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7)
레필리아 레소드-17화(17/398)
레필리아 레소드 17화
최악의 약혼자(6)
“사내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하지. 나도 처음에는 일개 기사에 불과했다.”
“아, 예…….”
“그러다 엘리시움 공방전에 나섰지. 거기서 적의 십부장 둘을 베었을 때 희열을 느꼈다. 일개 병졸과 훈련된 정예 십부장을 벨 때의 감촉은 또 다른 것이거든.”
“아, 예…….”
“엘리시움 공방전 마지막에 백부장을 베었을 때의 그 느낌이 어땠을 것 같은가? 아르빈트 군?”
“아, 예…….”
리에르는 엘빈과의 대화가 괴로웠다.
‘이 인간은 할 이야기가 사람 죽인 이야기밖에 없냐.’
리에르는 저절로 머리가 아파졌다.
기사라고 하면 자신의 형 파에트 같은 이미지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같은 유격기사 출신인 엘빈은 왕자님 포스를 풍기는 형과는 달랐다.
아주 악질적이고, 아주 악의적인 변태였다.
엘빈이 엘리시움 공방전 열흘째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 때였다.
리에르는 끼익, 하고 문 여는 소리를 듣고서 시선을 움직였다.
손님이 찾아온 거라면 마중하는 것으로 엘빈에게서 도망칠 수가 있다.
그런 생각으로 기뻐하던 리에르의 눈동자는 금세 절망적인 얼굴로 뒤바뀌게 되었다.
차라리 엘빈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페이서스 카이샤가 자랑하는 금발의 미녀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미소를 지으며 집 안에 들어섰다.
당황한 리에르보다 앞서 라일라가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어서 오너라, 에렌. 식사는 했니?”
“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는 줄 알았으면 굶는 게 좋았는데요.”
불필요한 인사치레를 나누던 에레사는 못 보던 손님들이 있는 것을 보고 살짝 고개를 한번 숙여 보였다.
제이미는 도도하게 냅킨으로 입술을 훔친 뒤에 목례를 건넸다.
리에르는 최대한 눈을 내리깔고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하필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을 마주했다.
하지만 집 안에서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에레사는 초승달 형태로 눈웃음을 그리며 리에르를 바라봤다.
“어머, 내가 왔는데도 우리 리엘은 인사도 안 해주네.”
“뭐, 지겨운 얼굴이니깐.”
에레사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서 라일라에게 애교 있는 말투로 말했다.
“아줌마, 리엘이랑 같이 가볼 데가 있어서 왔어요. 빌려 갈게요. 리엘 식사는 다 했지?”
“아니.”
리에르의 볼멘 듯한 목소리를 듣고 에레사는 식탁을 보았다.
리에르의 앞에 있는 빈 그릇을 보고는 에레사는 미소를 머금었다.
“잠깐만.”
“켁!”
에레사는 리에르의 멱살을 잡고서 질질 밖으로 끌려 나갔다.
“잠깐, 나 오늘 손님들 데리고 도시 구경 안내해야 해. 존경하는 어머니의 명령이다!”
진실 어린 리에르의 말에 에레사는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사실이란다.”
라일라는 아쉽다는 듯이 답변했다.
‘휴우.’
리에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뛰어난 임기응변에 감탄했다.
하지만 제이미가 찬물을 끼얹어 주었다.
“자네 따위의 호의는 필요 없네. 나에게도 두 손과 두 눈, 그리고 두 발이 있는데 자네의 도움을 바라진 않네.”
“어, 그래. 고맙다.”
리에르는 처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에레사에게 다시 목덜미가 채워져 질질 끌려가기 시작하였다.
만난 지 한참 된 듯한 어색함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어제는 잘도 주무시는 척하더라?”
“자고 있었어.”
“어머, 너 코골이가 얼마나 심한 줄 아니? 네가 그렇게 곤하게 잔다고?”
“피곤할 때만 코 골아.”
“아니. 넌 낮잠 잘 때도 코 골아.”
먼저 침묵을 깬 에레사는 사정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필사적으로 그녀에게서 자신을 방어했다.
걸음이 빠르다. 도망치듯이.
