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70)
레필리아 레소드-170화(170/398)
레필리아 레소드 170화
엘의 음모(3)
이유는 모르지만, 용기사의 공격은 리에르보단 에레사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리에르와 함께 있어서 에레사가 휘말리는 것이 아니었다.
리에르의 존재를 무시하면서까지 집요하게 에레사를 노리는 용기사의 공격은 이해할 수 없었다.
태생적으로 두꺼운 피부를 가진 용기사에게 어설픈 공격이 먹혀들 리 없었다. 더더군다나 에레사를 보호하며 싸운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르카.”
-네, Master.
“에레사에게 스테이시스 필드(Stasis Field)를.”
-마력을 상당히 소모합니다. 또한, 아르카는 Master의 전투를 지원하지 못합니다.
아르카의 말에 리에르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
확고한 주인의 의지를 받들어 아르카는 검은 자장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마치 촉수처럼 보이는 검은 자장들은 리에르의 혈관에 박히며 마나를 뽑아냈다.
잠시 팔이 얼얼하게 느껴지는 마비 증세가 찾아온다.
용기사도 세로줄눈을 끔벅거리며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에레사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영문을 모르고 아르카와 리에르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오랫동안 손에서 검을 놓았다곤 하지만 카이샤에서 검술 수업을 받던 수재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용기사의 공격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리에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레사가 봐도 알 수 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소모하고 있었다.
“리엘…….”
에레사는 안타까운 감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리에르의 등 뒤로 손을 가져다 대고 싶었지만 무언가 보이지 않는 장막이 앞을 가로막았다.
-Stasis Field 발동 완료.
“좋아.”
리에르는 눈앞이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마나 소모가 극심할 것 같기는 했다.
그도 처음 써보는 기능이라 피로도가 극심하게 느껴졌다.
고맙게도 기다려주고 있던 용기사는 알고 보니 허리의 상처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뼈와 내장이 보이던 옆구리는 이미 두꺼운 갑주로 가려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리에르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더 이상은 용기사도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는지 랜스를 들으며 달려들었다.
리에르는 후우, 하는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푸른색의 이채가 서려졌다.
“레소드 제 0식.”
후드 안으로 감춰졌던 리에르의 머리카락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기류로 펄럭이는 로브 자락을 쓸어 올리는 손. 그 끝에 감아쥔 칠흑의 검, 아르카.
달려드는 용기사에게 정면으로 유유히 걸어가던 리에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팬텀(Phantom).”
닿기만 해도 모든 것을 산산이 부서뜨릴 용기사의 랜스가 날아들었다.
리에르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발을 내디디며 몸을 숙였다. 등을 오싹하게 만드는 용기사의 무기가 만든 바람이 리에르의 로브 자락을 펄럭이게 한다.
순식간에 용기사의 지척까지 파고든 리에르는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용기사를 베지 못하는 허공에 검호를 그려 넣었다.
근접해 있기에 랜스를 휘두르기 불편했는지 용기사는 다른 한 손으로 리에르를 낚아채기 위해 뻗어냈다.
무심한 푸른색 눈빛을 들면서 몇 차례 허공에 검을 휘두르던 리에르는 다가오는 용기사의 손목을 짚었다.
그러고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제자리에서 점프해서 용기사의 손을 뛰어넘으며 검을 휘둘렀다.
용기사는 랜스를 회수한 채로 리에르를 쳐내기 위해서 횡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아르카를 내리고 바닥에 선을 그려 넣던 리에르는 진각을 밟으며 공격을 받아낸다. 랜스의 힘에 밀려나는 동시에 리에르도 뒤쪽으로 도약했다.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리며 땅 위에 선 리에르를 보고 용기사가 세로줄눈을 끔벅였다.
이제는 공격하기 위해서 리에르가 용기사에게 뛰어들었다.
힘은 강하지만 거구의 체격 덕분인지 공격 속도는 늦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면서 리에르는 손에 쥔 아르카에 마나를 쏟아부었다.
용기사의 랜스가 다시 거센 바람을 찢어내면서 리에르에게 날아든다. 에레사의 시선 속으로 거대한 랜스가 리에르의 몸에 닿는 것이 보였다.
저렇게 큰 무기에, 저런 힘으로 얻어맞는다면 리에르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게 될 것이다.
에레사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리에르에 대한 증오를 생각한다면 그가 다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하나하나 놓치지 말고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계속해서 전투가 진행되는 소리를 듣고서 에레사는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 안으로 리에르가 멀쩡하게 용기사의 주변을 선회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이 점점 용기사에게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용기사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이 움직이는 리에르는 쉬지 않고 발을 움직여 이동했고, 멈추지 않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단단한 용기사의 비늘도 조금씩 베여나가기 시작하지만 그러한 것으론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비늘이 조금 베여나가는 것으론 대미지가 들어가지 않는다.
용기사는 리에르가 얄밉기라도 했는지 고함을 지르며 재차 달려들었다.
그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나는 리에르를 보고 용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돌진했다.
리에르는 옆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매서운 랜스의 돌풍에 로브가 펄럭거리며 가슴 언저리가 찢겨나갔다.
리에르는 몸을 반 회전 돌리며 검을 추켜올렸다.
푸른색 잔광을 허공에 그리며 뻗어지는 아르카는 치이익 하는 소리와 불똥을 튀기며 용기사의 겉면을 긁었다.
코웃음을 치면서 용기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리에르는 용기사를 흉내 내는 것처럼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갑자기 바닥에서 푸른 섬광들이 올라오더니 허공에서도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빛줄기에 영문을 모르던 용기사는 주변을 보는 동안 자신의 몸에 그려진 파란색의 선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기사는 자신의 몸에 그려진 수북한 선들에서 선혈이 맺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선혈이 그려지기 시작하는 푸른색 선을 중심으로 비늘이 벌어지고, 상처가 그려진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용기사의 전신에서 피가 일제히 쏟아지면서 바닥을 적셨다.
