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81)
레필리아 레소드-181화(181/398)
레필리아 레소드 181화
내가 가야 할 길(3)
“하압.”
짧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리에르는 손안에 든 아르카를 휘둘렀다.
바람을 찢어내는 파공음, 그리고 손안에 묵직하게 만져지는 힐트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검의 궤도 역시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나왔다.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챙!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칠흑의 검과 두꺼운 검날을 가진 투 핸디드 소드가 부딪친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가진 마른 체형의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체격에 맞지도 않게 거대한 검은 일반 장검의 속도로 빠르게 베어 들어왔다.
그대로 정직하게 받는다면 방어에 밀려 몸통이 잘려 나갈 수도 있었다. 운이 따라준다 해도 무기를 놓칠 수도 있다.
리에르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면서 양손으로 아르카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제로 검식을 사용해서 상대의 공격을 흘렸다.
엘빈은 자신의 전력 베기 쉽게 막아내는 리에르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하지만 불만을 품고 있기는 일렀다.
그는 다시 검을 회수하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검의 간격을 맞췄다.
서로 검의 간격을 벌리고 마주하는 리에르와 엘빈, 두 사람을 보면서 검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남성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 사랑스러운 동생이랑 대무해 보는 것이 꿈이었는데.”
파에트는 낙심한 듯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리에르는 미소를, 엘빈은 으르렁거렸다.
“파에트 경, 직접 대련해 보면 사랑스럽단 말은 쏙 들어갈걸.”
엘빈은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지금 리에르는 포스의 힘이 없어도 자신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두고 주눅 들고,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였던 소년이 이제는 순수하게 검만으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아니, 무엇보다도 급한 일이라고 해서 왔더니 동생이랑 대련해 달라는 황당한 요청을 받았다.
엘빈은 파에트와 리에르 형제에게 신세가 진 것이 있으므로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곧 서른을 넘어가는 엘빈과는 체력이 다르니까.”
리에르는 하하, 웃으면서 기고만장한 웃음을 터뜨렸다. 엘빈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그레이트 소드를 고쳐 잡았다.
“팔검 기사 대장인 이 엘빈 트위아를 앞에 두고 거드름을 피울 정도라 이거구나.”
엘빈은 아까와는 다르게 매서운 돌진으로 투 핸디드 소드를 내려찍어 보였다. 리에르는 이크, 하는 소리를 내면서 옆으로 살짝 피해냈다.
마치 벼락 치는 소리처럼 투 핸디드 소드가 땅을 내려친다.
리에르는 가볍게 손을 움직여 검을 뻗어냈다.
크고 무거운 무기를 사용할수록 선회가 늦는다. 행동의 범위가 커지면, 반격을 받기 쉬웠다.
리에르는 빈틈투성이인 엘빈의 허리를 향해 아르카를 휘둘렀다.
엘빈은 그대로 어깨로 공격을 가했다.
갑작스러운 숄더 어택에 리에르가 공격에 실패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새 검을 회수한 엘빈이 재차 공격을 휘둘렀다. 그가 휘두르는 검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성난 엘빈의 저돌적인 공격에 리에르는 다급하게 아르카를 세웠다.
챙!
다시 서로의 검이 맞부딪쳤다.
파에트는 부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과 대련을 하고 싶었다. 물론 동생의 월등해진 실력을 보고 싶은 이유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리엘 녀석에게도 가문의 검술을 가르쳐야 하는데…….’
리에르는 아직 가문 검술을 사용할 줄 몰랐다. 그런 그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몸이 회복되는 대로 이 형이 알려주마.’
파에트의 상처는 그래도 깊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만 쉬면 회복될 수 있었다.
파에트는 몸이 낫는 대로 직접 동생에게 신검술을 전수할 생각이었다.
원래는 아버지가 직접 해야겠지만, 죄를 지은 리에르에게는 검술을 사사하지 않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헤어지게 된 동생을 애타게 찾았었다.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리에르가 건강한 모습으로, 게다가 장성한 것을 보게 되었다.
파에트는 그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리엘, 엘빈 경은 하단 공격에 약하다!”
“파에트 경, 이 자식아!”
