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75)
레필리아 레소드-175화(175/398)
레필리아 레소드 175화
아버지의 뒷모습(4)
“어비스의 공주, 타락한 날개의 신부.”
엘 파실드의 오른손이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머리 위를 향한다. 흘러내리는 로브 자락이 걷어진다.
그는 우아하게 인사를 하며 아르미안에게 웃어 보였다.
“신들의 체스를 끝내고자 오랜 세월을 기다렸어. 이번에야말로 당신들을 부술 수 있는 최강의 말이 생겼지.”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
꿈에 바라던 종결의 날이 눈앞에 있었다.
엘 파실드는 신의 대적자로서 신의 선지자를 향해 두 번째 선전포고하였다.
첫 번째 전쟁처럼 헛된 생각, 헛된 망상은 지웠다.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품은 엘을 보며 아르미안이 입술을 깨문다.
주변의 사람들을 걱정하고 여린 마음으로 모두를 지키려 하던 순수한 청년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일그러진 야망을 품은 엘을 보며 아르미안은 애증이 느껴졌다.
“저번 같은 일을 또 할 작정이야?”
아르미안은 다시 떠올리기 싫은 듯이 이를 악물었다.
엘은 잔잔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 들어봐. 들리나? 신을 관통하는 최강의 무기가 담금질 되는 소리를. 눈을 감아봐, 찬란하게 빛나는 사익의 휘광이 모든 것을 종결하는 장면을.”
“그게 설마 리에르는 아니겠지?”
한 번 신을 상대로 대적했던 남자.
신과 만날 수 있는 빛의 계단을 지상까지 끌어 내리기 위해 많은 희생을 만들었던 남자.
엘은 온화한 눈빛을 반짝이면서 즐거운 듯이 입술을 열었다.
“리에르 아르빈트, 더러움으로 물들고, 부조리로 가득한 당신들의 신을 겨냥할 무기로 최고가 아닐까?”
“죽으려면 혼자 죽어. 그 아이는…… 당신처럼 되지 않아.”
“포스의 힘을 빼앗아 죽음에 길로 인도한 것은 너잖아.”
포스 오브 석셔너의 힘을 빼앗아 시한부로 만든 것은 아르미안이다.
진녹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엘을 쏘아보며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틀려.”
“뭐가 틀렸다는 거지?”
엘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허공에 손가락을 몇 번 까딱거렸다.
눈부신 빛줄기가 치이익,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의자 하나가 만들어졌다.
엘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아르미안의 근처에 있는 검은 아기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대륙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불행을 떠안았을 뿐이야.”
“편리한 대답이네. 혹시 수수께끼 같은 것은 아니지?”
엘은 팔짱을 끼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르미안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처럼 세계를 초기화한다는 미친 생각은 하지 않아.”
아르미안의 말에 엘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재창조라고 불렀으면 좋겠어.”
* * *
용기사는 리에르를 향하여 일제히 달려들었다. 지금 그들은 맹목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용기사는 먹이사슬의 최상위권에 군림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포식자가 아닌 피식자가 되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인간은 분위기가 바뀌었다. 인간의 조그만 육체에 가둬놓지 못하는 거대한 마력이 날개로 탈바꿈한다.
그 모습은 용기사로 하여금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리에르는 용기사의 랜스를 맨손으로 붙들었다. 손아귀에 힘을 가볍게 주자 단단한 랜스가 종잇조각처럼 구겨졌다.
용기사들은 다급하게 물러섰다. 리에르는 그것을 보고 비교적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크어엉!
용기사는 브레스를 쏘기 위해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순간 용기사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몸이 어느새 휘청거린다. 땅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위로 솟아올라 머리가 부딪친다.
용기사는 세로줄눈을 깜박이며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칠흑의 날개를 펼친 리에르가 머리를 잃은 용기사의 몸을 살짝 밀었다.
쿵!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몸뚱어리가 자신의 머리와 마주한다.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포스의 힘이 돌아왔다.
‘지금이라면 가능해.’
지금 이 힘이라면 에레사를 지킬 수 있었다.
몸에서 폭발하듯이 치솟는 마력은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리에르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머금어졌다.
리에르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린다. 아르카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손안에 빨려 들어갔다.
“크어어!”
용기사는 리에르를 향해 돌격했다. 이들의 머릿속에선 이미 에레사를 죽이라는 명령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은 공포를 이기기 위해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했다.
푸쉭, 푹!
리에르의 검이 용기사의 몸을 도려냈다. 그들의 랜스는 리에르의 몸에 닿지 못했다.
그의 앞으로 시커먼 자장이 방어막처럼 일어나서 랜스를 거부했다.
리에르는 용기사를 금방 처리하고서 아일 쪽을 바라봤다.
미친 듯이 촉수를 날리는 아일은 이성이란 단어가 남아 있지 않은 듯 보였다.
리에르의 주변으로 먹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홀 블레이드(Whole Blade) 수십 개가 생성되었다.
어지럽게 칠흑의 반사광을 일으키는 검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표적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일은 기사를 집어삼키기 위해 휘두르던 촉수가 갑자기 잘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
푸쉭! 푹! 췩!
날아 들은 검은 칼날에 찢어지고 베여 나간다.
기사들은 검은 청년이 칠흑의 날개를 펼친 것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사람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펄럭이는 후드 사이로 드러나는 선명한 푸른색 눈동자. 그 속에 그려진 얼굴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파엘 경?”
“대체…….”
포스 오브 어비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던 기사들은 갑자기 등장한 포스의 등장에 경악하고 있었다.
