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61)
레필리아 레소드-161화(161/398)
레필리아 레소드 161화
노스텔지어(5)
여자를 안는 것보다, 술에 취하는 것보다, 마약을 하는 것보다 더한 극도의 쾌락.
성안이 점차 소란스러워 지고 경계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일은 그 소음이 기분 좋게 들려졌는지 눈을 감고 양팔을 벌려 황홀함에 빠져들었다.
경계 종소리가 마치 자신을 찬양하는 듯이 들려왔다.
채엥, 챙!
철의 굉음이 울려 퍼지며 망토를 걸친 갑주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대로 된 기사들이 나타나려면 시간이 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십일검 기사단의 갑옷이 경량화되었어도 착용을 위해선 십분 이상은 걸렸다.
“뭐, 아쉬운 대로 놀아볼까.”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 버러지가 하나, 둘씩 튀어나온다. 그 튀어나오는 벌레들을 짓밟으면 더 강한 벌레들이 남는다.
그리고 그 벌레들마저 제거하면 성안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아일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만들어낸 핏빛 대지 위에서 두 눈을 감고서 느끼는 향내.
짜릿했다. 모든 포스는 그 쾌락을 위해 살아가는지도 몰랐다.
아일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기사들을 보면서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이번에는 일반 가디언과는 달리 움직임이 좋아 보였다. 그들은 앞의 가디언처럼 경고를 먼저 내뱉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상황에서 가타부타하는 것도 옳지 않았다.
누가 봐도 아일은 이 일을 벌인 장본인이었고,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아일은 기사들의 포진을 보고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튕겨내며 원을 그려 보였다. 순식간에 아일의 발밑을 중심으로 기류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기류는 검을 부서뜨리고, 또한 튕겨낸다. 아일의 마력으로 형성된 긴 손톱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제일 먼저 달려들은 두 명의 기사를 베어 넘겼다.
“크흑!”
기사들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사방에서 혈화가 피어올랐다.
베어진 목과 가슴팍을 움켜쥐면서 쓰러지는 시체들.
다른 기사들도 압도적인 포스의 힘을 보고는 최대한 거리를 벌리며 물러섰다. 하지만 아일을 둘러싼 건 포진은 풀지 않았다.
“뭐, 시간이라도 끌어볼 셈인가 본데…….”
아일은 킥, 하는 비웃음을 머금어 보이며 갈색 눈을 뒤틀었다. 그는 주변에 포진한 기사들에게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에 무신경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일과 마주한 기사는 검을 겨눈 채 뒷걸음질을 하였고, 주변의 기사들은 거리를 유지한 채로 둥근 포진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도 최강인 이 몸에는 버러지일 뿐이다.”
갈색의 날개가 뒤틀어지며 기류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기사들은 귓속으로 들려오는 소리가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아일 하나에만 모인 시선. 기사들은 감히 다른 곳을 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엄습해 오는 한기는 불길함을 전해주기엔 충분했다.
* * *
왕성의 꽃, 아레스트 영주의 유지를 이어 왕녀가 된 백합의 여인.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갈색 머리카락.
그녀는 더 이상 남장을 하고서 치기 어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제이미 룬 아레스트.
아렌 왕국의 통치자인 그녀는 이제 누구나 보면 돌아볼 만한 미인이 되어 있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을 소유한 것만 같았던 그녀. 하지만 부친의 사후 시련이 시작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무거운 중책을 맡았다.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었을 아르빈트 가문은 실각하였다. 그와 동시에 귀족들의 야권다툼이 시작되었다.
유일한 왕의 혈족인 제이미는 그들의 권력 앞에 좌지우지 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호시탐탐 검은 야욕을 퍼뜨리는 폭룡의 군대가 아렌 왕국을 침범하였다.
잦은 전투로 인하여 국토는 훼손되어서, 흉흉한 분위기만 몰아쳤다.
그때 아렌 왕국에 큰 위기가 몰아닥쳤다. 코스모스의 교리로 하나가 된 교단 연합이 아렌 왕국을 향해 침략을 시작하였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대륙 최강의 기사단인 십일검이 출정을 시작했다.