뛰듯이 따라 걷던 에레사는 잔뜩 삐쳐 있는 리에르를 보며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야, 리엘. 너 정말 이상하다? 질투하는 거니 설마.”
정곡이었다.
한순간 리에르는 걸음이 멈춰 섰다.
기회는 이때다.
에레사는 빠르게 리에르를 따라잡고서 따졌다.
“너 정말 이상한 거 알아? 왜 짜증 내?”
“누가?”
“짜증 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이래?”
“너. 됐지?”
리에르는 그렇게 내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걸어갔다.
에레사는 다시 그의 뒤를 바짝 쫓아간다.
한쪽은 거리를 벌리려고 한다.
또 한쪽은 거리를 좁히려고 걷는다.
서로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리엘, 잠깐 멈춰봐. 대화 좀 해.”
“무슨 대화를 나눌까? 바퀴벌레 뒤집어 놓은 것 같은 몸을 한 근육 남친에게 사과하란 거? 보면 할게! 어차피 카이샤에서 손꼽는 실력자를 나 따위가 싸워서 이길 리 없으니 빌어야지.”
“비비 꼬지 말고.”
에레사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로서는 리에르가 자신에게 화를 낼 만한 일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흔하디흔한,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소꿉친구들의 사랑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았다.
에레사는 리에르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옆집에 살았기에 항상 붙어 다녔던 소꿉친구.
심약하고 마음 약했던 자신을 지켜주던 아이였다.
리에르는 다른 남자아이랑 놀지 않았다. 언제나 에레사와만 놀았다.
‘하지만, 리엘은 왜…….’
천성이 장난꾸러기인 그가 어째서 또래 남자들과 놀지 않고 울보였던 자신과 놀았을까.
에레사는 갑자기 의문이 찾아왔다.
그 이유가 떠올랐다.
리에르는 또래 남자들과 놀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놀 사람이 없었다.
에레사를 만나기 이전까지 항상 또래들과 밤늦도록까지 놀러 다녔었다.
하지만 동네의 짓궂은 아이들은 유난히 흰 피부와 인형 같은 외모를 지닌 에레사에게 장난을 걸어왔다.
그럴 때마다 리에르는 에레사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때리고, 혹은 얻어맞았다.
자연스럽게 리에르는 또래 남자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에레사 본인 때문에.
‘설마…….’
멈칫해 있던 에레사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바로 앞에 있던 리에르가 보이지 않았다.
‘놓쳤어.’
에레사는 왠지 기운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리에르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괴롭힘만 받던 자신의 곁을 항상 지켜주었던 것은 리에르였다.
그가 있었기에 에레사는 항상 괴롭지가 않았다.
“뭐 해?”
에레사는 리에르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리에르가 보였다.
축제의 열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리에르를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리에르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걷고 있었다. 에레사와 떨어지지 않도록.
에레사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리에르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멈춰 있는 상대와 거리를 좁히기는 간단하다. 이쪽이 걸어가면 된다.
“달고 맛있는 시츠 슬라임 팝니다!”
리에르는 시츠 슬라임 꼬치를 파는 가게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곧 슬라임 꼬치 두 개를 사서 입에 물었다.
“이거 오랜만이다.”
에레사는 리에르가 건네준 시츠 슬라임을 받고서 미소를 머금었다.
“근데, 리엘 밥 아까 먹었는데 또 먹어도 돼?”
“누규 때문에, 우걱우걱. 밥이 부족하댜궁.”
“말을 하지.”
“말했거든?”
리에르가 툴툴거리자 에레사가 빙긋 웃는다.
이 음식은 예전엔 리에르와 에레사가 자주 사 먹던 음식이었다.
요즘 파는 가게가 보이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졌다.
리에르는 에레사에게 시츠 슬라임 꼬치를 넘겼다.
에레사 역시 넘겨받은 꼬치를 입안에 우물거리며 미소 지었다.
“이건 여전히 맛있네.”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함.
에레사는 행복하다는 듯이 한쪽 뺨을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론 시츠 슬라임 꼬치를 허공에 빙글빙글 돌렸다.
리에르는 다 먹은 꼬치를 땅에 버리고는 시츠가 묻은 손가락을 혀로 핥아 보였다.
