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91)
레필리아 레소드-191화(191/398)
레필리아 레소드 191화
아키서스 전쟁(7)
“아르빈트 부인께서 실망하실 건데요.”
“아니, 치렁치렁한 옷은 내가 실망할 거야.”
하녀 엘리의 말에 리에르는 그렇게 불만을 품어 보였다.
하나같이 너무나 품위 넘치는 옷인지라 입기에 부담스러웠다.
“만나는 게 누군데?”
“누굴까요? 후훗!”
하녀 엘리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리에르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든 상관없었다.
리에르는 엘리에 의해서 향수까지 뿌려지는 치욕을 겪으며 밖으로 안내받았다.
옷은 그냥 새 옷 한 벌을 택했다. 도저히 귀족들이 입으시는 차림새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옷걸이가 워낙 좋으니 괜찮네요.”
엘리는 그렇게 평하며 평화적인 합의를 이뤘다.
가문의 저택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 이상 지났다. 하지만 아직 리에르는 집을 혼자 돌아다니지 못했다.
어디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영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렌은?”
“부인과 같이 있는 거로 알고 있어요.”
하녀는 리에르가 에레사를 찾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에레사였다. 예전에 소꿉친구였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소문으로는 리에르의 첫사랑 상대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엘리는 그 소문을 부정했지만, 리에르가 에레사를 항상 찾는 모습을 보니 여자로서의 촉이 느껴졌다.
“부인께서는 레이나드 씨를 저택에 있게 하고 싶어서 하세요.”
“여기에?”
리에르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리에르는 싸워야 하는 일이 많았다. 목숨이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지만.
그런 전쟁터에 에레사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불행을 겪어왔다. 이제는 편히 쉬게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에레사가 자신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괴로워하지 않는 방향을 원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그것이라면.
“왔나.”
“어?”
리에르는 엘리의 안내를 받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엘빈이었다.
“엘빈이 왜 거기서 나와?”
“가자.”
엘빈은 시큰둥하게 받으면서 앞장섰다. 리에르는 하녀 엘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잘 다녀오라는 듯이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리에르로서는 하녀가 기분이 왜 좋은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특별한 분이 엘빈이라는 사실에 당황스러워했다.
엘리는 멀어지는 리에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에르는 죄인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죄인에서 벗어날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사면이다. 그리고 사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단 한 명이었다.
‘잘하고 오세요, 도련님.’
엘리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틀리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리에르는 엘빈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아르빈트 저택 입구에는 엘빈이 타고 온 고급스러운 마차가 있었다.
“소문으로 듣자니 신검을 배우고 있다면서?”
“응. 내 특별한 손님.”
“뭐?”
“응, 특별한 엘빈.”
엘빈은 리에르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듣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살벌한 인상인데 인상까지 쓰니 더 무서워 보인다.
“모쪼록 실례를 저지르지 않기를. 예전이랑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고.”
“에스코트라도 해줄까?”
“내 손을 잡으려고 시늉하는 걸 보니 확 죽여 버리고 싶군.”
“예전이랑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 언제까지 코찔찔이라고 생각해?”
리에르가 으르렁거리자 엘빈이 코웃음을 쳤다. 마차 앞에 서자, 엘빈은 직접 마부석에 앉았다. 그가 직접 말을 끄는 것을 보고 리에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빈이 턱 끝으로 마차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리에르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안에 들어가자 낯선 미청년이 앉아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흰 피부에 큰 눈동자. 왠지 모르게 연지를 바른 것 같은 입술이 여성적으로 느껴졌다.
안에 있던 미청년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는데, 너무나 아름다워서 멀쩡한 남자도 게이로 변하고 싶을 정도였다.
“앉아.”
“어?”
목소리를 들으니 여자였다. 아무리 남자 복장을 하고 있어도 분명히 옥구슬이 흘러가는 듯한 목소리다. 남자 따위일 리가 없었다.
