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67)
레필리아 레소드-167화(167/398)
레필리아 레소드 167화
아렌 왕성 급습(5)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지.”
엘빈은 리에르의 동의 없이 먼저 앞장서기 시작했다. 리에르도 그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뒤쪽에서 낯익은 외침이 들려왔다.
그의 시야 안으로 서둘러 나오는 중년의 여성이 보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리에르는 눈가가 핑 도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잠옷 차림새로 나온 중년 여성은 창피함도 잊은 채로 뛰쳐나왔다. 항상 예의를 중요시하고, 체면을 중요시하던 여성.
그녀는 아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행실과 가장 반대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리에르는 그녀에게 목례를 해보였다. 지금은 그녀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은 왕성이 위험하다는 핑계로 깊은 인사를 사양했다.
중년의 여성은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흐느꼈다. 모친 라일라의 모습을 보고 리에르는 가슴 속에서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슬픔이 일었다.
하지만 억지로 입술을 깨물었다.
불행한 사고로 인해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아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몇 날 며칠을 시름시름 앓게 했던 아들.
이미 장성한 그를 보고 라일라는 복받치는 감격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녀에게 있어 리에르의 존재가 범죄자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말의 갈기가 리에르의 손가락 끝을 간질였다. 차가운 공기는 리에르의 콧날을 핥고 귀를 먹먹하게 하였다.
그 덕분에 리에르는 라일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들린다 하여도 지금의 그로선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리에르는 복잡한 심경으로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그런 그의 뒤편에서 에레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 달라진 게 전혀 없어 보이셔.”
리에르는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했었다. 죽는 길 이외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이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이 이용당했단 것을 생각했을 때 그 분노와 증오,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었다.
결국, 그는 교단으로 쳐들어가 복수와 동시에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설원에서 죽음을 눈앞까지 목격하고서도 싸웠고, 버텼다.
유트가 구하러 왔고, 유이가 기다려줬다.
뒤에서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에레사의 손길, 그리고 등 뒤로 느껴지는 에레사의 품 안은 유일하게 안식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혼돈의 시대에, 적혈의 악마로서 배척당하기만 할 것 같던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주는 사람들과 가족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무엇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용기가 생겨나서 리에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리에르는 얼른 가족을 구하고,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 생각했다.
만약 아버지나 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무거운 마음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각오를 다지고 있는 리에르의 허리를 꼭 껴안은 에레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기쁘구나? 가족을 만나서 정. 말. 좋겠다.’
에레사는 싸늘한 눈가를 열어 보였다.
창백한 얼굴을 드러내며 은은한 빛을 내리쬐는 을씨년스러운 달.
그 아래로 엘빈과 리에르, 그리고 에레사가 왕성을 향하고 있었다.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차가운 건물의 숲 사이로 보이는 높은 왕성의 꼭대기는 별빛을 끄집어내며 불안감을 조성한다.
아치형으로 이루어진 왕성이 보이고, 하얀색으로 통일감을 이루던 성벽은 달의 어둠 때문인지, 아니면 사악한 기운에 둘러싸였기 때문인지 끝을 알 수 없는 칠흑으로 보였다.
잠들지 않은 도시 사람들은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수군거리며 창가를 여는 모습들이 보이고,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나와 기사들이 모여 있는 모습들을 구경하는 이도 있었다.
왕성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근위병들의 통제로 인해 뒤쪽으로 밀려나야만 했고, 왕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기사들은 난감한 상황 속에 기다리는 것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점은 인정하지 않았다.
엘빈이 워, 하는 소리를 내면서 말고삐를 잡아당긴다.
광기 어린 달빛 속에서 투레질하는 백마마저도 묘한 공포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왕성 앞까지 도달한 리에르는 그 누구에게도 얼굴을 비추지 않기 위해서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다.
그에 반해 에레사는 후드를 등 뒤로 제쳐놓은 상태에서 탐스러운 금발을 드러내고 있었다.
