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65)
레필리아 레소드-165화(165/398)
레필리아 레소드 165화
아렌 왕성 급습(3)
에레사는 최대한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 했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원망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속으로 실수했노라 생각했다. 리에르의 안색은 대번 슬퍼지고, 어두워졌다.
에레사는 그가 자신을 위해 위로의 말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위로의 말을 해도 비극의 당사자가 해주는 위로가 힘이 실릴 리 없었다.
그런 것도 모르는 리에르는 스스로를 자책하고만 있었다.
만약 그 비극의 순간에 힘을 컨트롤 할 수 있었다면. 이런 부제 아래 시작되는 리에르의 생각들은 한도 끝도 없었다.
에레사의 부모님을 구할 수도 있었다. 자신의 손이 피로 얼룩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적혈의 악마란 호칭 대신, 페이서스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있었다, 있었다로 시작되는 가정의 말은 끝맺음이 나오지 않았다.
리에르는 이미 때늦은 후회며,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감도는 번뇌는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리에르는 설득력 없는 말 대신, 그녀의 작은 손을 꼭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난 꼭 옆에 있을 테니까…….”
리에르의 말에 에레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꿈틀거리던 그녀는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에레사는 심장이 바늘로 찔리는 듯이 아파져 왔다. 하지만 그 심정을 드러내는 대신 웃어 보였다.
“그럼 얼른 미래의 시어머님 뵈러 가볼까나.”
“뭐?”
리에르는 엉뚱한 에레사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반색했다. 에레사는 그런 리에르의 얼굴을 보며 입을 삐죽거려 보였다.
“어머, 옆에 있어 준단 말이 그런 뜻 아니었니?”
“나, 난…….”
리에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흐응, 그냥 무책임한 말만 내놓는 남자로 자랐구나……. 예전엔 우리 리엘이가 순수하고 참 좋았는데……. 저번에 보니 뽀뽀하는 것도 뭔가가 막 왔다 갔다 하질 않나…….”
리에르는 귀 끝까지 붉어진 채로 아아, 탄식을 해보였다.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을 보며 에레사는 실소를 터뜨렸다.
리에르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런 그의 귀여운 반응도. 항상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그의 시선도. 무엇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은 오로지 에레사 자신뿐.
에레사는 엘에게 포스에 대해서 들었다.
어떤 경위로 적혈의 악마가 참극을 일으켰는지도 알고 있었다.
결코, 리에르 본인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참극.
오히려 리에르는 그 참극에 발목이 잡혀 항상 고통 받고 있었다. 에레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을 푸는 일이 힘들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올리면 누군가 증오할 존재가 필요했다. 책임을 전가해야만 그나마 슬픔이 증오로 바뀌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웃어 보이는 리에르를 보면 가슴이 미어졌다.
에레사는 리에르가 미웠다.
에레사는 왠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코끝까지 후드를 눌러썼다. 그리곤 억지로 명랑하게 입을 열어 보였다.
“아줌마에게 다 일러줄 테니까.”
“윽…….”
리에르는 에레사 때문에 당황했다.
어느새 머릿속을 감돌든 두려움은 사라졌다. 에레사의 장난스러운 말과 사랑스러운 미소 덕분에.
두 사람은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아르빈트 가문으로 향했다.
겉으로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 한 존재만은 말없이 경계심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아르카는 누군가에게 기생하는 행태로 살아 나을 수 있었다. 만약 힘들게 찾은 마스터가 죽게 된다면 자신의 생존권 역시 포기해야만 했다.
* * *
리에르는 예전에 딱 한 번 아버지의 집무실에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집무실이 있는 저택은 리에르를 제외한 모든 아르빈트 일가가 살고 있었다.
리에르는 어릴 적 기억만을 더듬어서 저택을 찾아가는 것이 힘들었다.
아니, 험난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간 저택의 모습은 그에게 매우 낯설었다.
왕국 최고의 기사, 아레스트 영주와 왕녀에게 가장 신뢰받는 가문의 저택치고는 허름해 보였다.
잘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집을 눈앞에 보면서 리에르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듯이 리에르는 이곳에 온 적이 단 한 번뿐이었다.
돈 많은 거상의 집처럼 크진 않았다. 귀족들의 성처럼 높은 벽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에 모친 라일라와 둘이 살던 집과 비교하자면 너무나 크고 웅장한 저택이었다.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거 아니야, 설마?”
에레사는 빙긋 웃으면서 리에르를 놀렸다. 최대한 긴장을 풀어주려는 그녀의 노력도 이번에는 효과가 없었다.
리에르는 섣불리 집 안에 들어서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가자, 리엘.”
에레사는 저택의 문을 등지고서 손을 뻗었다.
리에르는 에레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아르빈트 저택을 바라보았다.
리에르는 망설임의 끝에 겨우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뒤쪽에서 요란한 투레질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그닥, 다그닥.
밤의 커튼이 드리워진 저택을 향해 네, 다섯 기의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리에르는 깜짝 놀라서 저택 벽면 쪽으로 숨어버렸다.
지금 리에르가 있는 곳은 페이서스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페이서스의 생존자가 리에르의 얼굴을 알아볼 리도 만무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아렌의 사람과 접촉하는 것이 불편했고,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에레사도 리에르를 따라 몸을 숨겼다.