당장에라도 씹어 먹을 듯이 바라보는 엘빈의 부릅뜬 눈빛. 그것을 보면서 파에트는 하하, 맑은 웃음을 지었다.
“넘버즈를 가진 기사가 약점 같은 것이 있으면 안 되지.”
“그러게.”
리에르와 파에트가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면서 씨익, 웃어 보인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엘빈은 씹어 먹을 듯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리더니 거칠게 달려들었다.
“어디!”
리에르의 발차기가 엘빈의 하단을 향해 날아들었다.
검을 내려치려던 엘빈은 예상외로 자세가 크게 기울어지며 공격 궤도가 틀어졌다.
가볍게 그것을 피해내며 리에르는 호오, 하는 웃음을 짓고는 아르카를 빙글빙글 돌렸다.
덕분에 수세였던 리에르는 반대로 엘빈을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파에트는 그런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어휴, 쟤는 상처 나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마침 훈련장을 찾아온 에레사가 눈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괜히 까불다가 상처가 터지지 말란 법은 없다.
에레사는 리에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창 대련을 하는 리에르의 표정이 밝았다.
그동안은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힘겨워 보였다. 가족과 재회하고서는 많이 활발해진 모습이었다.
에레사는 묘한 표정으로 리에르를 바라보며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연인, 혹은 친구의 등을 기대는 것도 좋겠지만, 가족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런 모습을 반가워해야 할지, 불쾌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리에르의 활달한 얼굴은 과거의 행복했던 나날을 떠올리게 하였다.
에레사는 파에트에게 음료를 넘겼다. 그는 고마움을 미소로 답하며 음료를 마셨다.
리에르와 마찬가지로 기뻐 보이는 파에트의 얼굴. 그것을 보면서 에레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빠는 말려야 할 사람이 부추기면 어떻게 해요?”
“말리는 건 네가 할 일이고, 도와주는 것은 내가 할 일이지.”
“하여간.”
파에트의 무성의한 대답에 에레사는 입술을 삐죽여 보였다.
칠흑의 검이 잔영을 뿌리며 움직인다. 엘빈이 투 핸디드 소드를 흔들며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하는 무식함을 선보였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훑으며 리에르와 엘빈은 웃어 보였다.
대륙 제일의 기사단 소속인 엘빈과 리에르는 대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리에르는 등골이 오싹오싹한 살기에 쾌락을 느꼈다.
두 사람의 대련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언제 끝날지를 모르게 서로 양상이 바뀌었다.
“부럽다…….”
파에트는 턱을 괴고서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루라도 검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는데 부상 덕분에 강제로 쉬게 되었다.
검술을 연마하는 것은 둘째 치고 검을 쥐는 것조차 금지라니. 그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글쎄요, 이 추운 날에 저렇게 땀 흘리다간 감기 걸린다고요.”
에레사의 뚱한 얼굴을 흘깃 바라보던 파에트가 피식, 웃었다.
“여전하구나, 멋대가리 없는 동생 곁에 있는 것은.”
“오빠야말로 이성보다 동생을 챙기는 위험한 행동은 그만하시죠.”
부드러운 이미지였던 에레사의 말투가 묘하게 가시 서린 것을 느끼고 파에트는 눈가에 웃음을 그렸다.
철부지 어린아이였던 장난꾸러기 동생, 그리고 그의 곁을 함께하던 금발 머리의 조숙한 소녀.
큰 눈망울을 굴리며 홍시처럼 붉어진 얼굴로 인사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파에트는 쿡쿡, 입가에 웃음을 걸었다.
“왜 그래요?”
“아니, 아니. 그냥 옛날에 너와 리엘의 모습이 떠올라서.”
항상 토닥거리며 싸우기만 하던 두 아이가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제법 잘 어울렸다.
파에트는 왠지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파에트에게는 신기하게만 느껴졌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끈끈한 인연을 보이는 소꿉친구는 묘한 로맨스마저 느껴진다.
“잘 컸죠?”
“누구?”
에레사는 빙긋 웃어 보이며 리에르를 검지를 들어 가리켰다. 그리곤 손가락을 돌려 자신을 가리킨다.
