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93)
레필리아 레소드-193화(193/398)
레필리아 레소드 193화
아키서스 전쟁(9)
“적이 미치지 않고서야 성을 버릴 리 없다.”
“네, 맞습니다.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성을 버릴 겁니다.”
티미는 빅스터의 대답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이렇게 나쁘지만 않다면 당장에라도 빅스터를 내쳤다.
“군사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빅스터는 때마침 찾아와 보고하는 부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보였다.
무슨 준비가 되었다는 것인지, 그리고 빅스터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티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답답한 표정이 되었다.
“예전에 제가 드린 작전 보고서를 보면 아키서스는 천연의 요새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은 티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키서스는 뒤쪽으로는 이렌드 강을 끼고 있으며 주변의 산새를 이용한 요새였다.
덕분에 적으로서는 점령전을 펼치기가 힘들었다.
“천연의 요새를 취하고 있는 성은 적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합니다. 항상 가장 중요한 자원은 식수지요. 이렌드 강은 성 내부와 이어져 있습니다.”
오히려 적의 요새를 칭찬하는 듯 느껴지는 빅스터의 말에 티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
“이렌드 강의 물줄기를 그동안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제 임시 댐을 개방하고자 합니다.”
“뭐?”
빅스터가 보고도 없이 일을 꾸몄다는 것이 화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과 같이 추운 날씨에 성안으로 물이 범람한다면 수성측은 물속에서 떨어야 한다.
차가운 물은 땅을 가득 적시고, 사람들은 대다수 동상에 걸리든지 극심한 추위를 느끼게 된다.
“강은 얼어붙지 않았는가?”
낮은 기온 덕분에 물줄기는 얼어붙었다. 댐을 개방한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날이 풀린 상태입니다.”
빅스터는 인근 마을의 주민을 상대로 페리안의 기온을 확인했다.
이맘때쯤 맹렬했던 추위가 갑자기 누그러지는 시기가 있다. 주민들은 그 시기를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빅스터는 강을 녹이기 위한 약품을 준비해서 뿌렸다. 그를 위해 2천 명의 병사에게 작업을 지시해야만 했다.
“총대장님의 명령 하나면 됩니다. 적의 성을 함락시키라고, 그 한마디면 됩니다.”
티미에게 있어 빅스터는 늙은 개로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다르다. 그는 목표물을 낚아채는 매의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 * *
리즈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적군을 보면서 불길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유트 역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을 때, 순찰을 다녀온 병사들의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적의 군대가 이렌드 강에 퍼져 있습니다!”
“이렌드 강에서 불길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이렌드 강이……!”
성벽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렌드 강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밀고 들어오는 강은 마치 파도처럼 보인다.
순식간에 밀려들어오는 강물은 아키서스 성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빅스터……!”
리즈는 성안에 범람하는 강물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다시 한번 예상치 못한 빅스터의 전략에 당했다.
이대로 있으면 수성의 이점은 사라진다. 곧 적이 공성을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녹아내린 이렌드의 강줄기는 아키서스 성 내부로 침투하였다.
순식간에 바닥에 물로 가득 찼고, 넘쳐서 수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당장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병사들의 피로도는 배로 늘어날 것이다.
뿌우우!
교단의 출정을 알리는 긴 나팔 소리가 아키서스 성까지 울려 퍼졌다.
대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대군의 진군 소리. 강물이 성안으로 범람하는 것과 동시에 움직이는 군대의 모습.
모든 것이 완벽했다.
시간을 주면 적이 방비하도록 두는 것이나 다른 바 없다.
적이 당황하고 있을 때, 신속하게 타격을 입혀야만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후방 부대를 치겠습니다.”
리즈는 수치심에 사로잡힐 시간이 없었다. 현실적인 타개책을 위해서 움직여야 했다.
강을 지키는 적의 주둔병을 제거한다. 그리고 최대한 병사들을 독려해서 수성해야 한다.
“전략적으로는 그렇죠.”
유트가 입을 열었다.
“같은 전략적인 관점을 가진 빅스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수성을 포기하지 않고 안에서 버티면, 강 주둔군과 본대가 같이 공성을 시작한다. 차라리 수성의 이점을 이용해서 주둔군을 치우고 싸우는 것이 좋다.
빅스터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는 2천의 주둔군을 미끼로써 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나가야 합니다.”
유트는 성안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피해는 심각했다. 당장 물에 젖은 식량을 옮기기 위해 병사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미 발목 이상 올라온 물 덕분에 침구류는 말할 것 없이 장비도 젖어 붙는다.
수성하려면 계속 화살과 도구를 날라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물이 범람한 상태라면 다들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대로 버티다가 밤이 되면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말 그대로 고문이나 다른 바 없었다.
“정면 대결하죠, 리즈.”
유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겨우 이런 곳에서 무릎 꿇을 거라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리즈는 유트의 말을 듣고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과연 훌륭하게 잘 성장하고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다른 길을 찾는다.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판단력이다.
아무리 주변에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군주가 갈피를 잡지 못한다면 제대로 되는 일은 없다.
“리즈 님은 500명을 끌고 주둔군을 치세요.”
“네.”
“레온 경, 텟사 경, 프세 경. 셋은 각 중앙과 좌우 군으로 맡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유트는 절대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었다.
곧 각 기사와 장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은 아직 공성 시작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적이 나올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아로운 님. 베리타스를 부탁드립니다.”
신궁 아로운은 리즈의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쳐보였다.
“늙은 아저씨한테 부탁할 것도 많구먼.”
“상황이 상황이니까요. 이런 곳에서 죽기엔 아까운 사람이라서요.”
