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69)
레필리아 레소드-169화(169/398)
레필리아 레소드 169화
엘의 음모(2)
엘빈과 리에르, 그리고 정예 기사단은 왕성 안으로 들어섰다.
성의 내부에서 보이는 별빛의 테라스는 더 이상 화려하지 않았다.
달콤한 향기가 사라진 성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도 기사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비참하게 죽은 시체들이었다.
“탐색할게, 기다려 봐.”
리에르의 말에 엘빈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엘빈의 정예기사들은 리에르를 보고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엘빈 트위아는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남자였다.
그래서 고고한 늑대라는 칭호까지 주어졌던 남자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젊은 남자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여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리에르는 두 눈을 감았다. 기사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애써 리에르는 그들에 대해 신경을 끊었다. 지금의 그는 에레사 때문에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 있었다.
리에르는 예전에 포스라는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변의 누군가를 얼마든지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달랐다.
아일 하사드.
네 번째 포스 사용자와 싸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또한, 정예기사들도 리에르에 대해 불신하고 있었다. 여자를 끼고 다니며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그를 신뢰할 리 없었다.
리에르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푸르게 빛나는 안구를 열어 보였다.
마나의 시선, 마나의 공간속으로 들어온 리에르는 일반인은 보지 못하는 영역으로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핏빛으로 일그러진 망자들. 결계는 부셨지만 진한 녹색으로 일그러진 아일 하사드의 영역. 그 속에서 이미 차갑게 식혀진 생명들.
리에르는 이를 사리물었다. 스스로를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사람들을 이유 없이 학살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밑바닥에서 자라온 아일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세계에서 살아왔다.
덕분에 그는 선천적인 사악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 시체로 만들어진 카펫이었다.
‘아일 하사드…… 넌 아직 몰라.’
적어도 리에르는 생명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었다.
잠들 때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영혼들의 절규.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었던 존재를 죽인 죄인.
지금 자신의 뒤편에 말없이 따라오는 에레사.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온기를 나눠주던 에레사의 눈빛이 변질되었을 때의 슬픔.
리에르는 자신이 잠든 줄 알고 원망을 퍼붓던 에레사를 떠올렸다.
그녀가 정말로 증오만 퍼붓는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애증을 견디기 힘들어 울고 있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기 위해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잠드는 에레사의 모습.
그녀가 잠들은 이후에 슬며시 눈을 떴을 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 아까 전만 해도 차가운 목소리로 증오를 쏟던 그녀의 얼굴은 차라리 평안해 보였다.
품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잠들은 에레사를 바라보며, 리에르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사리물었다.
리에르는 에레사의 일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곧 의문이 찾아들었다.
분명히 에레사는 기절한 채로 적의 소굴에 있었다. 그리고 리에르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티미, 리즈와 함께 전투를 치렀다.
더군다나 그 이후 에레사는 티미에게 살해당했다. 리에르는 그 때문에 자신이 폭주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즉 사건의 중심이었던 리에르도 기억하지 못하는 당시의 상황을, 죽어 있던 에레사가 부모님의 일을 알 리 없었다.
‘에레사는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어.’
포스에 대한, 적혈의 악마에 대한 정보는 교단 내에서도 굉장히 고급 정보였다.
자신조차도 전혀 알지 못한 이야기를 에레사 그녀에게 전달했다면 그 의도는 분명히 좋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에레사를 계속 곁에 두다 보면 그 무언가에 대해서 알아낼 수도 있었다.
‘굳이 의심한다면…….’
리에르는 에레사에게 이야기를 전달한 사람들을 추리해 보았다. 지금으로서 가장 유력한 사람은 카르샤나 엘이었다.
분명 너무나 선량하고 따뜻한 두 사람이다.
그들을 의심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행위였다.
하지만 리에르는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미소 뒤에 칼날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만약에 사실이라면……!’
리에르는 상대가 누구라 해도 에레사를 이용하는 존재가 있다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Master 적대 목적을 지닌 의식체 3기 접근 중입니다.
리에르의 시선 안으로 푸른색의 한기를 가진 생명체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보통 인간을 볼 때 붉은 온기와 푸른 한기가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즉, 인간이 아니다.
