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86)
레필리아 레소드-186화(186/398)
레필리아 레소드 186화
아키서스 전쟁(2)
“상대는 황제의 군사 빅스터입니다. 당연한 예측이겠죠. 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50기의 기사로 3백의 병력을 상대할 순 없었다. 그런데도 리즈는 자신에 찬 얼굴이었다.
“너무나 소중한 군량 부대니까 자신이 낼 수 있는 강한 카드를 내셨겠죠. 그 강한 카드가 제 손에 잡히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려는 것뿐이에요.”
루비빛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눈웃음을 그려낸다. 그의 곁에 있는 부관은 싸늘한 살기를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설마, 직접 나서시는 겁니까…….”
최강이라고 불리는 힘을 소유하는 포스.
그중에 두 번째 각성자인 리즈는 페리안 왕국을 만든 이후, 단 한 번도 포스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었다.
“직접 나서야 할 겁니다. 모두 자리를 피해주세요.”
붉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리즈는 고혹적인 눈동자로 자신의 부관을 내려다보았다.
“아군도 죽일지 모르니까요.”
부관은 뛰어난 기사는 아니었지만, 검술을 훈련하였고, 많은 전투를 겪었다. 그래서 공포를 조절하는 방법을 알았다.
하지만 리즈가 보여주는 살기는 부관을 비롯한 기사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리즈는 붉은빛 망토를 펼쳐 보이며 천천히 교단의 수송단을 향해 손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교향곡을 지휘하듯 우아하게 펼쳐진 그의 손길을 따라 허공에 붉은빛의 룬 문자가 생성되었다.
리즈의 매혹적인 입술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움직인다.
“스톤 웨이브(Stone Wave).”
수풀과 나무가 뿌리 깊게 박고 있던 땅이 터질 것처럼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마치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크고 작게 꿈틀거리며 교단의 수송대를 파도처럼 덮쳤다.
갑작스러운 재해에 교단 수송대는 너나 할 것 없이 밀려드는 흙더미 속에 파묻혔다.
넘어진 거목들 덕분에 말이 깔리고 수송 마차들이 밀려난다.
우왕좌왕하는 적군을 보면서 리즈는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리즈가 만들어낸 작품을 보고서 50명의 기습대는 멍한 얼굴을 짓다가 급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도망치는 적들만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리즈는 그렇게 여유로운 말을 남기고는 혼자서 적진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입에선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시동어가 읊어지기 시작했다.
“이레이저(Eraser).”
리즈는 앞으로 뻗어낸 손을 옆으로 그어 내렸다. 시동어와 동시에 생성된 붉은 빛줄기들은 쐐에엑, 허공을 갈라내면서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붉은빛을 직통으로 얻어맞은 교단 기사들은 섬뜩한 비명을 토해내면서 부서져 나갔다.
정예병들은 참혹한 광경에 자신들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검에 베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죽음이었다.
검에 베이는 것도, 화살에 몸이 꿰뚫린 것도 아니라 그저 말 몇 마디, 손짓 몇 번으로 많은 생명이 참혹하게 죽어갔다.
전투를 위해서 평생을 갈고 닦아왔던 힘은 이 순간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조금 전의 소란으로 지휘관이 죽었는지 수송대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거…… 정말 우리는 아무 필요 없을지도 몰라.”
처음엔 리즈의 말에 긴가민가했던 정예병들도 적이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쾌감. 귓가를 때리는 비명. 쪼개지고 잘려 나가는 사람들의 신체 조각을 보면서 리즈는 루비빛 눈동자를 번뜩였다.
거친 심장은 미친 듯이 혈관을 팽창시킨다. 야릇한 설렘과 잠시간 잊혔던 목마름이 미친 듯이 유혹한다.
그때였다.
리즈의 루비색 시야 안으로 양손검을 든 존재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정확하게 빠른 속도로 찾아온 금발의 남성을 보고 리즈는 조소했다.
자신의 예상대로 빅스터가 남긴 카드가 있었다.
“마법사냐?”
레이루나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뿌리는 양손검을 들어 올렸다.
리즈는 대답 대신 손에 남은 마력의 기운을 허공에 털어냈다.
“이레이저.”
붉은 빛줄기가 리즈의 전면에서 터져 나왔다.
쾅!