물론 시츠 슬라임을 추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나 더!”
“예예, 금방 구워드립죠.”
중년 남성은 일정 시간 불길을 내는 원석 위에 작은 불판을 놓았다.
그 위에 자연스럽게 비치된 시츠 슬라임이 솜씨 좋게 나열되었다.
금세 원래 크기보다 줄어들게 된 시츠 슬라임 위에 양념을 뿌리자 노릇노릇 맛 좋게 익어간다.
“여기 있습니다.”
중년 남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에르는 꼬치 하나를 들어 입안에 넣었다.
삽시간에 꼬치가 게 눈 감추듯이 해치워졌다.
에레사는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치사하게 혼자만.”
리에르가 마지막 꼬치도 냅다 먹어 치울까 무서웠던 그녀는 급하게 꼬치 하나를 사수했다.
“쳇.”
아쉬워하는 리에르의 목소리.
그것을 듣고는 에레사가 맑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최대한 맛있어 하는 표정으로 먹어주었다.
“그런데 리엘, 오늘 본선 시합 있지 않았어?”
“그래서 가는 중이잖냐.”
“그래도 다시 봤는걸. 오늘은 우리 리엘 군이 본선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똑똑히 지켜봐 주도록 하지. 에헴.”
“네 잘나신 남자친구분은 어쩌시고?”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의 리에르가 묻자, 에레사는 깍지 낀 양손을 뺨에 대고서 눈을 지그시 감아 보였다.
“우리 선배는 본선 대회 오프닝으로 검무를 보이기로 해서 나랑 놀 시간이 없거든.”
“네네, 그러십니까. 난 그냥 시간 죽이기 용이네?”
“그럼?”
“…….”
노골적으로 얼굴이 구겨진 리에르의 얼굴을 보며 에레사는 살포시 웃었다.
어렸을 적 항상 자신을 보호해 주던 그 작은 등이 넓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걱정하지 마. 오늘만큼은 확실하게 우리 리엘 군의 시합을 응원해 줄 테니깐.”
“뭐, 추태는 안 부리게 노력해 주지.”
리에르는 은근슬쩍 기분이 좋아지는지 콧등을 긁으며 자연스럽게 얼굴을 돌렸다.
그의 그런 모습은 항상 쑥스러움을 타면 항시 해오던 행동이었다.
에레사는 자연스럽게 리에르의 팔짱을 꼈다.
그러면 언제나 보아온 리에르의 반응이 뒤따라온다.
귓불까지 새빨개지면서 까칠하게 말할 것이다.
“뭐, 뭐 하는 거야!”
역시나 항상 같은 반응,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
“본선 시합을 하실 몸인데 다치면 안 되잖아? 이 에레사 님이 우리 리엘 군 시합장까지 잘 모셔다드려야지.”
“야, 아줌마. 안 떨어져?”
팔을 뿌리쳐도 힘은 들어가 있지 않다.
정말 뿌리칠 생각이라면 에레사가 다치든 말든 힘만 주면 될 일. 그런 모습을 보며 아르미안은 미소 지었다.
어젯밤만 해도 죽을상이었던 그는 문제의 소지를 준 소녀에게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한창 청춘 때인 이 두 사람의 어긋나는 감정들이 어떻게 결말이 날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만은 중요하다.
검으로서 살아, 검으로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그녀에게는 참 부러운 장면들이었다.
그녀 역시 에레사나 리에르처럼 설레는 마음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
아주 한참 오래된 일이지만.
그 감정의 과정은 그들처럼 달콤하고 행복하지만, 결말이라는 추악한 굴레에 뒤엉켰을 때 그녀는 도망치고 말았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은 충동에 억지로 생각의 구름을 털어내 버렸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지도, 돌아갈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이대로.
그냥 이대로 행복과 불행을 같이 안겨주었던 그와 닮은 리에르의 곁에서 그의 성장을 뒤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아르미안이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과는 달리, 운명의 수레바퀴는 다른 의미로 향해 가고 있었다.
끼익, 끼이익.
그것은 평화로운 이들을 덮치기 위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흘러왔다.
평화란 깨뜨리는 것에서 의미가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