“온다, 조심해!”
리에르는 아르카를 어깨까지 들어 올렸다. 칠흑으로 빛나는 저주받은 검이 웅웅, 하는 소리를 내면서 자장을 피웠다.
엘빈을 비롯한 기사들도 리에르의 말을 듣고서 무기를 고쳐 잡은 채로 전방을 주시했다.
엘빈은 마나의 시선이 없어도 적의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머금어졌다.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용기사 셋.
이쪽이 훨씬 인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 것은 기사들이었다.
“리엘 군, 한 마리 맡아줄 수 있겠나?”
“문제없어.”
엘빈은 크큭, 하는 웃음을 내뱉으며 자신의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재빨리 한 마리 끝내고 지원해라.”
“넵!”
팔번 기사단은 대답하긴 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용기사의 위용에 위압당했다.
철판을 빗대어 만든 것 같은 비늘 갑옷. 무엇이든 잡아 뜯을 수 있을 것 같이 강인해 보이는 손톱과 등 뒤로 펼쳐져 있는 피막의 날개.
네버 에이지의 용기사들은 크르르, 하는 숨소리와 함께 차가운 입김을 내뿜어 보였다.
“온다!”
세 녀석이 동시에 발을 움직였다 싶더니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리에르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들어오는 용기사를 베기 위해 기합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뛰쳐나갔다.
붕!
리에르가 횡으로 그어놓은 검은 용기사 대신에 바람만 찢어놓았다.
용기사는 리에르를 무시한 채로 공격을 피하고 지나쳤다.
덤벼들지 않고 지나치는 용기사의 모습에 리에르는 이상함을 느꼈다. 움직이는 방향의 끝에 에레사가 무방비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리에르의 동공은 천천히 확대되었다.
그의 불안함은 착각이 아니라는 듯, 용기사는 리에르나 다른 기사들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았다. 오로지 에레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에렌!”
리에르는 이를 악물고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에레사는 당황한 듯,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는 용기사의 창날 같은 손을 바라보았다.
리에르는 다급하게 에레사를 향해 달려드는 용기사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자신이 도착하기 이전에 용기사의 창이 에레사의 몸을 꿰뚫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악몽. 한번은 눈앞에서 겪었던 에레사의 죽음.
자신의 눈앞에서, 그녀의 가슴을 관통하는 시커먼 칼날.
검붉은 핏방울이 허공에 춤추며 생을 꺼뜨리는 순간을 기억한다.
-Thousand Arms Mode 변동합니다.
아르카가 검은빛을 뿜으면서 리에르의 손안에서 분열되기 시작했다. 칠흑의 검은 흑색 큐브로 분자화 하면서 형태가 무너졌다.
이윽고 검에서 총신으로 형태가 바뀐다.
‘제발.’
리에르는 간절히 속으로 뇌까렸다. 다시 한번 그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스스로 어떻게 될지 몰랐다.
지금 현재도 억지로 자기 자신을 누르고, 슬픔을 밀어낸 채로 앞을 향해 걸어가려 하였다.
-마나 탄 장전 완료. 목표 조준.
키이잉!
총신의 빛이 환하게 밝혀지며 불을 뿜었다.
콰아앙!
용기사는 뒤편에서 번개 치는 소리를 듣고 몸을 회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이미 늦었는지, 마나 탄을 직통으로 얻어맞았다.
리에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에레사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갔다.
하지만 용기사는 총탄에 허리가 부서져 나갔어도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창처럼 변한 용기사의 손이 에레사를 향해 찌르고 들어갔다.
에레사는 깜짝 놀라며 옆으로 회피했다. 운 좋게도 용기사의 창이 벽을 두부살처럼 찢으며 파편을 떨어뜨렸다.
리에르가 쏜 마나 탄 때문에 용기사의 반응이 다소 늦었었다. 하지만 이번엔 정확하게 그녀의 몸을 세로로 찢기 위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구석에 몰린 무기 하나 쥐지 않은 가녀린 소녀. 에레사는 자신의 두 배 이상 덩치가 큰 용기사의 세로줄눈을 바라보았다.
