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8)
레필리아 레소드-18화(18/398)
레필리아 레소드 18화
하늘을 그리다(1)
예선전과 본선은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본선부터는 대회를 구경하려는 관객이 있었다.
카에르, 카이샤의 학생들은 전부 모였고, 미리 대회 우승자를 맞추기 위한 도박도 벌어졌다.
본선의 두 시합만 이기면 준결승이었다.
리에르가 대회에 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관중으로서였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참가자로서 오게 되었다.
‘이런 곳에서 내 검술을 보여준다고?’
리에르는 꽉 찬 관중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지루한 축사 연설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시합에 오르는 팀이 호명되기 시작하자 리에르는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지독한 긴장감 덕분에 앞도 캄캄하고 심장도 쿵쾅거렸다.
너무 긴장한 덕분에 지금 자신이 어떻게 걷고 있는지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 답지 않게 긴장하는 거야?
그녀가 빈정거리듯이 놀려왔다.
“긴장이라는 녀석도 내가 찾을지는 몰랐을걸요.”
리에르의 말에 아르미안은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지금 오른팔과 오른발이 같이 나가고 있었다. 그의 독특한 걸음에 아르미안은 웃겨서 죽으려고 했다.
-걱정하지 마. 저 많은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 위에서 한 사람만 상대하면 되는 거야.
“그렇겠죠. 기왕이면 내가 상대할 녀석이 검도 들 줄 모르는 멍청이면 좋겠는데.”
리에르는 경기장 위를 바라보았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두 사람이었다.
작년 검술대회 우승자였던 유트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평소 유트에게 호감을 품었던 여학생들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남자들은 인기 많은 유트를 질투하듯이 소심한 야유를 퍼부었다.
마찬가지로 유트에 이어 티미가 호명되었다. 사람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훈남.
흰 이를 드러내며 사람들에게 호응하는 티미는 누가 봐도 인기인이었다.
‘유트에게 콱 발려 버려라.’
집안도 좋고, 실력도 좋고, 사람도 좋고, 성적도 좋다.
뭐 하나 나무람이 없는 그이기에 더욱 불쾌하고 질투 났다.
두 사람은 검술대회 본선을 기념하는 검무를 추었다.
미리 약속된 합과 어우러진 경쾌한 음악은 관중들의 기대감을 한껏 치솟게 했다.
‘차라리 포기할까.’
리에르는 어차피 카이샤에 진학할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에레사에게는 다른 남자가 생겼고, 서로 잘 어울렸다.
‘그래, 지금이라도 나 대신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달라고 말해보자.’
웬만한 사람들은 자기보다 나을 거다. 유트는 우승할 확률을 높여서 좋고, 자신은 망신을 당할 확률을 줄여서 좋다.
‘사나이는 단호하게 결정하는 법.’
리에르는 자기 생각에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회 진행 사무실로 향했다.
-어디가?
퍽!
리에르는 자기 손으로 자기 뺨을 때리는 바보 같은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반신은 앞으로, 하반신은 뒷걸음질하는 우스꽝스러운 행동도 함께하고 있었다.
단, 이 모든 행동이 리에르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그녀에게 의도된 행동들이었다.
“상반신은 살려고 애쓰는데 하반신은 죽으려고 기를 쓰는구나…….”
리에르는 한숨을 쉬었고 아르미안은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넌 약하지 않아. 저 사람들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일 거야. 걱정하지 마.
리에르는 의심의 눈초리로 펜던트 형태의 그녀를 노려봤다.
“말하는 건 쉽지…….”
그러다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리에르는 씨익,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르미안, 우리 학교 근처에 대장간이 하나 생겼는데. 가슴과 구레나룻, 그리고 팔에 털이 그득한 아저씨가 있어요.”
-어머, 그래?
“만약 내가 시합에서 망신을 당하면 어떻게 할래요?”
-어떤 걸 원하는데?
리에르가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망신당하면 그 대장간에 아르미안 수선 맡겨 버리기라는 것으로 내기하는 게 어때요?”