굉음과 함께 흙먼지와 낙엽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내렸다. 그 속을 뚫고 나오는 금발의 사내는 빛나는 양손검을 휘둘렀다.
리즈는 뒤로 멀찍이 물러나면서 차가운 한기를 피해낸다.
붕, 하는 호쾌한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잘려 나간다. 그것을 보고 리즈는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과연.”
마법사지만 검술에도 조예가 깊은 리즈를 상대로 옷자락을 베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상대는 무거운 양손검을 들고도 공격이 매우 빨랐다.
리즈의 예상대로 교단 측에서 강력한 카드 한 장을 보내왔음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던 결과를 끌어낸 것에 대해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네가 페리안 최강이냐?”
금발의 남성이 이를 드러내며 만면에 웃음을 지어 올렸다.
상대의 말에 리즈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포스 오브 머더러, 아직 많은 대륙의 전사들에게 공포를 불러들이는 호칭이자, 죽음을 부르는 이름이다.
“최강?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포스냐?”
“네?”
리즈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상대는 자신이 포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설렘, 이 쾌감, 넌 내 사냥감이야.”
리즈의 웃음이 순간 멈추었다.
포스로서 각성한 이래 단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리즈는 어처구니없음을 느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금발의 남성은 다른 사람도 아닌 포스 오브 머더러를 사냥하겠다고 말하였다.
“그것참…… 흥미로운 견해군요.”
리즈의 눈동자가 붉디붉은 진홍의 루비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그의 등 뒤로 펄럭이는 망토와 함께 붉은빛의 깃털들이 하나둘씩 흩뿌려졌다.
“이제야 진짜 강자와 붙을 수 있어.”
금발의 남성은 격앙된 눈동자를 열며 흥분으로 목소리가 떨려왔다.
순수한 아이처럼, 전투를 앞두고 기뻐하는 사내를 보며 리즈는 붉은 입술로 미소를 그렸다.
“울게 될지도 몰라요.”
“내 이빨에 물어 뜯기지나 마시지.”
웃음을 터뜨리며 달려드는 금발의 사내를 향하여 리즈는 캐스팅을 시작하였다.
“파공 안에 이르는 내 눈 안의 진자여…….”
금발의 사내는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듯 양손검을 길게 뻗어냈다.
리즈는 날아드는 양손검을 가볍게 피해내며 계속 입술을 열었다.
“내 눈 안에 감도는 존재, 내 앞에 이르는 존재를.”
금발의 남성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선회로 검을 재차 뻗어내었다.
일반적인 기사의 전투였다면 이미 처음 공격에 끝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인간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진 존재. 그중에 살인할 권리를 가진 머더러였다.
“파멸시켜 주소서.”
금발의 사내는 리즈를 베어내려던 양손검이 무언가에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리즈의 등 뒤로 펄럭이는 날개가 보인다.
펑, 퍼펑!
폭발음이 연달아 울리며 금발의 남성은 양손검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그는 손끝에서 전해지는 무거운 느낌과 함께 뒤로 밀려났다.
금발의 남성은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젠 자신의 차례라는 듯이 양손검을 힘껏 잡는다.
그가 다시 돌진하자, 리즈는 가볍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마나를 끌어모은다.
붕!
다시 들어도 무시무시한 검풍이 일었다.
그것을 피해 넘기며 손안에 마나를 끌어모은 리즈는 뺨에서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주르륵.
검풍에 베어진 뺨에서 진득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의문의 사내는 휘둘렀던 양손검을 다시 회수하고서 재차 공격을 이어갔다.
* * *
리즈의 수송 약탈 부대와는 따로, 유트 왕이 직접 운영하는 기습 부대가 같은 시간대에 출정을 시작하였다.
기습을 알리는 어지러운 종소리. 급한 전갈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난 빅스터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짧은 시간에 왕국을 건설하고 무력과 지략을 동시에 지녔다는 리즈에 대해 경계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전략가여도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가 수송대를 공격하리란 것은 알고 있었다.
레이루나가 비록 포스를 상대로 이기진 못하더라도 쉽게 목숨을 내어줄 남자도 아니었다.
빅스터는 오랜 시간 전장에서 생활했지만, 레이루나만 한 용장을 보지 못했다.
