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62)
레필리아 레소드-162화(162/398)
레필리아 레소드 162화
노스텔지어(6)
지금 아렌은 강력한 기반이 필요했다.
중요한 시기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제이미가 여왕이 되었다.
하지만 신하들의 시선은 달갑지 않았다.
각지에 군웅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여성 군주를 모시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벌써 왕좌를 노린 반란도 몇 차례 벌어졌다.
물론 그때마다 아르빈트 가문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차라리 남자였다면…….’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제이미가 중얼거렸다. 여성으로서의 한계가 명확한 것이 답답했다.
‘아르빈트 가문과 이어진다면…….’
두 가문이 합쳐진다면 감히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막강한 세력이 구축된다.
하나, 파에트는 동생의 약혼자와 결혼할 리도 없다. 그렇다고 지금 죄인의 몸인 리에르가 나타날 리도 없다.
‘그래 봤자 말뿐인 약혼이니까.’
제이미는 그렇게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혼자 남으니 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테라스 밖으로 걸어갔다.
밤은 정갈한 어둠으로 내리깔려 있었다. 바라보면 오히려 상쾌함이 들것 같은 밝은 별빛이 수놓인 밤하늘.
왠지 마음마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콰앙!
그때 갑자기 한밤중에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성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전하!”
파에트가 다시 제이미를 찾아왔다. 그녀는 반가움에 앞서, 방금 있었던 불길한 소리가 의아했다.
“지금 왕성 내에 침입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제이미는 파에트의 보고를 듣고 눈을 깜박거렸다. 갑자기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말에 황당하기만 했다.
“적은요?”
“적혈의 악마라고 합니다.”
파에트의 말을 들은 제이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적혈의 악마.
소문만 무성한 괴물. 뒷세계 최강자를 의미하는 칭호였다.
“설마 리에르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제이미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파에트에게 있어 가장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 아픈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기에 제이미는 파에트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아닐 겁니다.”
파에트는 상대의 외모에 대해서 보고 받은 상태였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그가 아는 동생의 외모가 아니었다.
파에트는 말하면서 과거 리에르를 떠올렸다.
포스로 폭주하여 혈화를 꽃피우는 동생.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힘으로 인해 이성을 잃고 날뛰는 괴물이었다.
덕분에 파에트는 하나뿐인 친동생과 형제 같던 단원들을 전멸시켜야만 했다.
파에트는 그때 이후로 그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기 위한 증거로 십일검 기사단에서 칠검 부대는 영구 결번인 상태로 있었다.
즉, 칠검대는 파에트 혼자뿐인 기사단이었다.
파에트는 이미 두 명의 포스를 만나서 전투를 하고도 살아 있는 유일무이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포스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건지 알고 있었다.
파에트가 느끼는 작금의 사태는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자신조차 막아낼 수 없었던 괴물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살육할 것이다.
‘다시는 같은 일을 겪지 않는다.’
파에트는 그때보다 실력이 많이 오른 상태였다.
몇 년간 지지 않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적혈의 악마를 막을 수 있다는 증거는 되지 않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
적혈의 악마는 항상 요인(要人) 암살을 우선으로 한다. 이 성에서 최고의 요인은 누가 뭐라 해도 단 한 명뿐이다.
‘놈들이 노리는 것은 제이미.’
파에트는 갈색 머리칼의 여 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불안한 눈동자로 파에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잘 따르던 여자아이.
어쩌면 동생의 결혼 상대가 될 수도 있었던 여성.
‘이 사람을 지켜야 한다.’
제이미가 죽으면 아렌 왕국은 끝이다.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이 시작될 것이다.
“적혈의 악마가 오고자 한다면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성에서 잠시 피신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피신요……?”
파에트의 말을 들은 제이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왕이라는 자가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은 수치다. 하지만 그 상대가 혼자서 일개 군단을 상대로 학살을 벌이는 괴물이라면 별개의 문제다.
“제가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다른 사람들은요?”
제이미는 파에트의 말에 거부하듯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성내에 있는 시녀들, 그리고 주둔하고 있는 기사들까지.
