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90)
레필리아 레소드-190화(190/398)
레필리아 레소드 190화
아키서스 전쟁(6)
같은 시각 치열한 전쟁터를 빠져나온 레이루나의 정예병들이 평화로운 왕성을 향하여 진군해 오고 있었다.
힘없이 관문을 열어젖힌 수비대를 짓밟고서 전진하는 금발의 남성이 킥,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100기의 정예 기사들은 벌써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렀음에도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친 기색 없이 묵묵히 살육하는 그들을 보면서 레이루나는 가늘게 눈을 열면서 실소를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괴물들.
레이루나 자신에게 비할 바는 못하지만 한 명, 한 명의 강력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나가는 관문마다 피보라를 일으키는 레이루나의 기사들은 비극을 일으키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아리아력 799년도 마지막을 장식하는 큰 전투.
훗날의 역사가들은 교단군과 페리안 군.
양 군의 머리 역할을 하는 빅스터와 리즈의 대결로 대전이 끝났다고 기재하였다.
하지만 역사의 뒤 페이지에는 전쟁의 향방을 크게 결정짓는 전투는 따로 시작되고 있었다.
* * *
칠흑으로 아로새겨진 검날이 바람을 할퀴어낸다. 다부진 체격을 가진 중년인은 칠흑의 검을 피하고자 어깨를 틀어 보였다.
그의 손이 검을 쥔 청년의 손목을 잡아 틀었다. 그와 동시에 가볍게 발목 차기가 이어진다.
발목을 걷어차인 청년은 옆으로 나자빠지는 듯 보이더니 바닥에 손을 짚고서 발을 들어 올렸다.
팡!
청년의 호쾌한 발차기는 불발했다. 중년인은 가볍게 공격을 막고서 재차 발을 들어 올렸다.
퍽!
가슴을 얻어맞기 전에 스스로 몸을 굴린 청년은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러고는 칠흑의 검을 들어 중년인의 허리를 향해 횡으로 베어 들어갔다.
채엥!
검과 검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일방적이던 대련이 이제는 제법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남들과 달랐기 때문에 둘째 아들과는 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포스가 봉인되고 힘과 재능을 잃은 아이는 검을 배우고 싶어서 했다.
자랑스러운 아버지와 부러운 형의 눈부심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고 싶었다.
봉인으로 인해 남들보다 배 이상 성장이 늦었다. 감춰진 재능이 이제는 완벽하게 날개를 달고 있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응용한다. 열을 알려주면 능히 백을 생각하고 있다.
중년인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고 해도 그의 검은 막기 힘들었다.
하지만 청년은 가볍게 뒤로 한걸음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맨손을 들었다.
그의 손은 중년인의 검날 옆을 맨손으로 쳐냈다. 그와 동시에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몸을 빙글 반 회전이라면서 날아오는 검격이 중년인을 노렸다.
중년인은 청년이 한 것처럼 손을 들어 검을 쳐냈다. 조금만 타이밍이 잘못 맞아도, 조금만 실수해도 크게 상처를 입는 행위였다.
정확한 판단력. 빠른 동체 시력. 그리고 빠른 운동능력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불가능했다.
청년은 중년인의 검날을 향해 폼멜을 끌어올렸다.
조금만 어긋나도 검 자루를 쥐고 있는 손가락이 잘려 나갈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지만 청년은 망설이지 않았다.
폼멜과 블레이드가 맞부딪히는 반동과 동시에 청년은 양손으로 힐트를 뻗어냈다.
붕, 바람을 찢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년인은 칠흑의 검을 피하는 동시에 청년의 허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옆구리를 가격당한 청년은 몸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순간 다시 한번 섬광과 같은 검격이 뿜어진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중년인의 공격.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청년은 흐트러진 자세에서도 다시 검 끝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미 중년인의 검은 청년의 검을 지나쳐서 정확하게 목을 겨누고 있었다.
흠뻑 땀으로 적셔진 등, 그리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흩뜨리는 이마의 땀방울.
어느새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며 리에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로 땀 하나 흘리지 않는 중년인은 두꺼운 입술을 열었다.
“검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교가 아니다. 기본이다.”
로이스타는 무뚝뚝한 말투와는 다르게 돛을 달은 듯 순항하는 리에르를 보고 내심 기뻐했다.