이 전쟁터에서 레이루나가 움직이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강한 녀석과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는 어차피 독실한 교단의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아르미안을 따라온 용병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대의명분에 연연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레이루나를 사지에 몰은 것과 같았다. 빅스터는 레이루나가 죽지 않을 거란 것을 알고 있다.
리즈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레이루나는 죽지 않는다.
그가 눈치채면 시간이 다급해져서 더 이상 전투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바깥 날씨가 쌀쌀하기에 빅스터는 겉옷을 걸쳐 입었다. 그러고는 바깥에 있는 부하에게 입을 열었다.
“총대장께선 무얼 하시는가?”
“저기, 그게…….”
빅스터는 괜한 것을 물었나 싶어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크우드 가문과 나이브만 가문은 오랜 시간 주종 관계였다.
그렇기에 빅스터는 아크우드 가문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티미 아크우드의 윗선에선 정말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나이브만 가문은 그를 지탱해 줄 수 있는 든든한 학자들이 다수 태어났다.
그로 인해 오트리아 제국의 황금기를 불러온 적도 있었고, 명문가로서 이름도 날리게 되었다.
하지만 티미의 아버지 대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명맥은 이제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티미는 교만했으며 태생이 게을렀다.
대인 관계는 좋았으나 그것은 전부 그가 가진 권력과 계급에 의한 것이다. 만지면 아스러질 모래성과도 같았다.
티미는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썩고 문드러져, 이제는 눈에 볼 수도 없게 되었다.
남의 머리 위에 앉는 것을 당연시 생각하는 그는 군율의 모범이 되어야 함에 불구하고 실수한 장수가 지인이란 이유만으로 벌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군율을 지켜야 한다고 주창한 빅스터를 향해 로토가 원한을 갖게 했다.
전장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회의해도 모자를 시간에 밤만 되면 이성과 물고 빠는 데만 집중했다.
그 행태는 스물 중반을 넘긴 젊은 지휘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구역질나기 그지없었기에 빅스터는 미간에 주름을 잡아 보았다.
“어차피 총대장께서 나서실 일도 아닐 겁니다. 적의 기습 병력은 유트 왕의 근위 기사 셋 중의 하나일 터. 그자만 포획하면 될 겁니다.”
야밤인 와중에도 옷가지를 정돈하며 빅스터는 막사의 문을 젖혔다. 부복하고 있는 부하는 말끝을 흐리면서 말했다.
“그게…… 기습 부대를 이끄는 것은 유트 페브리안 본인인 것 같습니다.”
“네?”
빅스터는 부하의 난데없는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분명히 부하의 보고가 잘못된 것으로 생각했다.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보고였다.
가장 함정에 빠지기 쉽고, 가장 위험하기 쉬운 것은 전면에 서는 부대다.
대군이 기다리고 있는 적군을 향해 기습하는 부대는 당연히 가장 위험하다.
그런 부대에 왕이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기습이 말 그대로의 기습이라면 문제가 없다.
빅스터는 적의 게릴라 공격을 막아내려고 일부러 부대별로 나뉘어서 경계를 세우고 있었다.
인원이 적은 부대라면 좋지 않은 방식이겠지만 교단군은 페리안보다 다섯 배 이상 많은 병력을 소유하고 있다.
철저하게 기습에 대비된 것을 봤다면 기수를 돌려야 정상이다. 그런데 왕이 직접 온다는 것은 무모한 결정이었다.
빅스터는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모습에 부하는 얼이 나간 표정으로 올려다보았고 빅스터는 손짓을 해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별건 아닙니다. 한 번 가보도록 하죠……. 정말로 유트 왕이 직접 왔다면 이 전쟁 생각보다 쉽게 끝나겠군요.”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단 말인가. 빅스터는 리즈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려야만 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군주가 바보라면 어쩔 수 없다.
빅스터도 지금 주군으로 모시는 티미 때문에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리즈는 좀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리석은 군주를 말리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부하들을 따라서 서둘러 간 병기고는 이미 한창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역시나 소규모 부대를 운영할 수밖에 없는 유트군의 기습 부대는 다수의 방어 부대에게 힘에서 밀렸다.
그 와중에 빅스터는 밤중에도 보이는 은발 청년을 발견했다.
야밤이라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유트 페브리안 본인이었다.
번개같이 빠른 쌍수를 들고서 선두에서 싸우는 인물은 기습 부대에게 후퇴를 명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