성 내부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움직이고, 먹고, 자고 있었다.
제이미는 모두의 얼굴을 기억하진 못했다. 하지만 자신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대다수 희생당할 것을 떠올렸다.
“그들도 영광으로 생각할 겁니다.”
“…….”
제이미는 파에트의 냉정한 말에 안색이 파리해졌다.
응당 전쟁이 벌어지면 왕녀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기사들의 희생은 불가피했다. 그녀는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피 값으로 도주할 만큼 냉정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군주로서는 자격 미달인 인성이었다.
“파엘 오라버니는 그런 것이 괜찮은가요?”
제이미는 어릴 적부터 파에트를 봐왔다. 그녀는 누구보다 파에트의 자상함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가 펜보다 검을 쥔다는 사실이 의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다른 기사들과 대련을 하는 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그의 검은 정확하고 날렵했다. 불필요한 움직임을 배제하고 군더더기 없는 흐름을 보이는 검술은 눈을 호강시켰다.
다른 귀족들처럼 자랑하기 위한 검술이 아니었다. 무희들이 흥을 돋우기 위해 추는 검무와도 달랐다.
파에트의 신검에 매료된 소녀는 그의 검술에 설렜다. 또한, 그의 자상함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잘생긴 그의 얼굴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예전의 그가 아닌, 실리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썩은 귀족처럼 보여 제이미는 불쾌해졌다.
“왕녀 전하, 지금은 피하셔야 합니다.”
“파에트 아르빈트, 전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내 기사들이 전부 죽고 나 혼자 피하란 건가요? 이 왕성에 있는 대륙 최고의 기사단이 쓰러지면, 이 수도의 시민들은 누가 지킬 건가요? 지금 왕성에 침입해 있는 적들이 적혈의 악마라면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은 뻔한 것 아닌가요!”
파에트는 강경한 제이미의 발언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찌 보면 그녀의 말은 철없는 말에 불과했다. 제이미는 여린 어깨 위로 국가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무게와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찾았다. 그리고 일단 확신이 든 것에 대해선 강한 결단력을 보였다.
그녀의 우직하리만큼 강한 결단력은 마치 선대왕의 성품과 닮아 있었다.
파에트는 그런 모습을 보니 철없음보다 묘한 그리움마저 느껴졌다.
매혹적인 금빛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소녀. 그녀는 황금빛 눈동자를 들어 파에트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이제는 사방에서 노골적으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덕분에 파에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의 기사들을, 헛되이 죽게 해선 안 돼요……. 지켜주셔야 해요. 칠검 기사단의 일을 잊으신 건가요?”
제이미의 흐려지는 눈동자를 보고, 파에트는 이를 사리물었다. 잊을 수 없는 참극이었다.
칠검 기사대. 소중한 동료들은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죽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파에트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내놓았다.
파에트는 동료를 죽인 존재를 미워할 수만 있었다면 증오하고, 복수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존재는 미워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친동생인 리에르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마녀의 사술에 농락당했을 뿐이었다.
“곧 로이스타 원수님이 오실 거예요.”
제이미는 굳건하게 입을 열었다. 아르빈트 가문은 거처를 수도로 옮긴 상태였다. 그렇기에 왕성에 닥친 위험을 알게 된다면 로이스타 금방 올 수 있었다.
또다시 들려오는 비명. 제이미의 가녀린 어깨가 움찔거린다.
비록 제이미가 당당하게 말은 했어도 침입자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아니,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짓누르고 베어냈다. 당연히 공포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파에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점점 가깝게 들려오는 비명은 이제 성에서 도망치기조차 쉽지 않게 느껴졌다.
“절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누구의 희생도 원치 않는 파엘 오라버니의 자상함을 전 알고 있어요.”
제이미는 떨리는 손을 뒤로 한 채, 애써 웃음을 지며 말했다. 그녀는 분명히 두려웠다.
파에트는 감았던 두 눈을 열어 제이미를 바라본다. 그리곤 조용히 가슴에 손을 올리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보통 때 같으면 왕녀 앞에서 검을 뽑는 행위조차도 반역이다.
