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77)
레필리아 레소드-177화(177/398)
레필리아 레소드 177화
아버지의 뒷모습(6)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제물 삼겠단 거네.”
아르미안의 싸늘한 눈빛이 엘을 향했다.
엘 파실드는 그녀의 신랄한 목소리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미소했다.
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빛으로 만들어진 의자가 공중에서 소멸했다.
“아르미안, 그렇다면 인류는 사육당해야 살 수 있는가?”
눈부신 백색의 로브 자락을 이끌면서 엘이 걸어온다. 아르미안은 엘의 말에 대답 대신 검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곁에 있는 검은 아기들도 씩씩거리면서 이를 드러냈다. 마치 언제든지 엘을 피투성이로 만들겠다는 듯이.
“미치광이 신에게 조율 당하고, 그의 유희를 위해서 죽어야 하고.”
엘은 고개를 흔들면서 씁쓸한 웃음을 흘려냈다.
신의 뜻대로 라는 태평한 기도.
인간은 나약해지고 정말 힘이 들 때 신이라는 절대자에게 기도한다.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는 그에게 자신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며, 몸과 마음을 바치려 한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연인을 만나는 것도 결혼하는 것도,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도, 생업을 갖고 먹고 마시는 것도 전부 타인에게 묻는다.
이 얼마나 우스운가.
“유일신이 원하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해야 하고, 또 유일신의 기분에 따라서 어떤 인간은 행복할 권리를 누린다라……. 아르미안, 당신은 그 시스템이 옳다고 자부하는가?”
엘이 똑바로 그녀를 주시하며 걸어온다. 검은 아기가 참지 못하고 칠흑의 날개를 펼치면서 달려들었다.
엘은 가볍게 손을 저어 보였다. 검은 아기의 주변에 금빛의 창살들이 빛을 발하며 새장 같은 감옥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검은 아기는 “이게 뭐야!” 소리치면서 엘 파실드가 만든 창살을 양손으로 잡아 틀었다.
“틀려. 그분은 만인에게 공평하시지.”
“그렇다면 포스라는 것은 뭐지?”
엘 파실드는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다. 아르미안이 답하는 것을 기다리기 전에 엘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음 짓는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포스라는 존재가 신의 창이자 신의 저주라고 말하지. 즉, 세상의 조율을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
엘 파실드는 오래전에 신에게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길, 빛의 계단에 올라서기 위해서 많은 피를 흘렸다.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고, 곁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잃었다.
그는 신을 만났다.
하지만 그가 아는 신이란 존재는 그곳에 없었다.
“리에르가 포스였을 때 아르미안, 당신은 어땠나? 슬펐나? 아니면 신에게 임무를 받은 것 같아 기뻤나?”
엘 파실드의 손이 로브를 걷어내고 올라와 아르미안의 어깨에 닿았다. 이제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져 있었다.
“리엘은 사명을 다했어.”
아르미안의 말에 엘은 하, 하는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지, 아르미안. 그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아르미안의 손이 올라갔다. 그녀의 손안에 쥐어진 투명한 검이 파공음을 일으켰다. 엘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미소를 지었다.
차가운 검날이 그의 목 끝에 닿아 서늘함을 전달한다.
엘은 움직이지 않았고, 아르미안도 베지 않았다.
처음 리에르와 있을 때는 아르미안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중에 예측하지 못한 리에르의 재능들이 밝혀지고, 포스의 기운을 느꼈다.
아르미안은 지독한 저주의 굴레, 아니, 신의 자비심 없는 결정에 눈물을 토해낼 것 같았다.
그리고 운명의 굴레를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르미안은 리에르를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각성시켰다.
가혹한 길을 걷게 된 리에르는 후에 세뇌가 풀리고 교단을 향해 공격했다.
아르미안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의 힘을 몰수하여 자신이 갖고, 그 죄업을 대신 소유한다.
리에르가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싶었다.
그가 사는 것을 선택하려 한다면 이제 이유가 생겼을 거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아르미안을 죽이고 힘을 되찾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집요한 집착일지도 몰랐다.