과연 아르빈트의 남자라고 할 만큼, 리에르는 신검 습득이 빨랐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아들이 타인이었다 해도 가르치는 보람을 느낄 정도였다.
“저번에는 검이 가볍다면서요.”
“여전히 가볍다.”
로이스타의 말에 리에르는 뚱한 표정을 들어 올렸다.
“검에 추라도 달아 놓을까요?”
로이스타의 입가가 살짝 틀어졌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그 순간이 아버지가 웃는 순간이었다.
“네가 검을 드는 이유는 어째서냐?”
“네?”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해오는 로이스타를 향해 리에르는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아르빈트의 검술을 배우고 싶어서 하는 이유가 있을 터다. 또한, 전장에서 발을 떼지 않는 이유가 무어냐?”
로이스타의 질문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리에르 자신조차 수차례 스스로에게 묻고, 되물었던 질문.
“가문의 검술은 원래부터 배우고 싶었어요.”
툴툴거리듯 내뱉으며 리에르는 자리에 아예 주저앉아 버렸다. 원래부터 배우고 싶다는 말에 단 하나의 거짓도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형에게만 검술을 가르치는 것이 불만스러웠었다. 가슴 한구석에 상처로 남아 딱지로 남아 있는 감정이 치유되어간다.
“나도 가르치고 싶었다.”
묵묵히 있다가 내뱉은 로이스타의 말에 리에르는 고개를 올려보았다.
왠지 모르게 찡한 말이었다.
평생 들을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허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리에르의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항상 말이 없고 태산같이 높아만 보였다.
“그 소망 이뤄 드렸으니 저에게 고마워하셔야겠네요.”
리에르는 히죽, 히죽 웃으면서 농담을 하였다.
화장실에 가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로이스타는 시큰둥한 얼굴로 리에르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고마움의 표시로 네 방을 만들어 놓으마.”
로이스타의 말에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로이스타의 말은 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르빈트 가문에는 리에르의 방이 남겨져 있지 않았다.
고향인 페이서스는 이미 초토화가 되었고, 수도에 산 적 없는 리에르는 있을 방도 없다.
로이스타는 그 흔적을 남길 수 있도록 해주겠단 의미이며, 그 의미가 가리키는 것은 저택에서 살라는 이야기였다.
“전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어요.”
“상관없다.”
리에르의 말에 로이스타는 시원하게 답변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에게 큰 짐이 될 거예요.”
“더 끼치지 마라.”
“전 많이 먹는 걸요.”
“나도 많이 먹는다.”
“저는 그 흔한 애안 하나 없는걸요.”
“나도 애인은 없다.”
리에르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왜 이런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한다고만 생각했을까.
말하지 않아도, 어렸을 적에 매몰차게 내쳤던 기억들을 설명해 주지 않아도 리에르는 왠지 알 수가 있었다.
유트와 유이, 그리고 에레사. 거기에 이은 어머니와 형, 그리고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혼자 남았다고, 이제는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몇 개월 전의 자신을 생각한다.
리에르는 끊임없이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당장에라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어린아이처럼 아버지의 말에 따르고, 복잡한 생각들을 떨어내고서 가족과 함께 하고 싶었다.
“진짜로 돌아가도 되는 거예요?”
“된다.”
너무나 듣고 싶었지만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대답.
근엄하지만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 자신을 옆에 끼고서도 정말 아들이 돌아온 것이 맞는지 밤마다 방문을 열어보는 어머니. 그리고 여전히 자상하고 믿음직한 형.
죽었다고 생각하여 너무나 가슴이 미어지고, 잊히지 않았던 첫사랑.
세상의 모든 것이 등을 돌려도 자신의 곁에 있어줄 것 같은 친구. 그리고 투덜거리면서도 항상 정면으로 바라봐주는 까칠한 소꿉친구.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 죄를 짓고, 슬픔을 만들어 낸 자신이 이렇게 행복함을 느껴도 되는지 스스로 되묻는다.
“할 일을 끝내면…….”
벅차오르는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피해왔던 일들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했다.
“할 일을 모두 마치면 돌아갈게요.”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나누어 가진 친구는 위험이 도사린 전장에 있었다.