“크어어!”
고함을 끝으로 용기사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쓰러진 적에게서 시선을 돌린 리에르가 에레사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조금 피곤한 기색이 있어 보이지만 리에르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용기사를 해치웠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에레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리에르를 바라봤다.
일전에 성기사를 상대로 칠흑의 날개를 펼치며 활주하던 그의 모습은 잘못 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리에르는 용기사를 상대로 일방적인 승리를 보여주었다.
엘빈과 정예기사들이 용기사들을 상대로 고전하는 모습을 보고 리에르는 에레사에게 입을 열었다.
“다녀올 테니, 조심해.”
“난 신경 쓰지 말고…… 리엘, 조심해.”
에레사의 걱정스러운 표정. 그녀의 감정이 어쨌든 간에 에레사는 리에르에게 있어서 치유자 같은 존재였다.
리에르는 겸연쩍게 웃어 보이곤 아르카를 고쳐 잡으며 다시 전투에 돌입했다.
조심해.
에레사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되씹으며 씁쓸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리에르가 용기사와 전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도 떼지 못하고 있는 자신.
혹시나 용기사에게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무안할 정도로 그는 강했다.
리에르를 만나기 전에 그가 자신의 부모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보고 싶다는 마음과 원망이 한데 뒤엉켰다.
그것은 이제 애증처럼 남아 있었다.
그저 말뿐이 아닌 마법으로 그때의 상황을 보여준 엘 파실드.
그는 리에르를 만나기 위해선, 그를 사랑하기 위해선 그의 모든 것을, 그리고 그의 죄까지 덮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위로하였다.
하지만 그런 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에레사는 리에르가 증오스러웠다.
자신에게 이런 증오를 품게 만든 그가 미웠다.
예전처럼 밝고 쾌활하게 살고 있었다면 에레사는 리에르에게 복수를 다짐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리에르는 깊은 어둠을 끌어안고 있었다.
고독한 길을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서 싸워왔다.
그런 것도 잠시, 삶에 대한 애착도 잃은 채 슬픔을 눈 안에 담는 그를 보면서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겉으론 이전과 별로 다른 것이 없어 보였다.
그와 함께 지냈던 세월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소한 버릇부터 행동과 성격들까지, 모두가 에레사에게는 익숙한 것들이었다.
절망적인 죄의 무게에 짓눌려서 살아가는 남자.
항상 장난스러운 눈동자로 심술궂은 일만 곧잘 해오던 꼬마였었다. 지금은 넓은 등을 가진 사내로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리엘…… 난…….’
리에르 그는 단지 이용당했을 뿐이란 사실을 이미 에레사 자신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말하고,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고 싶다.
‘왜…… 왜 나에게 사실을 알려준 거예요, 엘…….’
모든 진실을 알려준 엘 파실드가 원망스러웠다.
보통의 연인들처럼, 보통의 남녀처럼, 예전과 같은 두 사람으로 만나서 정말로 미소를 지어주고, 정말로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다친 기사들을 뒤로 밀어내며 앞으로 나서는 리에르의 모습이 무언가에 굴절되어 투명해 보인다.
흔들리는 리에르의 뒷모습을 투영하던 눈물이 주르륵, 고운 뺨 위로 흘러내린다.
-에레사, 들리나요.
“……!”
에레사의 머릿속으로 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환청이 들리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다시 한번 들려온 그의 온화한 목소리는 환청이 아니란 사실을 인지시켜 주었다.
-지금 그쪽은 괜찮나요?
이제 새벽 시간이었다. 엘은 이쪽의 상황을 전부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그의 말에 에레사는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엘 파실드 같은 위인이 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에레사는 너무나 적절한 시기에 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곧 그쪽으로 갈 테니 좀만 기다리세요.
에레사는 그의 말에 안도감을 느꼈다. 엘이 오면 지금의 상황도 금방 종결될 것이 분명했다.
힘들게 전투를 치르고 있는 리에르의 뒷모습을 보며 에레사는 자신도 모르게 다행이라고 느꼈다.
에레사의 입장에선 역시나 엘이 갑작스러운 사람이어도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안도하던 에레사는 순간 주변이 어두운 그림자가 덮치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란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낯빛이 변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껏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형상의 괴물. 기이한 팔, 그리고 등 뒤로 꿈틀거리는 괴상한 촉수를 가진 괴물은 커다랗고 동그란 입을 벌리며 톱니를 들어냈다.
“꺄아악!”
에레사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녀의 비명이 괴물을 자극했는지 놈은 그대로 달려들었다.
리에르는 에레사의 비명을 듣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시야 안으로 끔찍하게 생긴 괴물이 에레사를 향해 입을 벌린 것이 보였다.
“에렌……!”
리에르는 그대로 에레사를 향하여 뛰어들었다.
-Stasis Field 대미지를 입습니다.
리에르의 귓가로 아르카의 브리핑이 들려왔다.
괴물은 기다란 손으로 에레사를 낚아채려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미리 쳐놓은 스테이시스 필드는 안전했다.
하지만 괴물의 불길한 생김새만큼이나 안 좋은 예감이 느껴졌다.
리에르의 시야 안으로 괴물의 등 뒤로 춤추는 촉수들이 보였다. 그것과 함께 늘어진 빛의 날개는 긴장감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리에르는 처음 보는 괴물이었지만 상대가 누군지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있었다.
제2의 적혈의 악마. 리에르의 후임자인 네 번째 포스 아일 하사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