-응, 그거 괜찮네.
리에르는 의외로 그녀가 쿨하게 말하자 자신감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리에르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자신은 검술대회 쪽으로 가려는데, 다리는 제멋대로 진행 사무실 쪽으로 가려 했다.
버티기 위해서 건물 기둥을 붙잡았지만, 다리는 여전히 사무실 쪽을 향했다.
“아르미안……?”
-거짓말해서 미안…….
그녀의 행동으로 리에르는 금방 자신감이 쪼그라들었다.
그 순간 리에르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불쾌했다. 불길했다.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무표정한 얼굴의 유이가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유이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그러고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리에르는 유이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
곧 유이가 들었던 엄지손가락을 땅바닥을 향해 돌려 보였다.
“오냐, 네 녀석부터 해치워 주마.”
“쯧, 멍청이.”
리에르는 가검을 뽑아 들었다.
유이도 기다렸다는 듯이 가검을 뽑았다.
두 사람은 서로 무기를 뽑아 든 채로 대치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생사를 건 승부가 지금 이 순간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때 경쾌한 소리가 터졌다.
딱! 딱!
“어휴, 어디 갔나 했더니 그새 유이 괴롭히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에레사는 리에르를 때렸고, 유트는 유이를 때렸다.
유트는 이제 막 오프닝 검무를 끝내서 땀으로 젖어 있었다.
목에 타월을 두른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정말 보기 싫은 남자였다.
“티미 선배, 고생했어요.”
에레사는 수줍은 소녀처럼 자신의 연인에게 다가갔다.
티미는 팔짱 낀 에레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지금 땀 냄새 날 건데.”
“그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에요? 전 좋아요.”
티미는 에레사의 말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쑥스러워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리에르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티미와 리에르가 눈이 마주쳤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에게 폭언을 퍼부은 것이 얼마 전이었다.
당장에라도 티미가 덤벼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리에르는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리에르의 생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티미는 무엇이 좋은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보였다.
“어젠 인사를 제대로 못 했지, 아르빈트 군.”
그는 어제의 일에 대해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런 일 따위는 전혀 떠올리지 않는다는 듯, 먼저 악수를 청해왔다.
리에르는 차마 두 번이나 악수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티미의 손을 받았다.
맞잡은 손이 묵직한 강인함을 전달한다.
에레사를 지키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크고 단단한 남자다운 느낌이었다.
“우리 에렌의 소꿉친구인데, 미리 인사를 해야 했는데. 미안하다, 아르빈트 군.”
“아니요…….”
리에르는 사과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일처럼 대놓고 비아냥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티미의 뒤에서 에레사는 어서 사과하라는 손짓 발짓을 해 보였다.
리에르는 그 모습을 애써 회피했다.
“나중에 시합에서 꼭 만났으면 좋겠구나.”
“그러길 바라죠.”
순순히 대답하고 물러서는 리에르의 모습에 에레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에르에게서 돌아선 티미는 유트를 향해서도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아무리 호인이라고 해도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티미는 유트가 카에르에 입학한 이래, 연전연패를 당해왔다.
덕분에 학교 최강이 아닌, 이인자라는 굴욕 어린 불명예를 떠안게 되었다.
“이번만큼은 절대 지지 않을 거다, 유트 로사리오.”
“그 대사는 작년에도 들었어요. 이번에도 좋은 시합 부탁드리죠.”
최강의 라이벌인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하하하, 그랬었나.”
티미는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유트와 서로 건투를 비는 악수를 하고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에레사를 데리고 팀 대기실로 들어갔다.
리에르는 에레사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오로지 자신만의 전유물이라 생각했었다.
지금 이 순간 리에르는 속이 쓰라렸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은 하고 있지만, 심장이 타는 듯이 아팠다.
표정은 감추어도 유트에게는 거짓 마음을 금세 들키고 만다.
유트는 리에르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치면서 미소 지었다.
“부숴.”
“엉……?”
“약한 네 마음도, 마음에 안 드는 연적도 부숴버려.”