파에트는 이마를 긁적였다.
“리엘이 널 감당하기 어려울 듯 보인다.”
“아르빈트 남자는 원래 여자에게 약하지 않아요?”
에레사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겉으로는 리에르가 에레사를 괴롭히고 심술을 부렸다.
하지만 그녀가 눈물이라도 뚝뚝 흘리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설설 기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에레사가 어떤 말을 해도 리에르는 거절하지 못하고 응할 남자였다.
“할 말 없게 만드는걸.”
“오빠도 그래요?”
“나?”
파에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에게는 꼼짝 못 한다. 대외적으로는 그렇지 않아 보이지만.
피는 어디 가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되었다.
왠지 순진무구하게만 보였던 에레사가 여우처럼 느껴졌다. 파에트는 쓴웃음을 머금어 보였다.
“대륙에 명성 높은 기사 가문이 애처가 집안이라니. 재미있는 스캔들 아니에요?”
에레사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지, 파에트는 하하,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무릎을 쳤다.
“아버지와 리에르는 그럴지 몰라도 난 아냐. 그분은 왕녀 전하일 뿐이니까.”
어머니 라일라를 대하는 아버지 로이스타. 소꿉친구 에레사를 대하는 리에르.
하지만 왕녀 제이미를 대하는 기사 파에트는 격이 다른 이야기였다.
“생각보다 꽉 막혔네요, 파엘 오빠는.”
“난 그저 기사일 뿐이야. 그녀와는 맞지 않아.”
파에트가 손사래를 치면서 입을 열자 에레사는 코끝을 찡그리며 어휴, 하는 소릴 내어 보인다.
정말이지 요령 없고 쓸데없는 곳에서 진부한 것은 형제가 똑같이 판박이였다.
“왕녀 전하가 파엘 오빠가 첫사랑이란 이야긴 저도 알고 있는 걸요.”
이미 라일라를 통해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파에트는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음료로 입을 축였다.
“네 첫사랑도 나였을걸?”
“네?”
에레사는 갑작스러운 파에트의 말에 내심 당황했다.
사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에는 파에트만 정신없이 바라봤던 때가 있었다.
파에트는 싱긋 웃어 보였다. 잘생긴 외모에 성격까지 좋다. 더군다나 능력까지 있으니 금상첨화.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어떻게 알아요?”
“지금은 리에르를 좋아하잖아.”
“…….”
에레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애정과 증오가 뒤섞인 묘한 감정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뭐가요?”
“제이미, 아니, 왕녀 전하 역시 마찬가지니까.”
“네?”
에레사는 파에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더 한참 떠들 것 같았던 에레사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에레사도 대충은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예전에 리에르의 집에 잠시 신세를 졌던 예쁘장한 남자아이. 그 아이가 사실은 남장한 영주의 딸이고, 리에르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왜?’
에레사는 의문이 생겼다.
어차피 약혼이라고 해도 어른들이 잠시 정했던 약속이다. 그리고 약속을 했던 왕은 이미 죽었다. 더군다나 리에르는 지금 중범죄자의 신분이다. 그러니 왕녀와 로맨스 같은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아니, 그 이전에 왕녀가 리에르를 좋아할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신경 쓰지 마.”
“네? 뭐가요?”
“그래 봤자 티 나거든.”
파에트의 말에 에레사가 뾰로통한 반응을 보였다.
“신경 쓸 필요 없을 거야. 어차피 리에르는 단순해서 너 이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을 테니까.”
파에트가 놀리듯이 말했다. 에레사는 한창 검술 대련에 열중하는 리에르를 흘낏 바라봤다.
에레사 역시 리에르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시커먼 암흑 속에서 유일한 안식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가족을 잃은 그녀가 유일하게 있을 수 있는 곳, 그리고 유일하게 증오해야 하는 곳.
리에르의 웃는 얼굴을 보면 가슴이 뛰도록 기뻤다.
그와 동시에 미움도 서렸다.
리에르의 슬픈 얼굴을 보면 똑같이 슬퍼졌다. 연민의 감정이 찾아오면 심장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책임지지 못할 말 하지 마세요.”
에레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