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73)
레필리아 레소드-173화(173/398)
레필리아 레소드 173화
아버지의 뒷모습(2)
리에르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공격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에레사에게 가는 것은 힘겨웠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시간이 걸렸다.
미쳐 날뛰고 있는 아일의 등에서 균형을 잡는 것조차 힘들었다.
엘빈은 양손검을 놀리며 아일의 발목을 노렸다. 기사 몇은 이미 아일의 공격에 당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Stasis Field 곧 붕괴합니다.
아르카의 경고음이 들려오자 리에르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다시 한번 눈앞에서 에레사를 잃는다?
그것은 차라리 악몽과도 같았다.
리에르는 정신없이 공격해 오는 아일의 촉수들을 피하고, 베어내기를 반복하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레소드 제0식 팬텀 (Phantom).”
리에르는 마나 소모가 극심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술을 발동시켰다.
리에르의 로브가 푸른색 기류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을 가렸던 후드가 뒤로 젖혀지며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리에르는 아르카를 어깨와 수평이 되도록 들어 올렸다. 그의 푸른색으로 빛나는 안구 속으로 무수히 많은 촉수가 쏟아지는 것이 비쳤다.
팬텀을 시전 한 리에르의 시야에는 촉수들이 매우 느리게 보였다. 그는 가벼운 스텝만으로 공격들을 전부 회피하면서 앞으로 나갔다.
-Stasis Field 한계 돌파.
아르카의 경고음이 급박해지자 리에르의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빠르게 승부를 내지 않는다면 에레사와의 일을 끝맺음하지도 못한 채,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받지도 못한 채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 버린다.
마치 거친 파도처럼 밀려드는 촉수들을 향해 리에르는 춤을 추듯이, 혹은 투명한 유령처럼 잔상을 일으키며 피해냈다.
리에르는 등 뒤로 추격해 오는 촉수들보다 한발 앞서서 뛰어올랐다.
아일은 머리를 흔들면서 리에르를 떼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모든 감각을 극대화한 리에르는 아일의 촉수와 손길을 전부 회피하면서 푸른 자장을 일으키는 아르카를 들어 올렸다.
푸걱!
리에르는 아일의 머리에서 뛰어내리며 아르카로 그어버렸다.
땅에 착지한 리에르는 하염없이 달려드는 촉수들을 베고, 또 베었다.
점차 거칠어지는 호흡과 함께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리에르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신호가 되어 팬텀으로 베어진 아일의 거대한 몸이 푸른 선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등에서 시작된 푸른 선은 리에르가 만들어 낸 검무의 흔적을 따라서 선명한 빛을 뿜으며 모든 것을 도려내었다.
눈이 아릴 만큼 환한 푸른 섬광들을 보고 기사들은 뒷걸음질하였다.
아일은 고통스러운 듯이 몸을 떨면서 포효하였다.
-크아아아악!
아일의 비명이 귀를 찢을 듯이 들려온다. 곧 녀석은 비틀거리며 왕성의 벽 사이를 왔다 갔다 부딪쳤다.
이내 쿵, 하는 바닥에 울려 퍼지는 소리와 함께 아일이 쓰러졌다.
살아남은 기사들은 오오, 하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괴물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작은 피해로 놈을 잡았다.
리에르는 당장 에레사의 생존 확인이 급했다.
아직 몸집이 줄어들지 않은 아일의 목구멍에 걸려 있는 에레사는 공포감에 젖었는지 얼굴도 들지 못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이미 그녀를 보호하고 있던 스테이시스 필드의 빛도 거의 흐릿해져서 없어지기 직전이었다.
리에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렌.”
리에르는 에레사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에레사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든다.
분명 거대한 괴물에게 잡아먹힌 이후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방에 돋아나 있는 날카로운 이빨이 금방이라도 몸을 관통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더는 흔들림도, 괴물의 역겨운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미소를 짓고 있는 소꿉친구였다.
에레사는 잠시 멍한 얼굴로 있다가 리에르의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현실감을 일깨워 주고, 공포감을 밀어내면서 안도하게 했다.
순간 리에르는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극심한 허탈감과 가슴속에 밀려드는 고통. 리에르는 다른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기침을 시작했다.
하필이면 지금 이런 순간에, 다른 사람도 아닌 에레사의 앞에서 각혈을 시작했다.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극심하게 소모된 마력 덕분에 기운이 돌지 않았다.
숨이 턱하고 막힌다. 입을 틀어막은 그의 손가락 틈 사이로 검붉은 핏물이 맺혀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리엘……?”
에레사는 리에르가 각혈하는 모습을 보고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투를 반복할수록 갉아먹는 생명력. 무리해서 마력을 끌어올린 심장은 고통을 수반하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에레사는 안도했던 표정에서 점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손을 지나서 손목으로, 팔꿈치로 전달되는 검붉은 핏물.
고통스러워하는 리에르와 에레사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전신이 떨려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리에르가 겪는 고통은 부상 따위가 아니었다.
조금 전만 해도 공포에 눈시울을 적셨던 그녀가 이제는 또 다른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눈물로 적셔지기 시작했다.
크르르.
멈추지 않는 각혈로 지체하던 리에르와 에레사는 소름 끼치는 괴물의 음성을 듣고서 움찔하였다.
끝난 줄 알았던 아일의 몸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설마!’
리에르는 아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를 사리물었다. 더는 싸울 자신이 없었다.