리에르의 눈 안으로 들어오는 왕성을 둘러싼 검은 액체. 그것을 보면서 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것은 달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투명했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아르빈트 원수님은 어디 계신가?”
엘빈은 말 위에 내리며 다가온 종자들에게 고삐를 넘겼다.
먼저 출발했던 로이스타가 보이지 않자 엘빈은 고개를 갸웃하였다.
아무리 주변에 사람들이 많다곤 하나 남보다 덩치가 배는 큰 로이스타를 못 찾을 리 없었다.
가장 먼저 대답한 것은 엘빈의 기사단에 소속된 하급 기사였다.
“아르빈트 원수님은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뭐?”
엘빈은 로이스타가 들어갔단 소릴 듣고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들어가셨는가?”
“그게…….”
부하 기사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는지 말을 머뭇거렸다.
엘빈은 답답함이 들어서 저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앞에 선 기사가 난색을 보이자 다른 하위 기사가 대신하여 입을 열어 보였다.
“왕성을 둘러싸고 있는 이상한 물질은 불을 질러도, 창과 칼로 베어도 순식간에 재생되어서 진입로를 막았습니다. 그런데 원수님께서 오셔서 발락시아로 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희도 급하게 뒤따르려 했으나 문이 닫혀버려서…….”
“젠장.”
로이스타 아르빈트는 아렌 왕국의 기둥이었다.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앞으로의 아렌 왕국은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이 없었다.
안에서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르는 데 혼자 들어갔다면 위험했다.
“잠시 보고 올게.”
리에르는 에레사를 말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손과 허리를 잡아주었다.
“알았어.”
이번만은 에레사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르는 후드를 쓴 상태로 왕성의 주변을 산책이라도 하듯이 가볍게 둘러보았다.
근위병들이 수상쩍은 리에르를 제지하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 그때 엘빈이 손을 저어 보였다.
뚜벅, 뚜벅.
리에르는 왕성의 주변을 걸었다. 구역질나는 광기의 냄새가 짙어지는 것을 느낀다.
적혈의 악마라는 말을 듣고 예상은 했었다.
이 정도 힘을 아무런 마법진 없이 토해낼 수 있는 인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또한, 음습하고 흉물스러운 결계 행위를 구축하는 것은 엑토플라즘(Ectoplasm)처럼 끈적이는 녹색의 토사물이었다.
끊임없이 왕성의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것을 보더니 리에르는 지그시 눈을 감아 내렸다.
눈을 감자 주변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져서 귓가를 괴롭힌다.
눈을 떴을 때 사방에 있는 사람들은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엉켜진 그림자로 보이고, 눈앞의 결계 액은 여전히 흉물스러운 녹색을 품고 있었다.
“아르카, 결계 벨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Master에게 전달할 사항이 있습니다.
평소처럼 이상한 소리도 안 하고 온종일 얌전히 있던 아르카가 다소 진중한 말투로 응답했다.
“뭔데?”
-에레사라고 불리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르카는 생존을 위해서는 마력을 가진 소유자가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기생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리에르에게 힘을 빌려주고, 자신은 살아간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는 관념을 떠나, 그것은 본능과도 같은 생각이었다.
“에레사?”
-그렇습니다. 에레사라 불리는 것에 대한 보고인 겁니다.
즉, 리에르의 안전은 자신의 안전이기도 했다.
아르카는 에레사의 모습을 보고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녀의 심리상태는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자상함과 광기가 어우러진 불안함은 리에르의 생존에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지금 같이 마법 유저가 적어진 세계에선 새로운 주인을 찾는단 것은 힘든 일이다.
리에르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아르카를 바라보았다.
“하지 마.”
-의미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아르카는 리에르의 말을 해석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리에르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듣고 싶지 않은 말도 있다는 의미다.”