리에르의 머릿속에서 아르미안은 떠나지 않을 거다. 살기 위해서도, 죽기 위해서도 오로지 그녀만을 떠올려야 했다.
“아르미안, 네버 에이지…… 의 존재를 알고 있나?”
갑작스러운 엘의 물음에 아르미안은 눈썹을 찌푸렸다. 신이 만들어 낸 강대한 용족.
그것은 대륙에 존재하는 최강의 생명체였다.
“그는 내가 만들었어.”
“뭐?”
엘의 농담에 아르미안은 웃지도 않았다.
그는 농담을 즐기는 남자가 아니다. 또한, 불필요한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내 말에 궁금한 것이 두 가지 생겼겠지. 그중에 첫 번째는 유일신이 그것을 용인했는가. 그래, 녀석은 모든 걸 알고 있어. 즐거운 유희를 방해하고 싶지 않을 테니.”
“농담도 즐겼었어?”
아르미안의 힐난에 엘은 큭큭, 웃으면서 말했다.
“신의 가호로 가득한 당신들을 박살 내기 위해선 나에게도 무기가 필요했으니까. 유일신도 그것을 찬성했지. 그리고 두 번째 당신의 의문은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 가겠지?”
인간이 기도하는 유일신 테헤라자드는 수천, 수만 년을 살아온 대가로 희로애락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행복을 보면서 웃음 짓고, 인간의 불행을 보면서 눈물 흘렸던 자애로운 신은 이미 사라졌다.
어떨 때는 거대한 자연재해를, 또 어떨 때는 군주들을 미치게 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아무도 닿지 않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유희를 즐긴다.
엘은 아르미안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테헤라자드가 만든 또 하나의 신이 나라는 농담은 어떤가?”
엘 파실드는 빙긋 미소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르미안은 그녀답지 않게 발끈하며 검을 휘둘렀다.
엘은 가볍게 몸을 젖히며 날카로운 검격을 피해냈다. 아르미안의 곁에 있던 검은 아기도 엘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뛰어들었다.
엘은 검은 아기가 돌격해 오자 살짝 옆으로 몸을 돌려 피해냈다. 그리곤 손을 뻗어 검은 아기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황금색 빛줄기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검은 아기는 빛줄기에 감싼 채로 팔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리도 쭉쭉 자라났다.
곧 아기는 건장한 청년의 얼굴이 되었다.
검은 아기는 자신의 커다란 손을 들여다보며 어? 하는 표정으로 아르미안과 엘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리에르와 똑같이 생긴 전라의 청년은 엘이 다시 한번 손을 가져다 대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당신의 네 번째 포스, 아일 하사드는 패배한 것 같군.”
엘 파실드는 손을 툭툭 털어내면서 중얼거렸다. 아르미안은 그제야 아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단 것을 알았다.
포스를 잃는다면 아르미안이 엘을 막아낼 카드가 없어지게 된다. 아르미안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면서 엘은 쿡, 웃음을 참아내며 입가를 열었다.
“곧 아르빈트 원수가 올 건데 위험하지 않겠어?”
“말도 안 돼…… 아일, 그 바보가…….”
로이스타 아르빈트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줘도 아르미안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정말로 아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일 하사드가 다른 포스에 비해서 공격력이 약할지는 모르나, 재생 능력과 특수 능력에 대해선 최고였다.
“이미 균형은 깨어졌다, 아르미안. 신의 권능 아래 보호받던 엘프들은 이 세상에서 멸종하였다.”
엘의 말에 아르미안의 동공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이 동맹이라 생각하고 있던 네버 에이지를 창조한 것은 나다. 리즈에 의해 만들어진 왕국은 교단에게 패배하지 않을 거다. 내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아르미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질 않는다.
“당신은 리에르를 저주받을 운명에서 구하고 싶다는 안일한 생각이었나 본데. 네 덕분에 최강의 무기는 잘 가져가겠다.”
다정한 미소와는 다르게 너무나 냉혹한 눈빛이었다.