리에르는 에레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핏물로 적셔진 손으로는 아르카를 꽉 쥐었다. 한 줌 남아 있는 마력까지 끌어모은다.
하지만 머리에서 핑, 도는 어지러움만 느껴졌다.
‘제발.’
입가를 타고 턱을 적시며 목 언저리까지 흘러내리는 검붉은 핏물.
코언저리도 싸한 느낌과 함께 핏물이 흘러내렸다.
지독한 현기증이 일어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제발, 이번만 버텨.’
죽어가는 몸을 향해 리에르가 속삭였다.
일 년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갈 때의 이야기다.
리에르는 그동안 몇 번이나 죽을 뻔한 부상을 얻었고, 생사를 오갔다.
그는 통증을 억지로 밀어내고 아르카를 들어 아일의 입안을 베었다.
-크아아악!
아일의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리에르는 에레사와 함께 도망쳤다. 아일은 눈을 붉게 물들인 상태에서 촉수를 흔들었다.
기사들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다시 전투 준비를 했다. 엘빈을 중심으로 포진한 기사들을 보고서도 아일은 코웃음을 쳤다.
“리엘, 너…….”
에레사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리에르의 출혈을 보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길이 리에르의 피를 닦으려 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고개를 돌려 손길을 피했다.
아일의 촉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아르미안 때문에 망설였던 모습은 더 이상 없다. 말 그대로 주변을 부수기 위해 움직이는 아일은 괴물이나 다른 바 없었다.
빠르게 날아드는 촉수에 꿰여서 아일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기사들은 발버둥 치며 검을 휘두른다.
으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아일의 전신에서 땀구멍이 열렸다. 그 속에서 촉수가 콩나물처럼 자라나며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엘빈은 종전과 같이 아일의 몸 깊숙이 파고들어 양손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분명한 한계가 찾아왔다.
“빌어먹을!”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다. 천하의 엘빈조차도 막막함을 느꼈다.
머릿속에는 후퇴라는 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왕성을 지키지 못하고 후퇴한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었다.
리에르는 다시 일어났다.
그의 몸은 한계에 돌입했다.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다시 주저앉는 리에르를 에레사가 부축했다.
사랑하는 가족의 목숨을 앗아가고, 행복을 깨뜨려 버린 리에르를 원망했다.
하지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무리하는 리에르를 보는 것도 싫었다. 아니,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니 찢어질 듯이 가슴이 아팠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리에르의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초췌해져 가고 있었다.
“도망치자.”
갑작스러운 에레사의 말에 리에르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에레사가 울고 있었다. 리에르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레사의 마음속에선 이율배반적인 생각들이 가득했다.
리에르가 죽게 되면 원한은 갚을지 모르나,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자신은 이 세계에서 혼자 남게 된다.
에레사는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빈도 한낱 인간임을 증명하듯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도 아일의 몸은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날아드는 촉수는 치명상을 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최강이라고 불리는 기사단이 죽을힘을 다해 수련한 검술도, 비지땀을 흘려가며 만들어 낸 포메이션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일방적인 전투, 학살.
앞에서 하나하나 쓰러져 가는 기사들을 보며 리에르는 이를 갈며 땅을 짚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 평생을 연마했다.
겨우 포스라는 괴물 하나 때문에 죽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건 아니야.’
리에르 자신도 포스였기에, 지난 일들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검을 들고 덤벼드는 생명을 무참하게 짓밟음으로써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광기를 이해할 수는 있다. 리에르에게 있어서도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일단 피해야 해, 리엘.”
피거품을 내뱉으면서 다시 일어서려는 리에르를 보고 에레사 만류하였다.
에레사가 원하는 일이 벌어지기 위해서는 리에르가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워야만 했다. 그것이 리에르가 죄를 갚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은 이율배반적인 생각들이었다.
에레사가 붙잡아도 리에르는 아르카를 땅에 박아 넣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에르는 포스가 없어도 스스로는 강하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포스로 인해 생명력을 빼앗긴 그는 자신의 몸이 어느 정도로 악화하였는지는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리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단 것처럼 걷는 게 힘겨웠다.
“모두…… 도망치란 말이다, 이 멍청한 놈들아!”
가뜩이나 기운도 없는데 악다구니를 친 바람에 리에르는 다시 쿨럭, 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더 이상 뱉어낼 피도 없는지 입안은 쓴맛만 느껴졌다.
자신의 외침을 무시한 채 눈앞의 기사들은 죽는 것이 용맹이라는 착각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일은 폭식했다.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시체가 남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스르릉, 스르릉.
무기를 땅바닥에 긋는 소리가 들려와 리에르는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의 지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용기사 세 마리가 랜스를 쥔 채로 눈에 불을 켜는 것이 보였다.
지금 아일만으로도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상할 정도로 에레사를 노리고 오는 용기사는 주변에 나자빠져 있는 십일검 기사들을 무시하고서 걸어왔다.
‘빌어먹을.’
에레사도 용기사들이 나타나 뿔을 흔들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리에르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아르카, 스테이시스 필드 생성할 수 있겠냐?”
-Master 생명 유지 System 운용하는 것도 한계입니다.
리에르는 몸이 조금씩 나아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르카의 시스템이 리에르의 몸을 보조해 주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하는 짓은 건방지지만 의외로 기특한 짓을 하는 검이었다.
그렇다고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다잡아놓은 사냥감처럼 천천히 다가오는 용기사들. 녀석들은 리에르와 에레사를 구석으로 몰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