그는 붉은 입술을 들어 미소를 지어 올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포스가 된 이래, 아니, 포스가 되기 이전부터 자신이 누군가에게 의지해 본 적이 없었다.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온 탓일까? 아니면 이용하려 했던 유트에게 감화되어 자신도 인간이 되어가고 있던 것일까?
그런 고민은 뒤로하며 리즈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로운은 부리부리한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죽이고 와.”
리즈는 아로운이 유트를 지켜줄 것을 알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교단은 공성 탑을 세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재개되었다. 여기저기서 함성이 울리고 투석차의 돌이 날아든다.
콰앙, 쿵!
성벽을 부서뜨리는 바위가 무섭게 이곳저곳 날아들었다.
나오지 않는 친구의 문을 사납게 두드리듯이 공성 전차가 움직여 성문을 울린다.
수성하는 사람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휘이이잉!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병사들의 비명이 토해져 나왔다.
쉬익, 쉭!
아로운을 필두로 하는 궁수들이 화살을 마구 쏟아부었다.
진격해 오는 교단의 병사는 화살에 맞고 꼬치처럼 되어 죽어간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성의 저항이 약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에는 지금 물난리가 났으니, 제대로 무기 보급이 이뤄지기도 힘들다.
“쏴라!”
휘이잉! 콰앙!
투석차에서 쏟아지는 바위가 다시 한번 적의 성을 부순다. 무너지는 성 파편이 여기저기 날아가 2차 피해를 발생시켰다.
상황을 지켜보던 빅스터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총대장님, 정면으로 유트 왕이 진격해 올 겁니다.”
“뭐? 이런 상황에서?”
빅스터의 난데없는 말에 티미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전투 경험이 많은 자신조차 전장의 앞에 서는 것은 두려웠다. 무엇보다 불리한 상황에서 왕이 전면에 나서는 건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위였다.
“방금 아로운이 힘자랑하기 위해서만 활시위를 놓은 것이 아닐 겁니다. 아마도 그렇게 병사들을 고무시켜서라도 지켜야 할 누군가가 전면에 나선단 의미죠. 유트 왕이 진군해오면 총대장님은 친히 그의 목을 벨 수 있습니다.”
유트의 목을 벤다는 말에 티미는 조금 전에 일어났던 공포감 대신 묘한 흥분감이 일어나는 얼굴로 빅스터를 바라보았다.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유트 왕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제일 앞에서 진군해 오겠죠. 그리고, 그것이…….”
빅스터는 열리기 시작하는 아키서스 성문을 보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스스로의 목을 조이게 될 겁니다.”
이미 유트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빅스터는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도 지혜롭고 용맹한 그는 지크 페브리안의 뒤를 이어도 흠잡을 데 없는 인재였다.
하지만 군을 다룬 지 아직 얼마 안 되는 유트는 성숙하지 않은 열매와도 같았다.
알면 알수록 감탄스럽고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그러나 서로가 소속된 처지가 다르기에 죽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빅스터 자신이 모시는 상관이 티미가 아닌 유트였다면 천하를 그에게 갖다 바칠 수도 있다는 불경한 생각마저 들었었다.
“총대장님, 군이 피해를 보더라도 반드시 유트 왕만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래, 유트…… 그 자식을 꼭 내 발아래 깔아보고 싶었어.”
티미는 언제 겁을 먹었냐는 듯이 독기 오르는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이전부터 자신의 자존심에 흠집을 내고, 정신적인 붕괴를 불러왔던 유트다.
그 녀석을 직접 죽일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있던 트라우마를 벗어던질 수가 있었다.
티미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렜다.
빅스터는 상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적군과 전투를 하기 위한 진형을 포진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뒤바뀌는 순간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 * *
제대로 된 군주를 만나지 못한 비운의 천재 빅스터 나이브만과 이제 시작하는 천재 유트 페브리안.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시작되는 같은 시각, 페리안의 수도에서는 죽음을 부르는 피보라가 일어나고 있었다.
역습을 당하며 위기를 겪고 있는 아키서스와 마찬가지로, 페리안의 수도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갑작스럽게 전달된 적의 기습 소식에 유이는 어지러움 마저 느껴졌다.
“뭐라고요?”
“지, 지금 수도에 적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한밤중의 악몽과도 같았다.
지금 한창 아키서스에서는 국가의 명운을 결정짓는 큰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수도까지 들이닥치는 적군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외성을 뚫고 들어온 교단의 기병대는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고 시내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곧 놈들이 왕성을 함락하기 위해 올 것이다.
유이는 부드러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더들이 쏘아내는 쿼렐을 쳐내는 기병들. 육중한 성문을 토막 내 버리는 괴력을 자랑하는 금발의 사내는 그 무엇도 막아낼 수 없었다.
왕성의 위기에 싸울 수 있는 사람, 최고 지휘권을 가진 이는 유이 페브리안이었다.
그녀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난 인물이 아니었다.
피할 수 없는 전투임을 느끼고, 단 한 번의 패배는 끝이라는 것을 알기에, 유이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어 던졌다.
실로 오랜만에 입는 듯한 어깨가 드러난 셔츠.
그와 어울리는 짧은 바지 위에 입은 치맛단은 그동안 입었던 드레스의 불편함을 해소했다.
불경스러운 옷차림새를 했다고 꾸짖고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혼란 속에 놓인 시녀와 하인들은 어쩔 줄 모르고 성 내부를 바삐 뛰어다녔다.
“공주님, 하르츠 후작의 지원 부대가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
“수습 은기사 20명, 수도 근위병 120명 집결되었습니다!”
긴 은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는 유이에게서 병사들의 보고는 어지럽게 들려왔다.
평소 장난기가 많아 유이를 골리는 것을 낙으로 삼던 멜런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그녀로선 전쟁이 벌어지는 현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