실하게 밝히는 게 좋을 거다.”
로이스타의 말에 그녀는 씩씩, 거리다가 자신의 부친, 아레스트 후작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약혼 상대가 파에트 님이 아닌 거죠?”
로이스타는 풋, 웃음을 터트렸고 아레스트 후작은 이마에 손을 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미의 나이가 18세.
귀족의 자제가 그 나이대가 되면 약혼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반려가 정해지기도 하였다.
성 내에서는 양 가문의 혼사는 당연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문제였다.
대다수 사람은 제이미의 상대가 파에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름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아르빈트 가의 차남과 혼담이 나오자 제이미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파에트 아르빈트라면 신검 로이스타의 첫째 아들이며 천재적인 검술로는 부친을 능가한다고 평을 받는 인재였다.
게다가 잘생긴 외모와 잘 다듬어진 몸매와 번듯한 성격으로 인해 수도에서도 그를 꿈에서 찾지 않는 여자가 없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그러한 그를 좋아하는 제이미는 그가 약혼 상대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만 이름도 모르고 본 적도 없는 그의 둘째 아들이 약혼 상대라는 것은 매우 불쾌했다.
“영애, 파에트는 전장에 있는 몸.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 하네. 전장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아버지의 생각을 모르겠는가?”
평소 존경하던 로이스타의 말에도 제이미는 꿈쩍도 하질 않는다. 대신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은 채 자신의 가슴께로 한 손을 올리며 호소한다.
“아무리 로이스타 아저씨의 아들이라지만 이름도 없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는 건가요?”
“그게 말이다…….”
제이미는 아레스트 후작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번 앙칼진 눈빛으로 쏘아붙이며 선포했다.
“제 약혼은 제가 결정해요! 어디 두 분이 약혼자로 지정하신 아드님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오겠어요.”
아레스트 후작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로이스타는 웃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저는 아가씨에게도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로이스타마저 그런 말을 하자 아레스트 후작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거대 제국 오트리아는 30년 전의 내전으로 피폐 되었다.
전국은 삼삼오오로 분열되어 혼란이 극에 달해간다.
황권은 약화하여 이름뿐이었고, 오트리아에 속해 있던 영지들이 각각 독립을 선포하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 중인 중요한 이때 제국 최고의 기사, 로이스타 아르빈트와 맺어지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뿐인 외동딸이 싫다는데야 아레스트 후작도 별수가 없었다.
“알았다. 제이미, 네 뜻대로 하려무나.”
“그럼 저에게도 권리가 있으니 직접 만나보고 즉답을 하겠어요.”
‘어차피 파에트 아닌 다른 사람에겐 시선도 안 갈 거면서.’
아레스트 후작은 제이미를 보면서 애써 말을 삼켰다.
* * *
아침을 알리는 새의 지저귐, 제이미는 눈이 지그시 떠졌다.
“아, 또 불쾌한 꿈을 꾸고 말았다…….”
제이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비볐다.
최고급 침대 위가 아닌, 낡은 침대 위에서 눈을 뜨는 것은 어색했다.
성에서라면 그녀가 일어나는 시간에 세숫물을 가져오고, 수발을 들기 위해 사람이 오간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일어나서 혼자 눈을 뜬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굳이 보러 올 것조차 없었어.’
제이미는 페이서스까지 온 것을 후회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리에르가 어떤 사람인지 보러왔다.
‘소문보다 더 심해. 파에트 님과 같은 피를 가진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제이미는 이미 리에르에 대한 평가를 마쳤다.
창밖으로 바람과 함께 손짓하는 나뭇가지, 그리고 미소 짓는 햇볕을 바라보던 제이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약혼자라는 녀석을 만나는 목적을 이루었다.
이제 망할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성으로 가서 리에르와 파에트의 차이점을 연설하면 될 일이었다.
“아악! 망할 어머니. 내가 어째서 저딴 녀석을 안내해 줘야 하냐고요! 나 오늘 시합 있는 거 몰라요?”
“아들, 엄마는 지금 너에게 부탁도, 강요도 하는 것이 아니란다. 명령이란다.”
제이미는 동경하는 파에트의 친모, 라일라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과 더는 한집에 있는 것이 싫었다.
사실 이 정도로 싫은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
‘저런 원숭이 같은 남자가 남편이 된다면 차라리 죽이고, 자결하는 것이 낫다.’
제이미는 리에르가 끔찍하게 불쾌했다.
“알았어요. 그냥 카에르 내에 집어 던져만 놓고 오면 되는 거죠?”
제이미는 점점 성난 원숭이의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다.
현재 머리도 묶지 않았고, 모자도 쓰지 않았다.
그녀의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은 어깨를 지나 가슴께까지 내려와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잘 때는 답답한 남장 옷을 벗어 던졌기에 속옷만 입은 상태였다.
제이미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다급하게 옷가지를 챙겼다.
하지만 곧바로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아직도 자고 있었냐?”
리에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제이미를 바라보았다.
긴 갈색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제이미는 말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속옷은 입었지만, 알몸이나 다를 바 없이 다 드러낸 상태였다.
“사내자식이 계집애같이 생긴 것도 모자라서 머리까지 기냐? 얼른 내려와라, 난 바쁜 몸이시니까.”
리에르는 담담했다.
그의 그런 반응에 제이미는 더욱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리에르는 자기 할 말만 하고서 본인 옷가지를 챙겨 나갔다.
“저 녀석, 설마…….”