그들은 각 군단 특유의 조직력을 지니고 있었고, 폭룡의 군대 덕분에 실전을 많이 겪은 베테랑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십일검 기사단도 병력의 차는 뒤집을 수 없었다. 압도적으로 수적 우위에 있는 교단의 정벌 단에 의해 아렌 왕국은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더는 로이스타가 없는 십일검 기사단은 최강의 이름을 소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렌의 절대적인 위기 때문에 간신배들도 로이스타를 막지 못했다.
결국, 제이미의 강경한 의지와 함께 아르빈트 가문은 다시 검을 높이 들었다.
힘없이 유린당하던 아렌의 영토는 로이스타의 복귀만으로도 판세가 달라졌다.
로이스타 아르빈트는 빈틈없는 전술을 펼쳐 보였다. 아울러 아렌의 젊은 혜성 파에트는 거침없는 돌파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른 국지전에 출정 나가 있던 대장들이 속속 복귀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교단 연합과 아렌 왕국의 전쟁은 아렌의 대승으로 끝나게 되었다.
아르빈트 가문의 복귀에 불만을 품는 귀족들은 많았다. 하지만 기사단을 위시한 군의 관계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다.
검을 든 자들에게 있어 로이스타의 이름은 신앙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아르빈트 가문과 아레스트 왕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친분을 지닌 사이였다.
선대왕이 살아생전 아르빈트 가문과 사돈을 맺으려 한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일 정도였다. 하지만 약혼 관계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약혼의 주인공인 리에르 아르빈트가 적혈의 악마로 강림하는 그 순간 비극은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제이미가 철들기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리에르가 아닌, 파에트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자 파에트와 만남을 청한 상태였다.
왕녀가 잠이 드는 침실. 레이스로 장식된 커튼이 있는 침대. 그윽한 향수로 달콤해진 공기는 이성을 유혹하는 분위기로 풍만했다.
제이미는 마침 파에트가 들어오자 기쁜 듯이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검푸른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아렌의 젊은 혜성. 그는 아버지 로이스타를 제외한다면 명실상부한 왕국 제1의 기사였다.
무엇보다 그는 잘생긴 얼굴에 자상함까지 겸비한 완벽한 남자였다. 제이미는 파에트가 들어오자 주변의 모든 것이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힘이 없는 왕녀. 온갖 권모술수가 가득한 이 왕성의 안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 유일하게 가슴을 뛰게 만드는 남자.
“파엘 오라버니.”
“왕녀 전하.”
다시 아렌으로 돌아온 파에트는 이전과는 성격이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그는 친절했지만 음울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제이미는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사랑하는 동생이 떠나고, 결국엔 이름 모를 설원에서 죽었다.
파에트는 그 소식을 듣고 몇 날 며칠을 통곡하였다. 동생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을, 동생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만 생각했다.
“하명하실 말씀이 있으면 아랫것들을 시키시면 될 일을, 야심한 밤에 왕녀의 방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아니 될 일입니다.”
“…….”
제이미는 파에트의 단조로운 말투에 미소를 꺼뜨렸다.
그녀는 파에트의 자상한 미소를 보는 것이 좋았다. 그렇기에 억지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졸라 로이스타에게 아르빈트식 신검술을 배우기까지 하였다.
검을 배우는데 흐트러지고 어려워하면 여지없이 따뜻한 손길이 다가왔다. 핀잔을 주면서도 다정하게 웃던 그의 미소와 눈길은 이제 보기 힘들었다.
“단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이전처럼 불러주시면 안 되나요?”
“광명한 말을 거두어 주십시오. 일개 기사에 불과하옵니다.”
땅에 댄 무릎, 가슴에 댄 정갈한 손. 신하임을 강조하는 숙어진 머리.
일부러 방으로 불러 단둘이 대화를 한다 하여도 파에트의 태도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전 지금 너무나 힘들어요. 폭룡의 군대는 호시탐탐 아렌을 넘보고, 교단의 군대는 힘을 수복하게 되면 언제 공격해 올지 알 수 없어요. 만약 로이 아저씨와 파엘 오빠가 제때에 오지 않았다면 이미 아렌이라는 이름은 대륙의 지도 속에서 지워져 있겠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르빈트 가문은 전하를 따를 것입니다.”