엘빈은 리에르가 날개를 펼쳐 보이는 것을 보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은 포식자를 의미하는 증거였으며 신의 힘을 이어받았다는 증명이었다.
엘빈은 암담해졌다. 눈앞에 있는 아일의 존재도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리에르마저 폭주를 일으키면 되돌릴 수 없었다.
‘리에르 군, 왕성에서 폭주하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
페이서스에서 벌어진 비극은 음모에 빠졌다는 상황도 있다. 그리고 죄를 갚는 방식으로 사면을 받는 방법도 있다.
허나, 다시 한번 죄를 저지른다면 아무리 영웅이라 해도 되돌릴 수 없었다.
엘빈의 불길함. 페이서스의 비극이 있었던 것도 몇 년 지나지 않았다.
‘위험하다.’
엘빈은 리에르가 사면받기를 원했다.
그가 폭주하게 된 원인으로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아르빈트 부인은 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부탁했다. 그 부탁을 거절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위험한 마을에 그를 두고 떠났다. 그 결과 리에르는 각성해서 폭주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폭주한다면……!’
엘빈은 이번에도 리에르가 폭주한다면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막겠다고 생각했다.
-리에르…… 아르빈트!
아일의 붉은 눈빛 안으로 자신의 연적, 리에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몸 전체에 달라붙은 촉수들을 뻗어냈다.
마치 철로 만든 가시처럼 쏟아지는 촉수.
리에르는 살기등등하게 날아오는 촉수들을 향해 손을 뻗어 내렸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다.
리에르의 주변을 날아다니던 홀 블레이드가 바람을 찢어내며 촉수를 베어낸다.
베어지고, 잘려 나간 촉수에서는 녹색의 핏물이 떨어져 나간다. 리에르는 날개를 펼쳐 들고서 아일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Master 현재 사용되고 있는 힘은 Irregular입니다. 자제할 것을 권합니다.
아르카의 경고음에도 리에르는 아무런 대답 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아일의 촉수가 몽땅 잘려 나갔다.
아르카는 빈사 상태나 다름없던 리에르에게 허용치 이상의 힘을 측정했다. 그는 다시 한번 경고음을 송출했다.
-Master의 생체 Energy는 지금의 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과부하에 주의 바랍니다.
등 뒤로 뻗어진 칠흑의 날개. 팽창되어 터질 것처럼 굵어지는 혈관.
리에르의 손길에 따라 움직이는 홀 블레이드가 아일의 몸을 관통한다.
촉수가 전부 잘려 나간 아일은 긴 팔을 이용해서 리에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전신을 베고 찢는 홀 블레이드의 공격 아래 걸레처럼 상처를 입었다.
아일은 청색의 날개를 바짝 세우고 주변의 기류를 끌어모았다. 수없이 많은 칠흑의 검날을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점차 바닥은 아일의 피로 홍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죽는다!’
아일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단어를 떠올리고 몸서리를 쳤다.
태어날 때부터 포스였고, 누군가에게 죽는다는 공포를 느낀 적은 없었다.
지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고, 불멸하는 육체로 재생을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도려내지는 자신의 살점들. 그리고 눈앞에 춤추는 칠흑의 검날이 피보라를 일으켰다.
‘난 놈을 이길 수 없어.’
한 번도 리에르를 이겨본 적이 없다. 예전에도 앞으로도.
아일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고 정신이 붕괴하여갔다.
기사들은 칠흑의 청년이 혼자서 괴물을 도륙하는 것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로선 힘겨웠던 괴물을 처리해주는 것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저 괴물이 쓰러지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엘빈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의 머릿속에도 페이서스에서의 악몽이 머릿속에 감돌았다.
-크아아악, 그만!
아일의 입에서 절규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리 재생력이 좋다지만 전해지는 통증은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일은 비명을 질렀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뒤편에 서서 압도적인 그의 힘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에르의 등 뒤로 펄럭이는 칠흑빛의 날개.
엘 파실드가 보여줬던 비극의 장면에서도 리에르는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부모의 얼굴. 칠흑의 안개를 소환하여 잔인하게 토막 내고, 씹어 먹히는 가족들.
에레사의 고운 뺨 위로 다시금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온갖 힘을 다해 싸우던 리에르의 모습과 학살을 벌이며 웃음을 그리던 그의 모습이 서로 대치한다.
에레사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고, 증오가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그러던 그녀의 눈 안으로 바닥에 떨어진, 검 한 자루가 보였다.
에레사는 피가 몰려오며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천천히 뻗어낸 그녀의 손안으로 검붉은 피가 말라붙은 검 한 자루가 쥐어진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을 아리게 만들었다.
-Master 당신의 힘은 위험합니다. 육체 한계 수치에 도달합니다.
아르카는 리에르의 몸이 위험해지는 것을 감지하고 경고음을 계속해서 송출했다.
리에르의 몸 안에 가둬지기엔 너무나 거대한 기운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쳤다.
그 힘을 제대로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릇은 깨어지고 부서진다.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간 채 아일은 거대한 몸뚱이를 바닥에 눕히고서 꿈틀거렸다.
그의 주변으로 진홍의 핏물이 호수처럼 자리 잡았다.
아일에게 허락된 것은 그저 고통스러운 신음뿐이었다.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 리에르가 아일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기사들은 누구 하나 나설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리에르의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리에르는 점차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몸 안의 모든 것이 팽창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비틀거리던 리에르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서 피를 토해냈다.
입과 코에서는 검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손은 피부의 겉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듯이 물집이 잡히기 시작한다.
리에르는 이를 사리 물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지독한 고통이 하필 지금 이 순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