눈앞의 결계를 부수는 일, 형과 아버지에 대한 걱정, 안의 사람들을 구하는 방법, 가족들을 다시 만나는 일, 유트와 리즈의 부탁인 동맹 건.
생각해야 될 일이 많았다.
될 수 있다면 우울한 일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너로 인해 고통 받은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잖아…… 그럼 나쁜 사람이잖아, 그치……?’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부드러운 눈동자로, 사랑스러운 입술로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넌 천벌 받아야 해, 리엘.’
유트, 유이와 여행을 가기 전까지 혼자 살아왔다. 주변 사람이 친절은 베푸는 것은 목숨을 노릴 때뿐이다.
항상 리에르에게 다가오는 친절은 악의를 감춘 가식이었다.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꼭 잡아주는 온기가 진실이기를 원했다.
폭주했을 때 제대로 된 기억도 나질 않았기에 변명조차,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이번 싸움이 끝나면…….’
리에르는 이번 전투만 끝나면 많은 것을 하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몰랐던 또 다른 죄업들. 그냥 목숨 하나를 던진다면 그대로 모든 것은 끝난다.
리즈의 말처럼 도망치는 것도 좋은 선택 중 하나였다. 하지만 리에르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에레사의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상대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냉대를 받아왔던 세월은 그에게 뛰어난 감각을 선사했다.
하지만 에레사는 쓸쓸하고 슬픈 눈동자로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는 리에르였다.
리에르가 복수를 끝낸 뒤에도 에레사는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전쟁터를 누비고, 시궁창을 뒹굴었던 리에르는 직감할 수 있었다.
에레사 그녀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피하고 도망치는 것은 더 이상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리에르는 손에 감아쥔 아르카를 어깨까지 추켜올렸다.
새벽의 밤과 같은 색을 띠고 있는 아르카를 보고 기사들이 수군거렸다.
날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의 색에 물든 검은 예사로운 물건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든 이의 눈길은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리에르가 아무리 자신은 음모에 빠졌다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소리쳐도 세상은 믿어줄 리 없었다.
죽음으로 모든 죄를 회피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조금이라도 살아 있고 싶었다.
비록 시한부라 하여도.
천천히 리에르의 눈동자는 푸른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꿈틀거리는 엑토플라즘은 여전히 부피를 키워내고 있었다.
-System 파괴 Mode로 변경.
리에르는 손에 쥔 아르카를 들어 앞을 가로막은 결계를 내리쳤다.
치지직, 거리는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주변의 기사들은 갑작스러운 구경거리에 시선을 모았다.
엘빈도 어느새 리에르의 곁으로 다가온다.
구역질을 유발하는 녹색 액체가 거품을 일으키며 연기를 피워 올린다.
아르카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베어진 각막이 점액질을 토해내며 빈자리를 수복하였다.
-Master 조금만 더 입니다.
두두둑!
아르카가 거센 반항에 밀려나기 시작한다. 리에르는 양 손목이 마비되는 것처럼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리에르는 이제 포스가 없다. 아일과 싸우게 된다면 상대가 되지 않을 거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와 형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하아압!”
기합을 내지르면서 리에르는 있는 힘껏 점액질을 걷어냈다. 지금껏 침범을 허용치 않으며 순식간에 수복되던 결계가 멈칫했다.
리에르는 다시 한번 아르카를 비켜 잡으며 검을 찔러 넣었다.
-충분히 진입 가능합니다. 결계 System에 대한 바이러스 침투 개시합니다.
웅웅, 하는 소리와 함께 아르카를 중심으로 검은 자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녹색의 거품을 뿜어내던 결계는 서서히 검은 자장에 흡수되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기사들과 사람들은 어어, 하는 경악성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리에르의 눈 안으로 검은색으로 퇴색된 결계가 유리 파편처럼 깨져나가며 달빛을 반사했다.
왕성을 감싸고 있던 어비스의 결계가 무너지자 안에서부터 짙은 피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형.’
리에르는 결계 안으로 혼자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