그리고 전쟁을 만들어낸 아르미안을, 그리고 약해빠지고 겁 많은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베어내야만 한다.
“도와줄 일은 없느냐?”
진심으로 걱정하는 울림을 뱉어내는 로이스타를 올려다보며 리에르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빨리 동맹 건 진행되도록 해주세요.”
페리안 왕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공통의 적인 코스모스 교단을 뿌리 뽑는다.
비록 아렌 왕국 원정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해도 교단은 무너지지 않았다.
북벌 원정에 실패한다고 해도, 곳곳에 뿌리박힌 교단은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이미 녀석들의 마수는 황실에까지 손이 뻗쳐 있었다.
즉, 교단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연합은 필수적이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된다. 이미 왕녀 전하는 찬성하고 계시니까.”
왕녀 전하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리에르도 모르지 않았다.
리에르는 그동안 암살자로 살아오면서 각 국가의 실정도 배웠다.
지금 아렌 왕국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던 아레스트 군주의 힘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기반이 없는 제이미가 유일한 핏줄로서 군주가 되었다.
이런 전국시대에 여성이 군주가 되었다고 불만을 가진 자는 많았다. 노골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자도 있었다.
지금 제이미가 왕이 되었던 것은 그녀의 뒤에 아르빈트 가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빈트 가문 단독의 힘이 아니더라도 여러 변경백과 두루 친분이 있는 세력이 뭉쳐져 있다.
즉 로이스타의 말 한마디로 제이미는 왕녀로서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다.
하나, 아직 왕국은 완벽하게 통합이 되지 않았다.
내분이 일었고, 서로 파벌이 싸움을 만들었다. 이런 이들까지 굴복을 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가문의 검술을 익힐 시간은 있다는 말이다.”
리에르는 신검을 배우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강했다.
그만이 사용하는 마검술 레필리아 레소드. 그리고 천지를 뒤바꿀 수도 있을 포스의 힘은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로이스타는 최소한 신검이 지닌 의미를, 아르빈트 가문이라는 증거를 손에 쥐여 주고 싶었다.
로이스타의 말에 리에르는 씁쓸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비록 아르빈트의 이름을 댈 수조차 없는 불효막심한 아들이었다. 다시금 리에르는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았다.
“자, 일어나거라. 시간이 없으니.”
“아까는 시간이 있다면서요?”
“그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지.”
리에르는 로이스타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지금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로이스타는 오랜 시간 리에르의 검을 봐줄 수 없었다.
“씻고 준비하거라.”
바닥에 앉아서 쉬고 있는 리에르를 향해 로이스타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방금 보여주신 것을 연습해 보고요.”
오늘은 아버지가 새로운 검술을 여러 가지 보여주었다. 그것을 체화하고 싶어서 리에르는 안달이 나 있었다.
“너도 일은 해야 할 것 아니냐.”
“네?”
리에르는 로이스타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인제 와서 집안 청소라도 시키려고 하나 생각되었다.
로이스타가 나가자 하녀 엘리가 쪼르르 다가와서 타올을 건넸다.
“나 뭐 설거지라도 해야 하는 거야?”
“도련님이요? 설마요?”
엘리는 엉뚱한 리에르의 말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눈빛을 반짝이는 엘리는 리에르가 씻을 수 있게 준비를 했다. 훈련을 끝내고 샤워를 하고 나오자 개운함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방에 늘어져 있는 옷을 보고 리에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꽤 귀족다워 보이는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자자, 뭘 고르시겠어요?”
“아니…… 다 싫은데.”
“자자, 그러지 마시고! 자자!”
엘리가 눈은 반짝이면서 리에르에게 옷을 하나씩 밀어붙였다.
리에르의 잘 단련된 몸에 이 옷, 저 옷을 입혀본다는 것이 꽤 기뻐 보였다.
“갑자기 이딴 옷은 왜 입히는 건데?”
“어머, 아르빈트 부인께서 특별히 수도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직접 맞춘 옷인데요?”
“우리 엄마…… 수도로 오시더니 타락했군.”
리에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기억하는 라일라는 항상 근검절약하던 모습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엘리가 방긋 웃는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특별한 분을 만나기 때문에 준비하신 거니까.”
“특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