하지만 지금은 보통의 때가 아니다.
“조심하세요.”
제이미는 파에트의 뒷모습을 보면서 진심을 담아 기도했다. 파에트는 제이미의 말에 대답 대신 바깥의 기사들을 불렀다.
“비어트 경, 가웬 경.”
“말씀하십시오.”
“왕녀 전하 근처로 그 누구도 접근치 못하게 하라.”
파에트의 명령에 두 근위 기사는 가슴에 손을 대며 맹세했다.
달콤한 향수로 만들어진 초가 피워진 밤의 왕성. 하지만 지금은 달콤함 대신 피비린내를 풍겨내고 있었다.
철과 철이 맞부딪히는 소리 속에 들려오는 비명은 끝없이 연주되는 장송곡과도 같았다.
편안함을 만끽해야 할 왕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챙, 채엥!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전쟁터. 점점 파에트의 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편안함을 만끽해야 할 왕성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챙, 채엥!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전쟁터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파에트의 걸음도 빨라지고 있었다.
‘칠검대, 출정 준비를 한다.’
단 한 명뿐인 칠검대.
파에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전장으로 향했다.
이미 죽어 없어진 부하들의 잔영이 그의 뒤에 일렁이는 듯했다.
파에트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눈가를 열었다. 이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칠검의 동료들은 사라진 상태였다.
십일검 기사단 중 왕궁 수비를 담당하는 것은 일검대와 이검대였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마, 말도 안 되는……!”
쓰러진 기사는 핏물로 가려진 시야 속에서 참담한 상황을 보았다.
왕성 파티가 열릴 때면, 항상 호화로운 교향곡이 울리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시체만이 즐비했다.
갈색 머리카락의 괴한은 보기에도 끔찍한 빛의 날개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크크크, 크하하하하하!”
아일은 양손을 펼치며 광소를 터뜨려 보였다. 핏빛의 비가 내리는 풍경은 언제나 황홀경에 빠져들게 했다.
일검, 이검 기사들은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어 전투 불능 상태였다.
벽을 짚고 일어나는 자, 바닥을 기는 자, 기사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검을 다시 쥐는 자.
일검과 이검의 대장들은 목숨을 걸고서 다시 한번 침입자와 싸우기 위해 돌격했다.
“하하하하하, 뭐가 최고의 기사단이냐? 뭐가 최강의 아르빈트냐?”
청색의 기류가 두 대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일검 대장 피터는 찌르고 들었던 검을 급히 회수하며 왼손에 쥔 카이트 실드로 기류를 막아냈다.
하지만 그는 힘이 부쳤는지 뒤로 쭉 밀려나 벽에 부딪혔다. 피터는 쿨럭거리는 기침과 함께 핏물을 토해냈다.
이검대장 라비에타는 기류를 얻어맞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창을 찌르고 들어갔다. 그의 어깨에선 피보라가 튀고 있었다.
라비에타가 온 힘을 다해 뻗어낸 창은 아일의 손에 가볍게 붙들렸다.
“아니, 내가 너무 센 건가?”
아일은 음산한 웃음을 피워내면서 라비에타의 창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이놈! 아렌 왕국의 기사단을 우습게 보지 말라!”
라비에타는 들고 있던 창을 놓았다. 그러고는 도리어 아일의 품속에 뛰어들며 숨겨뒀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동귀어진. 말 그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상대에게 치명상을 주기 위한 육탄 공격이었다.
하지만 아일은 놀라는 표정 없이 비아냥거림을 내뱉었다. 그리고 라비에타의 단검을 몸으로 맞아들였다.
푹!
핏물이 튀어 오르며 라비에타의 단검이 아일의 복부를 찌르고 들어갔다.
하지만 아일은 전혀 고통스러운 기색 없이 히히, 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혀를 날름거렸다.
“다 끝난 거지? 응?”
“이 빌어먹을 괴물 놈……!”
라비에타는 검에 찔려도 멀쩡한 아일을 보면서 뒤로 회피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아일의 갈색 날개가 라비에타를 향해 촉수처럼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