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82)
레필리아 레소드-182화(182/398)
레필리아 레소드 182화
내가 가야 할 길(4)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 터지는 전투를 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집에서 지내는 시간은 평화로웠다.
아르빈트 가의 차남이 저택에 있다는 것은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되었다.
사용인들의 입에는 단단한 자물쇠가 채워졌고, 불필요한 외부인의 방문도 사전에 차단됐다.
리에르가 저택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그는 당연한 일과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의 부지런함에 가장 놀란 것은 라일라였다.
최강의 잠꾸러기라고 생각했던 리에르가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고, 누구보다 늦게 잠들었다.
리에르는 선잠을 자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항상 사선 속에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었다.
훈련을 위해 손에 천을 감는다. 그리고 가죽 안감을 댄 건틀렛을 꼈다.
리에르는 본능적으로 엘 파실드를 경계했다. 그의 과도한 친절. 그리고 아름다운 웃음마저 독사처럼 느껴졌다.
신뢰할 수 없다.
에레사에게 왜 그런 말을 해서 사이를 갈라놓았는지 의심이 되었다.
‘지금은 몸을 최대한 단련시켜 놓는 방법밖에 없어.’
언제 또 전투가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최대한 몸을 단련시켜 놔서 조금이라도 강해져야 했다.
리에르는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식사했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일상이지만, 리에르에게 있어서는 꿈에 그리던 일상이었다.
저택에 사는 사용인도 처음엔 적혈의 악마, 리에르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무리 아르빈트 가문에 소속된 사람들이라지만, 상대는 소문의 그 괴물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리에르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말수가 적고, 훈련만 반복하는 리에르는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 정말 부지런하세요.”
엘리라는 이름을 가진 하녀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귀여운 눈매를 가진 그녀는 사용인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여성이었다.
“도련님이란 말은 좀…….”
리에르는 생전 듣지도 못했던 단어에 귓불까지 빨개지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 속에서 삶과 죽음을 오가던 자신이 이렇게 편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조차 신기했다. 그런데 이제는 민망한 호칭까지 듣고 있었다.
전혀 적응되지 않았다.
만약에 이런 광경을 유이가 보고 있다면 어떨까?
리에르는 유이가 노골적으로 놀리는 표정이 떠올랐다. 생각도 하기 싫어서 고개를 저어 생각을 날렸다.
왠지 모르게 유이의 독설이 그립게 느껴질 정도로 평안한 나날이었다.
유이는 보나 마나 왕성에서 소설이나 읽으면서 키득거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소녀다운 모습은 어울리지도 않았다.
유트도 걱정이 되었다. 지금쯤 교단과 전면전에 나서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리즈가 같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되었다.
친구로서 유트와 함께 전장에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페리안과 아렌의 동맹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편안하고 즐거웠지만, 동맹 건이 진행되지 않는 것 같아 걱정되었다.
어차피 아렌의 왕인 제이미도 마치 집 인양 아르빈트 가문을 수시로 들락날락하니 동맹 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인 것은 아버지 로이스타였다. 어렸을 적부터 대하기가 어려웠던 아버지.
돌아온 이후 아버지와 대화도 하지 못했고, 걸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워낙에 무뚝뚝한 아버지는 말이 없는 편이었다. 주눅이 든 리에르는 아버지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였다.
아무리 제이미와 예전에 안면이 있어도 대죄인인 리에르가 그녀를 독대할 수 있을 리 없다.
리에르는 괜히 자신 때문에 동맹할 수 없는 것은 아닐지 걱정했다.
“그런데 괜히 나 때문에 곤란한 거 아니야?”
리에르는 엘리라는 하녀에게 물었다.
리에르는 저택에서 가장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훈련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그런데 항상 리에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녀가 준비한 새 붕대와 타올이었다.
“도련님 담당은 저니까 괜찮아요.”
리에르는 자신을 두려워하던 다른 하녀를 떠올렸다.
아마도 신입인 그녀가 억지로 떠맡게 되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리에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되도록 그녀에게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지독하게 얼굴을 따지는 엘리는 스스로 리에르의 담당이 되겠다고 시녀장에게 뇌물까지 바쳤다.