다행히도 말을 탄 사람들은 리에르와 에레사에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급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리에르는 왠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급보였고, 위기가 찾아왔음을 의미했다.
분명 저택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리라 생각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 저택은 대륙 최강의 기사들이 거주하는 저택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은 리에르가 잘 아는 인물이었다.
‘엘빈 트위아.’
늑대처럼 거칠고 뱀처럼 음침한 사나이.
그는 제이미를 지키는 근위 기사였으며, 십일검 기사단의 여덟 번째 단장이었다.
리에르는 지금 엘빈을 보면서 반가워해야 할지, 경계해야 할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전투 중에 온 것 같은데.’
리에르는 엘빈의 갑옷에 핏자국이 묻은 것을 봤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리에르의 옆에 숨어 있던 에레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보였다. 리에르는 굳어진 얼굴로 기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굳이 경험 많은 리에르가 아니어도 분위기가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리에르와 에레사는 엘빈의 얼굴을 본 덕분에 저택 안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잠시 두 사람은 저택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갑주의 소음이 어지럽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들어간 인원보다 나오는 인원이 배는 많았다. 개중에는 두 사람에게 낯익은 사람들도 보였다.
커다란 곰과 같이 우람하고 빛이 나는 안광.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중년인이 선두에 나서고 있었다.
로이스타 아르빈트. 살아 있는 대륙의 전설.
리에르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겨우 쉴 수 있을 때는 이미 아버지를 포함한 기사들이 저만치 멀리 사라지고 난 뒤였다.
“아르빈트…… 아저씨네.”
두 사람 중 에레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레사가 알아볼 정도이니 리에르가 몰라볼 리 없었다.
비록 숨어서 보았지만, 아버지를 본 리에르의 가슴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죄인의 몸이 되어 가족을 만날 수 없다는 두려움. 그리고 본능적으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감정은 조절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리에르는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생각했다. 그래서 형과는 달리 자신은 신검을 사사받지 못했다 생각했다.
그렇다 해도 리에르는 원망보다는 뜨거운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심정을 느끼는지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의 팔에 손을 대면서 나지막하게 입술을 열어 보였다.
“리엘…….”
“응……!”
망설이던 리에르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저택 앞에 섰다. 그러고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리에르 혼자였다면 저택 안에 들어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옆에서 맞잡은 손의 온기는 따뜻했다. 무엇보다 다정한 에레사의 말은 용기가 되어 그를 일어서게 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리에르와 에레사를 보고 저택 안에 있는 시종들이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중에 저택의 집사장이 두 사람을 점잖게 막아 세웠다.
“아르빈트 가에 오신 것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손님이 찾아오기엔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약속도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리에르는 집사장을 처음 본다. 아니, 애초에 가문의 저택이란 곳이 너무나 어색했다. 널따란 정원, 그리고 수많은 시종.
어딘가의 궁궐과도 같은 곳이 펼쳐져 있었다.
저택은 이제 막 가주가 나갔기에 다수의 시종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레 약속 없이 찾아온 두 인영을 수상스럽게 생각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리에르도 용기 내어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이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자신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말을 해도 이해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적혈의 악마가 되어버린 아르빈트 가문의 차남에 대한 설명을 무엇으로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냥 다음 날에 찾아올 걸 그랬나.’
리에르는 다음 날에나 찾아와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였다. 하지만 리에르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에레사의 손길 때문에 물러설 수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리에르가 도망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두 분 어떻게 찾아오신 겁니까?”
집사는 대답 없는 이들을 향해 형식적인 말투에 무미건조함을 담아 보였다. 대답 없는 두 사람 때문에 저택의 사람들은 더욱더 경계심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에레사는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리에르는 도망치지는 않고 있지만 그대로 굳어져 버린 상태였다. 별수 없이 에레사는 후드를 걷고서 입을 열었다.
“라일라 아주머니를 뵈러 왔어요.”
비록 허름한 차림새를 했지만 아름다운 얼굴과 자태를 가진 여성. 언뜻 보면 귀족 가문의 영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집사는 에레사의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뭐라 해도 아르빈트 가문은 아렌 왕국 최고의 명가였다. 그런 가문의 안주인을 대뜸 만나겠다는 것은 미친 사람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올린 집사장은 당혹감을 밀어내고서 애써 공손하게 대답했다.
“제가 모르는 약속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레사는 집사장의 말을 듣고 생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아줌마는 허락하실 거예요.”
에레사의 말을 듣고 뒤쪽에 있는 시종들이 입가를 가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에레사의 당돌함 때문에 재미있어 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앞에 있는 집사장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이 고소해했다.
“그렇다면 다음에 찾아오는 것이 좋겠군요.”
집사장은 역시 프로였다.
그는 두 불청객에게 여전히 예의를 잃지 않은 채로 당장 저택을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가는 길을 잃지 않도록 시종을 통해 문까지 열어주었다.
에레사는 빙긋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리에르가 쓰고 있는 후드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막막함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에르는 갑자기 에레사의 손이 후드를 쥐고 있자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레사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리에르가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겨 보였다. 그러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던 집사의 얼굴이 처음으로 움찔했다.
“왠지 낯이 익은 얼굴 아닌가요?”
에레사의 음성에 집사와 시종들은 경악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리에르의 얼굴은 로이스타나 파에트와 비슷한 이목구비로 보였다. 그들은 머릿속에 당장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