저절로 몸이 떨려왔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놈의 창과 같은 손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쳐졌다. 그 순간 번쩍하는 검은 빛이 보였다.
아르카가 용기사의 팔목을 베어 넘겼다. 초록빛 혈액이 투두둑, 사방에 흩어졌다.
땅바닥을 뒹구는 용기사의 꿈틀거리는 팔목. 그것을 발로 짓밟으며 리에르가 차가운 눈동자를 열었다.
그는 에레사의 앞에서 아르카를 들어 보였다.
치명상은 입었지만, 기세가 줄어들지 않은 용기사는 커다란 입을 벌리며 포효했다.
용기사의 뒤편으로 보이는 남은 두 마리는 엘빈과 기사들이 상대하고 있었다.
일그러진 리에르의 눈동자.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용기사는 에레사를 노리고 움직였었다.
두근, 두근.
격앙되는 심장의 울림. 알 수 없는 손길이 자신을 끄집어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갖은 전투 속에서 핏물을 마시고, 권모술수로 가득한 인간의 악랄함을 눈으로 지켜봤었다.
그는 불길함을 감지하였다.
에레사를 등으로 가리면서 리에르는 용기사에게 검을 들어 보였다.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엘빈과 팔검 대원들은 용기사 둘을 상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용기사의 강함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피해를 보지 않도록 차곡차곡 상대에게 대미지를 주었다.
문제는 에레사였다.
용기사는 포효와 동시에 랜스 형태의 두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돌진했다.
주변에 장식되어 있던 왕성의 기둥과 벽화는 으깨져서 돌 파편을 날렸다.
리에르는 용기사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았다간 그대로 박살 날 것을 직감했다. 그렇기에 상대의 공격을 슬쩍 흘려보냈다.
용기사는 몇 차례의 공격이 다 실패하자 약이 바짝 올랐는지 입을 크게 열어 보였다.
역겨운 냄새와 동시에 용기사의 입안에서 심상치 않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리에르는 재빨리 에레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그녀가 놀라기도 전에 공격을 회피했다.
콰앙!
한순간 건물이 우루루,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 사방을 흔들었다. 자욱한 먼지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리에르의 곁에 있던 에레사도 쿨럭거리는 기침을 연신 토해냈다.
리에르는 이대로 적에게 공격받기만 해선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어만 해봤자 상대의 공격이 멈추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최선의 방어는 공격인 것은 당연했다.
리에르는 아르카를 활용한 장거리 공격을 생각했다.
하지만 금방 그 생각을 접어야만 했다. 장거리 공격을 가하면 주변의 기사들까지 피해를 볼 수 있었다.
지금 리에르의 눈앞에 있는 용기사는 치명상을 입어 내장과 갈비뼈가 훤히 보였다. 그래도 용기사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공격을 휘둘렀다.
리에르는 자신의 몸보다 더 큰 랜스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빌어먹을,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는 이를 사리 물으며 몸 안에 기운을 끌어모았다.
용기사는 덩치가 큰 값을 하려는지 공격 하나하나가 육중했다.
랜스를 막아 낸 리에르는 뒤로 주르륵, 밀려나면서 벽에 부딪혔다.
버티기 위해 힘을 주었던 발바닥은 마찰 때문에 불이 나는 듯 뜨거웠고, 어깨는 빠질 것 같았다.
용기사는 포효하면서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었다.
용기사가 돌격해 오는 것을 보고 리에르는 아르카를 번쩍 들어 보이고는 눈을 감아 내렸다.
눈 안의 시원한 기운이 감돌며 리에르는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쿵쿵쿵, 놈이 달려오는 소리가 지척까지 들려오자 리에르는 천천히 눈가를 열어 보였다.
흑요석을 깎아놓은 것 같은 검은 눈동자는 어느새 푸른색으로 빛나는 마나를 품고 있었다.
“리엘, 난 상관하지 말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등 뒤로 에레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리에르는 입술을 깨물며 머릿속으로 뇌까렸다.
‘바보야, 놈은 널 노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