시내에서 인기 높은 디자이너가 만든 구두였다. 아끼는 물건이지만 이 정도 뇌물은 바쳐야 했다.
“그러니까 저언혀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돼요! 담당이 생기면 특별 보수도 받으니까 얼마든지 혹사해도 된답니다!”
양팔을 들어 올려 보이며 콧김을 내뿜는 그녀를 보고서 리에르가 피식 웃었다.
항상 기운차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생기발랄하게 느껴진다.
페이서스에서 함께했던 에레사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 듯해서, 왠지 모를 그리움마저 느껴진다.
“계속 옆에 있지 않아도 되니까 쉬는 시간엔 쉬어.”
“어머,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어차피 휴식을 취하고 있어 봤자 언니들 수다에 녹초가 될 지경이고, 재미있는 일도 없는걸요.”
눈빛을 반짝이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리에르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곳이 더 재미없게 느낄 건데.”
칠흑으로 빛나는 아르카를 들어 허공에 한 번 휘두르자 서슬 퍼런 공기의 비명이 귓가를 간질인다.
“혹시 검술에 관심이 깊다거나?”
“설마요.”
붙임성은 좋지만 참 이상한 여자였다.
리에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칠흑의 검, 아르카를 들고 천천히 공기를 베어나간다.
전혀 검술에 관심 없다면서 매일 같이 와 있는 것은 분명히 이상했다. 누군가의 명령으로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겨우 검술 연습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서 자신이 어떻게 되리란 것은 없다.
리에르는 엘리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뻗어내고 회수한다.
-저 암컷도 Master에게 Flag가 꼽혔습니다.
아르카의 생뚱맞은 소리에 리에르는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넌 또 심심하냐?”
-생각해 봅니다. 인간 암컷이 이 정도로 달라붙는 것은 자신을 알리고 싶은 것을 왜 모릅니다?
“네가 뭘 알아.”
-너보단 압니다.
아르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적혈의 악마다. 그리고 아르빈트 가문의 숨겨진 차남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여자의 관심은 딱 거기까지다.
리에르의 시야에 들어오는 엘리란 하녀는 그 정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쁜 남자인 겁니다.
“시끄러워, 고철.”
엘리는 리에르가 평소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를 때의 리에르는 주변의 공기를 얼어 붙이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는 검술에는 관심이 없었다.
검술은 사람을 더 편리하게 죽이기 위한 기술이다. 그런 야만스러운 기술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엘리는 검술에 관해선 무지했지만, 칠흑의 잔영을 수놓으며 움직이는 리에르의 모습은 좋았다.
잘생긴 남자가 만들어내는 검술은 몽환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런 것도 보상 측에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즉, 오로지 그녀만 차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엘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것이 운명이란 건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두 사람.
기사와 하녀의 신분에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의 사랑을 느낀다.
그런 비극은 오히려 성취감과 만족감을 준다.
-해당 암컷이 발정 나고 있습니다. 주의 바랍니다.
“적당히 해라, 고철덩이. 대장간에 맡기는 수가 있다.”
-짝짓기하기 좋은 타이밍인 겁니다.
아르카가 말하는 것은 대다수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걸 잘 아는 리에르는 애써 무시했다.
항상 오던 엘빈도 업무가 바빠서인지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음험하고 시커먼 속을 가진 거로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리에르와의 대련을 순수하게 즐기고 있었다.
오늘은 그런 엘빈도, 항상 응원해 주던 파에트도 없었다.
그 덕분에 오늘은 혼자서 검을 연마하고 있었다.
직선으로 찔러 들어가는 아르카, 검의 날을 비틀어 횡으로 그어내며 움직이는 칠흑의 잔영. 몸을 숙이며 긴 다리를 뻗어내며 검날을 쳐올린다.
기분 좋은 콧날의 바람, 귓가를 시원하게 적시는 파공음. 손목에 감기는 소매의 끝자락. 반복할수록 점점 빨라지고 점점 느껴진다.