구차한 미사여구도 다른 위로도 필요 없었다. 리에르는 피식 웃어 보이며 유트에게 대답했다.
“부수기엔 내 힘이 너무 달리지 않나?”
“그래서 내가 있는 거잖냐.”
유트는 손발 오그라드는 말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웃는 낯을 지우지 않은 채, 시합을 준비하기 위해 팔목 보호대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다리 보호대를 착용하는 유이는 여전히 리에르를 미운 벌레 보는 낯으로 아주 잘 들리게 중얼거렸다.
“제발 폐는 끼치지 말아주세요.”
“친구의 여동생만 아니었어도 매일같이 절벽이라고 놀려대며 괴롭힐 텐데…….”
“그런 말은 속으로 말해주면 안 될까?”
리에르의 말에 유이가 대번 도끼눈을 떴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한 유이의 모습에 리에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빈정거렸다.
“속으로만 말하면 상대가 화가 나지 않잖아.”
“…….”
유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그 모습을 보니 리에르는 묘하게 기분이 상쾌해졌다.
어쨌든 지금은 유이의 말마따나 유트에게 폐는 되지 말아야 했다.
강력한 우승 후보인 유트는 모든 이에게 견제를 받는 처지였다.
유트는 랭커와 한 팀을 이룰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맹목적인 우승보다 친구와 함께하는 것을 선택했다.
유트 남매는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장학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생계유지를 위해서는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장학금만으로는 두 사람이 살아가기는 힘들었다.
검술대회의 우승자에게 상금이 나온다.
지금까지 유트가 우승을 놓치지 않았던 것도, 이 상금을 위해서였다.
‘저 망할 은회색 꼬마 계집아이야 굶든지 말든지 상관없지만, 유트를 어렵게 만들 순 없어.’
리에르도 자리에 앉아 보호대를 착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스로 기합을 주듯이 끈을 꽉 동여매었다.
마치 자신의 약한 마음을 틀어잡으려는 듯이.
-갑자기 우리 리엘 군이 힘이 넘치는데?
아르미안의 놀리는 듯한 말투가 들려왔다.
“내 실력으로는 유트 녀석을 우승시키는 것은 어림도 없어요. 시합 중에도 저번처럼 조언 부탁드려요.”
-어머, 어머. 웬일로 투지가 넘치는 거야?
“제 얄팍한 이유보다는 더 중요한 이유가 걸려 있기 때문이죠.”
-유트랑 친하긴 친하구나.
“친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 녀석 하는 짓거리를 보면.”
리에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유이와 눈이 마주쳤다. 유이는 검지를 쭉 펴고 귀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아, 진짜 때리고 싶다.’
밉살스러운 유이와 또 한판 붙으려는데, 시합 개시 소리가 들려왔다.
유트는 마침 대기실 안으로 다시 돌아와서 리에르와 유이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너를 선봉으로 할 거야. 중견은 나, 그리고 후위는 유이가 맡아.”
“알았어.”
“하기야 원숭이를 제물로 바쳐야 시합이 잘 돌아갈 테니깐.”
유이는 커다란 눈동자를 앙증맞게 굴리면서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리에르도 유이의 눈동자 굴리기를 따라 했다. 하지만 곧 눈이 뒤틀리는 느낌에 고통스러워했다.
유이는 리에르의 사팔뜨기가 된 눈동자를 보며 혀를 내밀어 구역질 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가자!”
유트가 앞장서서 걸어가고 그 뒤를 리에르와 유이가 따라갔다.
수많은 관중이 유트의 등장과 함께 환호성으로 보답하고 있었다.
파에트 아르빈트 이후로 오랜만에 등장한 천재.
사람들은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환영했고, 영웅이 될 싹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잘 성장하고 있었다.
리에르는 관중들의 반응을 보니 새삼스럽게 유트의 대단함을 느꼈다.
상대 팀은 카에르의 학생들이 아닌 카이샤의 검술반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풍기는 분위기가 예선 따위와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