제이미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 뽀얀 피부는 다른 귀족 영애들도 질투할 정도였다.
잘록하게 잘 빠진 허리는 무슨 옷을 입어도 맵시가 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봤다. 그러고는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냐……!”
* * *
마음에 안 드는 녀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리에르는 제이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마치 윗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상대를 아래로 보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그뿐만은 아니었다.
리에르는 단 한 번도 가문의 검술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로이스타는 항상 장남인 파에트를 칭찬했다.
상처투성이로, 진흙탕 속에서 홀로 일어나는 리에르의 눈에는 언제나 자신이 아닌 파에트 형만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형, 파에트에게는 자신의 검술을 전수하였지만, 리에르의 재능에 실망했는지 단 한 차례도 검을 알려준 적이 없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불청객을 리에르가 좋아할 리 없었다.
‘나도 못 쓰는 가문의 검술을.’
리에르는 이를 사려 물었다.
질투? 시기?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단어들은 제멋대로 조합되어 적대감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제이미는 일어났니?”
라일라가 벌레 씹은 표정으로 내려오는 리에르에게 물었다.
“저 생기다만 뼈다귀는 대체 뭔가요?”
“리엘, 말투가 그게 뭐니.”
“생기다 마신 제이미라는 분은 대체 뭔가요?”
리에르가 삐뚤게 나오는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라일라는 잘 구워진 버터구이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제이미는 네 아빠의 절친한 지인분의 자제로 친척도 없는 이곳에 온 이상 손님이라기보단 식구나 다름없단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에레사 대하듯이 살갑게 대해주렴.”
리에르는 그 말에 흥, 하는 코웃음을 내비치며 의자에 앉았다.
그때 어제와 같은 남장의 차림새로 제이미가 내려왔다.
그녀는 조금 전의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미 리에르는 버터로 잘 구워진 빵을 잔뜩 욱여넣으며 말했다.
“얼룽 드시져, 우걱. 줴이미 님. 쩝쩝.”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식사법이었다.
말과 파편을 함께 뱉어내는 놀라운 화법을 바라보며 제이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같은 핏줄이라 볼 수 없다니까.’
제이미는 애써 리에르를 회피하며 라일라에게 말을 붙였다.
“와! 이 스프는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 잘 먹겠습니다!”
“성에서 먹던 음식과 비교하면 아줌마가 창피하니까 많이 먹으렴.”
라일라가 자상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이미는 귀한 영애답지 않게 구김살 없는 얼굴로 식사를 시작했다.
누릇한 빵 위의 버터 향을 코로 음미하던 그녀는 빵을 뜯어 보았다.
그 안에서 모락모락한 김이 흘러나왔다.
고소한 수프에 푹 적셔서 입에 넣으면 그만한 아침 식사가 없었다.
제이미와 리에르의 다른 점은 확연하다.
제이미는 맛있게 먹고 웃으면서 말한다. 리에르는 입안에 잔뜩 밀어 넣는 것으로 맛있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맛있는 아침 식사군요. 부인. 아르빈트 군이 건강한 것도 매일 맛있는 아침을 먹어 서겠군요.”
리에르는 잔뜩 밀어 넣었던 빵과 베이컨이 목에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엘빈은 맛있는 아침 식사라는 말을 하면서도 리에르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늑대 앞에 선, 고기 조각.
리에르는 왠지 불편함을 느끼며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아, 저 화상과는 눈도 마주치기 싫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리에르는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시선을 돌린 쪽으로도 마주치기 싫은 낯짝이 보였다.
말랑말랑한 빵을 베이컨에 말아먹는 밉살스러운 녀석이 싱글거리는 걸 보니 짜증은 자동으로 치솟는다.
“야! 식사할 때도 모자를 쓰고 있냐?”
“이 빵 정말 맛있네요.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제이미의 칭찬에 라일라는 입가를 살짝 가리며 호호, 웃었다.
“어이, 불청객. 식사 중엔 모자는 벗고, 떠들지 말고 식사해 주시죠.”
“파에트 님도 아줌마가 만들어주는 빵을 먹고 싶다고 이야기했거든요. 다음에 꼭 제가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호호, 얘도 참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다 하는구나. 원래 아무거나 다 잘 먹는 아이라서 제이미가 만들어 준 것이라면 다 맛있게 잘 먹어 줄 거란다.”
“그래도 직접 만들어 줄 것이라면 아줌마가 만드신 요리를 흉내라도 내고 싶은걸요…….”
“어이, 생기다만 개뼈다귀 씨. 나 오늘 검술 시합 있으니 대충 입에 넣으시고 처 따라오시지.”
리에르의 반복된 말에도 제이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라일라와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식사를 즐겼다.
‘화가 잔뜩 났군.’
엘빈은 수저를 든 제이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야, 찐빵 얼굴…….”
“시끄러워, 이 멍청아!”
“아들, 닥쳐.”
제이미는 치켜 올라간 반달눈을 하고서 화를 냈다.
리에르는 모친의 분위기가 안 좋은 것을 보고 슬슬 눈치를 보았다.
리에르는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동맹을 맺었으니 몸을 사리는 것이 상책이다.
더는 리에르의 방해를 받지 않게 된 두 여성은 정답고 따뜻한 아침 식사를 계속했다.
“내가 대신 대화해 주지.”
“아니, 괜찮습니다.”
“그래, 거기서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어.”
리에르는 엘빈이 쓸데없을 정도로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불쾌감이 꾸물꾸물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