리에르는 이전에 입었던 상처들이 거의 회복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검을 들고 대련과 검무를 출 때 근육을 뒤틀던 통증들은 이제 사라지고 기분 좋은 몸의 뒤틀림만 전해진다.
새롭게 각성한 포스로 긴장이 역력했던 기사들, 그리고 무엇보다 폭주하여 마을을 궤멸시켰던 당사자인 리에르는 내심 말하진 않았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각성한 이후 더 이상 몸에 변화는 없었다.
전투에 대한 짜릿함으로 이성이 마비되는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머리가 맑아진 듯이 개운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몸의 상태가 조금 호전되었다는 것 이외에 달라진 건 없었다.
‘리테 엘 파티시아.’
리에르는 그 생소한 이름을 읊조려 보였다. 순수하게 엘의 마력으로 가공된 마력 회복제. 처음 엘을 만날 때 건네받은 앰플.
‘하지만…….’
리에르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만능의 회복제, 그렇게 편리한 이야기가 존재할 리가 없다.
분명 엘에게는 리에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이미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엘이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괴물과 불과 몇 십 년을 살아온 애송이가 같은 수준일 리 없었다.
리에르는 품에서 앰플 한 개를 꺼냈다. 엘에게 이번에 받은 열 개와 기존에 받은 것을 포함해서 열넷의 앰플이 있었다.
앰플의 각도를 비틀고 빛을 반사하면 안에 들어가 있는 용액이 노란색에서 청록색으로 바뀌었다. 언뜻 보면 보석이 보여주는 반사광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건 뭔가요, 도련님?”
“멸종된 약재로 만들어진 귀한 영양제 정도겠지.”
“네?”
엘리는 리에르의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며칠 전에 멸종된 소재. 그 말을 듣는 순간 리에르는 불길함을 느꼈다.
광전사의 사건이 있었을 때, 상처를 입은 유트와 리에르는 엘프 여성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기적의 힘을 선보이는 엘프. 그 혈액이 가지는 가치는 매우 희귀했다. 맛은 분명 틀렸다. 하지만 혀끝에 감도는 액체의 반응은 비슷했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리에르로서는 앰플에 대한 의심이 한도 끝도 없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지금 이 약품 말고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
엘프 모자를 님 바르시아에 데려다준 것도 얼마 안 된 일이었다. 분명 며칠 전에 멸종이 되었다고 했으니 그리 쉽게 일이 진행될 리도 없었다.
리에르는 불필요한 생각을 털어버리며 다시 검을 잡았다.
엘리는 다시 시작된 리에르의 훈련을 보고 눈빛을 반짝이며 양손을 포갰다.
파에트 아르빈트라면 워낙에 점찍은 사람이 많아서 경쟁이 심했다. 하지만 차남 리에르 아르빈트라면 달랐다.
죄인의 신분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봤을 때는 금방이라도 사면될 가능성도 있다.
잘하면 그녀가 꿈꾸었던 순정 소설 이야기처럼 진행될 수도 있었다.
‘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저 팔이 내 몸을 안아준다면……!’
망상에 젖어 있던 엘리는 훈련장 안으로 누군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시야 안으로 탐스러운 금발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걸어온다.
엘리가 노리고 있는 아르빈트 가의 차남과 소꿉친구라는 여자. 라일라 부인과 꽤 친분이 있어 보였다.
유일한 라이벌의 등장에 엘리는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차피 해볼 만했다. 에레사는 제법 미인이긴 하지만 평민의 신분이다. 자신이 절대 빠지지 않았다.
엘리는 이제 자리에 일어나서 치맛자락을 붙잡고서 가볍게 무릎을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가주님.”
일반인들은 감히 곁에 다가갈 수도, 얼굴을 바라보는 것도 어려운 아렌 왕국의 대원수.
대륙 최고의 기사라고 불리는 아르빈트 가의 가주인 로이스타가 에레사의 뒤쪽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커트시를 받은 로이스타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들어오자 훈련장 안의 공기마저 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리에르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아버지의 모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