아르미안은 엘 파실드를 치기 위하여 천천히 포스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리에르가 소유했던 힘. 칠흑의 기운들이 아르미안의 등 뒤로 피어오른다. 엘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 손을 잡아.”
아르미안의 등 뒤로 칠흑의 기운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워 올랐다. 그것들은 곳곳에서 구체 형태로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으아앙, 하는 울음소리들을 퍼뜨렸다.
아르미안의 주변으로 시커먼 아기들이 초승달 눈을 일그러뜨리며 광폭한 모습을 지어 보인다.
“결국엔 당신도 유일신의 광대에 불과한 거냐.”
“당신 말이 많아.”
아르미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엘은 빙그레 미소로 답했다.
“생각해 봐. 사랑의 저주에 걸린 당신이야말로 유일신과 싸워야 할 사람이 아닌가?”
“시끄러워!”
아르미안은 다친 상처도 잊은 채 소리쳤다. 항상 냉정함을 가진 그녀로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아리아를 사랑했다. 그 대가로 날개를 잃고 어비스로 떨어졌다.”
인류 최초의 영웅 아리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아르미안은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현우라는 이계의 소년을 사랑했다. 그 대가로 몸을 잃었다.”
현우는 예전의 엘 파실드를 의미했다.
“리즈 지센라이드를 사랑했다. 그 대가로 이성을 잃었다.”
그로 인해 아르미안은 광기를 얻었다.
“리에르 아르빈트를 사랑했다. 거부하려 했겠지. 오랜만에 본 인간이, 봉인된 이후로 처음 본 인간이 설마 또 포스일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제발, 그만……!”
아르미안은 귀를 막았다. 그녀의 초점 없는 동공이 허공에 머물며 흔들렸다.
“사랑을 무조건 실패하는 저주에 걸린 당신에게 있어 손을 잡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생각해야 해.”
“아직도 당신에게 걸려 있는 속박은 여전하겠지?”
아르미안은 더 이상 엘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다.
엘 파실드는 매우 강력한 마법사였다. 하지만 지난 신과의 대전쟁에서 패한 그에게도 저주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코스모스의 교리를 따르는 이를 상대로는 포스를 발휘할 수 없었다.
즉, 말하자면 아르미안을 상대로 포스 없이 맨몸으로 싸워야 하는 처지였다.
아르미안은 엘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엘은 줄곧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슨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르미안은 망설였지만 검을 놓지는 않고 있었다. 오히려 이런 곳에서 그를 제거한다면 앞으로 있을 일도 전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아르미안의 뜻을 알아들었을까? 검은 아기들이 날갯짓을 펄럭이며 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엘은 부드럽게 손을 흔들어 가장 먼저 날아온 검은 아기를 붙들었다.
치지직!
황금빛이 번뜩이더니 엘의 손안에 잡힌 검은 아기는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투두둑!
떨어져 나가는 칠흑 깃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검은 아기는 백색으로 변했다.
백색 아기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검은 아기들을 향해 이를 드러내 보인다.
엘의 손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색이 뒤바뀌어 버리는 아기들은 흑과 백으로 나누어져 서로를 물어뜯으며 깃털을 퍼뜨렸다.
웃음 짓는 엘을 보면서 아르미안은 투명한 검신을 상대에게 찔러 들어갔다.
날카로운 검의 파공음.
엘은 그녀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공격을 받아들였다.
순백으로 일체감을 이룬 엘의 가슴에서부터 붉디붉은 혈화가 꽃피워지기 시작한다.
가슴을 시작으로 새하얀 로브가 물들어간다.
포스가 없어도 엘은 대륙 제일의 마법사다. 또한, 뛰어난 격투사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나 손쉽게 공격에 당했다.
아르미안은 공격에 성공하고도 오히려 의아함이 찾아 들었다.
푸쉭!
엘의 몸에 박힌 칼날이 뽑혔다. 엘은 비틀거리면서 벽에 등을 기댔다. 아르미안은 손끝에 전달된 감각이 진짜임을 느꼈다. 엘에게 쏟아지는 핏물도 가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