리에르는 왠지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잘 지냈어?”
“어?”
앞에 앉아 있던 미청년은 모자를 벗었다. 모자를 벗자 어깨 위로 닿는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 그제야 리에르는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봤다.
“알아보겠어?”
“뭐야, 그 남장은.”
리에르는 한쪽 입매를 들어 보였다.
아렌 왕국의 왕녀, 제이미 룬 아레스트가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남자들이나 입는 바지와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평소 입는 드레스를 걸치고 밖에 나올 수는 없으니까.”
리에르는 그제야 특별한 분이 제이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엘빈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니까.
“페리안의 특사로 왔다지?”
“어쩌다 보니까.”
“그때 같이 있던 친구가 설마 페브리안 가문의 생존자일 줄이야. 세상 참 모를 일이야.”
제이미는 리에르의 친구인 유트를 떠올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소문으로 듣자니 페리안이 교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고 하는군. 조만간 교단이 퇴각할 거라는 정보가 들어왔어.”
“진짜?”
리에르는 제이미의 말을 듣고서 뛸 듯이 기뻐했다.
유트라면 역시 잘 해낼 줄 알았다. 그 옆에 리즈까지 있으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었다.
“동맹 건은 이야기를 들었어.”
“응, 빨리 동맹 좀 해줘. 그 문서 같은 거 써주면 안 될까?”
리에르의 말에 제이미가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럴 순 없네.”
“……?”
제이미의 말에 리에르의 얼굴이 대번 굳어졌다.
예상외의 대답이었다. 아버지 로이스타나 형 파에트의 말을 들었을 때도 동맹은 당연히 될 거로 생각했었다.
적의 적은 아군. 유명한 말이다.
교단의 목표였던 두 나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 두 나라가 힘을 합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적혈의 악마.”
제이미의 입에서 그 호칭이 나왔다.
아렌 왕국의 페이서스 항구를 초토화한 괴물.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 범죄자.
그녀의 입에서 그 호칭이 나오자 리에르는 자연스럽게 얼굴이 굳어졌다.
“동맹은 좋다. 하지만 대죄인이 가져온 제안을 누가 받아주겠는가?”
“그건…….”
“아렌에서 도망친 괴물이 페리안에 가서 생활하다가 은근슬쩍 아렌으로 와서 특사를 자처한다. 누가 그 말을 믿어주겠는가?”
제이미의 차가운 말에 리에르는 마음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르빈트 가문에 있으면서 잠시나마 잊었던 악몽이었다.
리에르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지고 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너무나 사실이라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마녀의 저주에 빠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비극을 만들어낸 중심은 자신이었다.
“특사를 에레사로 하면…….”
“아무런 전력도 없는, 일개 평민이 가져온 동맹서에 누가 사인을 하겠는가? 자네가 왕이라면, 자네가 대신이라면 설득되어 주겠는가?”
“그건…….”
“아니지. 오히려 이런 의심을 하겠지. 페리안이 우리 왕국의 죄인을 숨겨주고 있었다. 페리안은 사실 한패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제이미의 말에 리에르가 이를 사리물었다. 대번 그의 눈동자에 노기가 가득한 것을 보고 제이미는 픽, 웃었다.
“절대 그렇지 않아! 믿어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하지만 유트 녀석을 의심하는 것은……!”
죄를 저지른 것은 자신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선량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볼 수는 없었다.
역시 우려하던 그대로였다. 리에르는 애초에 아렌 왕국에 오면 안 되는 몸이었다.
“알고 있어.”
제이미는 리에르를 보고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앉으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리에르는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아직 불쾌함이 있었지만,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참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제이미는 잔잔하게 웃으면서 부드러운 입술을 열어 보였다.
“조금쯤은 어른이 된 것 같구나.”
“뭐?”
제이미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리에르가 눈을 깜박였다.
“괜찮은 남자가 되었다는 말이야.”