제이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대신이 왕녀인 제 능력을 의심해요. 신하들은 각자의 안위만 걱정하고 있죠. 제가 기댈 곳이 없어요, 전 무력해요. 너무나…….”
“…….”
제이미는 이제 겨우 스무 살 초반의 나이였다. 그런 젊은 여성에게 신생 왕국을 등에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부담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결혼할까요?”
“네?”
제이미의 말에 파에트가 의문을 표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갔다.
“원래 아르빈트 가문과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잖아요.”
“그렇습니다.”
제이미와 리에르의 약혼.
사실상 리에르가 괴물이 되면서 약혼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이 되고 싶지 않나요, 오라버니?”
“불가한 말입니다.”
“도피처를 찾는 쓸모없는 계집이라고 욕하고 싶으신가요?”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와 아버지의 칼은 항상 당신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제이미는 파에트의 대답에 미소를 머금었다.
파에트의 단정한 얼굴을 보니 왠지 그의 동생이 떠올랐다.
리에르 아르빈트.
파에트의 친동생인 그를 몇 년 전에 만났었다.
처음에는 약혼에 대한 반발 때문에 직접 만나러 갔었다.
세상에서 제일 덜 떨어진 아르빈트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아이. 제이미는 그런 남자와 자신을 엮으려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본 그는 달랐다.
아직 부족했지만 성장하고 있었고, 아직 때가 탔지만 닦으면 누구보다 빛날 수 있는 광채를 품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파엘 오라버니만큼 준수한 얼굴이 되었을지도.’
제이미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그 아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제이미가 입 밖으로 생각을 내뱉었다. 말하고 나서 흠칫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파에트가 고개를 들어 제이미를 올려다보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보니 제이미는 왠지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죄인의 몸이니 불가한 이야기입니다.”
제이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파에트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의 냉정한 말에 제이미는 입술을 닫았다.
말은 냉정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제이미는 파에트가 누구보다 동생의 비극에 가슴 아파했던 것을 기억했다.
“죄인에서 영웅이 된 사람은 많아요.”
“그것은 전쟁의 이야기입니다.”
리에르가 지은 죄는 걷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무의식 상태였어도 이미 비극은 벌어졌다.
“사면이라는 것도 있어요.”
제이미는 현재 아렌 왕국의 왕이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죄인의 죄를 씻겨주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그에 따르는 업적이 있어야겠지만.
그녀의 말에 파에트는 작게 웃어 보였다. 실로 오랜만에 보여주는 미소였다.
“귀족들에게 물어뜯길 겁니다.”
“가만히 물만 마시고 있어도 물어뜯기는 걸요.”
제이미의 말에 파에트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실소했다.
“전 뭔가 이상해요.”
제이미가 다시 입술을 뗐다.
“전 오라버니의 동생을 잘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제가 봤던 그 아이는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녀가 봤던 리에르의 마지막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있었다. 그녀조차도 구해졌기 때문에 잘 안다.
“고마워할 겁니다.”
“네?”
“리엘 그 녀석이 알면요.”
파에트의 말에 제이미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자신의 곁에서 어떤 식으로든 힘이 되어줄 수 있었을 남자였다.
그것이 약혼자로서든, 기사로서든.
“나중에 만나면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제이미는 마지막 그와 헤어질 때를 떠올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를 혼자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엘빈과 함께 무사히 도망쳤지만, 그는 폭풍 속에서 괴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리에르 아르빈트는 원래 악마의 피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보고서와 현상수배에 관련된 내용뿐이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으로서 못 해준 일이 많거든요.”
파에트의 우수에 젖은 눈동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제이미는 그 눈빛을 보면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성내 경비를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서서 나가는 파에트의 뒷모습을 보며 제이미는 작게 웃었다.
한때는 그녀의 모든 일상이었던 남자였다.
물론 지금 봐도 파에트는 최고의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리에르가 신경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