“어?”
리에르는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하자 당황스러웠다.
“내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나무라기 위한 것이 아니야.”
제이미는 계속해서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본 리에르는 자신의 예상대로 성장했다.
파에트와 같은 핏줄이니 얼굴이 닮는 것은 당연했다. 짙은 눈썹과 맑은 눈동자. 큰 키와 잘 훈련된 단단한 근육질의 몸.
큰 손과 긴 다리를 보니 예전의 그 꼬맹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제이미는 가슴이 뛰었다.
그는 그저 악인들에게 희생당한 불쌍한 남자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다.
설령 정말 무고함을 알아도, 그들은 끝까지 리에르를 향해서 물어뜯을 것이다. 그게 유일한 아르빈트 가문의 약점이기 때문이다.
다른 파벌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감당할 수 없게 돼버린다.
자신의 위치와 권력을 가지려면 정적을 공격하는 일은 당연하였다.
“말했다시피 자네는 죄인이야. 죄인의 동맹 제안을 받아주는 사람은 없어.”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리에르는 제이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제이미가 빙그레 다시 웃어 보였다. 확실히 예전과는 달라졌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아는 것처럼.
“자네의 죄를 사해주겠어.”
“뭐?”
제이미의 말에 리에르가 당황하고 있었다.
죄를 사한다?
분명 왕녀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권한이다. 하지만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대중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파엘 오라버니가 여러 가지 자료를 많이 찾아놓았어. 자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증거와 증인도 확보한 상태고.”
“형이…….”
리에르는 예전부터 형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형을 좋아했다. 그리고 파에트는 누구보다 동생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네의 죄가 사라지진 않아.”
맞는 말이다. 아무리 누군가에게 이용당했다고는 하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네의 국가는 어디인가?”
“나는…….”
말할 수 없다.
“아렌이라고 말해야지. 설마 페리안이라고 할 셈이야?”
제이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진다. 배시시 웃는 그녀의 얼굴이 왠지 귀염성 있어 보였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그래, 아렌.”
“그래. 맞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마치 학생을 칭찬하는 교사의 모습과도 같다.
“죄를 지었다면 도망치지 마라.”
제이미는 웃던 얼굴을 멈추고 진지하게 말했다.
확실히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알몸을 보였다고 버럭 화를 내고, 리에르랑 투덕거리던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죄를 지은 만큼 더 많은 죄를 갚아라. 더 많은 사람을 구해서 네게 죽은 사람들이 의미 없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라.”
그녀는 근엄하고, 자애롭고 아름다웠다.
“아렌의 이름으로 더 많은 목숨을 구해라. 그것이 자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다, 리에르 아르빈트.”
리에르는 애써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약식이지만, 아렌의 왕녀 제이미 룬 아레스트의 이름으로 말하노라. 리에르 아르빈트의 죄를 사하고, 자신의 죄를 지금부터 갚아나갈 것을 명한다.”
그녀의 손이 리에르의 어깨를 짚으며 약식으로 명을 전했다.
리에르는 고개를 숙이면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네.”
“그리고 약식으로 열두 번째 기사로 임명하노라.”
“뭐?”
생각지도 못한 말이 다시 튀어나와 리에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제이미가 시무룩한 얼굴로 바라본다. 리에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네.”
“아직은 제대로 공표하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렇게 알아둬.”
“하지만…….”
“내가 한다면 하는 거야. 지금은 내가 왕이니까.”
제이미의 고집스러운 반응을 보고서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리에르가 웃는 모습을 보고 가슴의 뿌듯함을 느꼈다. 바쁜데 일부러 그를 만나러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되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추고 엘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자 제이미가 앞장서서 마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여긴 어디……?”
수도의 호화로운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리에르는 사람이 많은 곳에 오자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제이미는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하며 대답했다.
“이제부터는 데이트하러 가야지.”
아직은 두 사람의 약혼이 깨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