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98)
레필리아 레소드-198화(198/398)
레필리아 레소드 198화
천재 vs 천재(2)
아르빈트 가문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다.
라일라는 에레사를 딸처럼 대해주었다. 가끔 만나는 로이스타 아저씨도 무뚝뚝하지만 다정하게 인사해 준다.
파에트도 에레사에게 친절을 잊지 않았다.
아르빈트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그러했다. 유일하게 이 저택에서 적대적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미인은 아니지만, 귀여운 이미지를 가진 갈색 머리 시녀인데, 이름은 엘리라고 했다.
그녀는 에레사가 갈아입을 옷을 일부러 엉뚱한 곳에 갖다 놓는다든지, 식사 시간이 되어도 부르러 오지 않는 등의 유치한 장난을 걸어왔다.
에레사는 카이샤에 다닐 때도 이성이든 동성이든 전부 친했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 짐작은 갔다.
엘리는 아르빈트 가문의 차남, 리에르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에레사를 연적으로써 경계하고 있었다.
에레사는 화가 난다기 보단 왠지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페이서스에서 바보 같은 리에르의 모습을 봤어도 좋아했을까?
에레사는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다. 리에르의 좋은 점을 찾는 것은 자신의 특기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단점을 찾는 것도 특기가 되어버렸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지저분한 꼬마 아이. 그는 에레사 그녀만의 것이었으며,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이었다.
만약에 리에르가 페이서스의 비극을 벌이지 않았다면.
아주 만약에 리에르가 부모님을 살해하지 않았다면.
에레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만약 그랬다면 에레사는 당당하게 리에르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죄인으로 삶을 살아 간데도 상관없다.
그가 지금처럼 멋있게 변하지 않고, 이전의 꾀죄죄한 모습으로 남아 간데도 상관없었다.
리에르를 저주하고 원망하는 만큼, 그의 아픈 가슴을, 착한 심정을 알기에 더더욱 아팠다.
그녀는 리에르에 대한 시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물지 않는 상처들을 가득 베어내고, 치유되지 않는 고통을 리에르에게 겪게 할수록 에레사도 똑같이 아픔을 느꼈다.
리에르도 스스로를 죄인으로서 생각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화로운 일상을 사는 것이 어색했는지 쉬지 않고 훈련장에서 검술만 연습하였다.
자기 자신을 극한으로 몰고, 더 힘들게 만들려는 듯이.
그런 리에르를 생각하면 에레사는 모든 것을 다 잊고서 그를 꼭 끌어안고 싶었다.
어느 날엔가 라일라는 에레사에게 뜻밖의 제안을 하였다.
“에렌만 괜찮다면 에레사 아르빈트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겠니?”
“네……?”
원래 이웃집에서 함께하며 부모들끼리 사이가 좋았었다.
라일라는 딸이 없는 아쉬움을 평소 토로했었고, 에레사를 예뻐했었다.
아르빈트의 사람이 되어 정말로 한 가족처럼 지내자는 라일라의 말이 너무 뜻밖이라 에레사는 멍한 시선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질 못했다.
“하지만…….”
라일라야 워낙에 자상한 성격이었고 주변에 어려운 것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성향의 사람이었다.
감사하지만 결정하기 힘들었다.
따뜻한 홍차를 음미하고 있던 로이스타는 에레사와 눈이 마주치자 크흠, 하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한마디 내뱉었다.
“딱히 원하는 건 아니다만.”
“당신, 뭐라고 했어요?”
라일라는 로이스타의 무뚝뚝한 말투를 듣고서 대번 눈꼬리를 추어올리고서 씩씩거렸다.
에레사는 평소에 리에르를 혼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살포시 웃어 보였다. 왠지 모를 향수가 느껴졌다. 그리웠다.
로이스타는 라일라에게 귀를 잡아당겨지면서 괴로워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대륙 최강의 사내를 쥐 잡듯이 하는 여자가 있을 거라고는.
따뜻한 가족을 가지고 있는 리에르. 그리고 그런 것이 부러운 에레사. 다정한 그들의 품에 들어가 하나가 되고 싶었다.
두 사람의 말에 에레사는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리에르에 대한 원망도, 복수심도 흔들린다.
페리안의 수도가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길 듣자마자, 리에르는 사색이 되어 엘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오랜 지기인 유트, 그리고 그의 여동생 유이를 생각하면 리에르가 다급해서 하는 것은 당연했다.
엘은 리에르가 보채지 않아도 알아서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엘과 리에르, 에레사는 페리안으로 이동했다.
리에르는 에레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아르카를 들고서 뛰쳐나갔다.
당연히 사람들의 위기를 보고 조급해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어쩐지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는지 병기들이 작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들이 울려 퍼졌다. 한눈에 보아도 전투는 일방적이다시피 교단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데도 리에르는 무언가를 찾는지 시선을 돌리며 조급해했다.
찾고 있던 인물이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유트의 여동생 유이였다.
리에르는 아르카를 말아 쥔 채로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뒤로 묶은 은회색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유이가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유이를 향해 찌르고 들어오는 칼날이 보였다.
리에르의 일그러진 눈동자가 힘없이 쓰러져 있는 유이를 향했다.
피로 적셔진 머리카락과 상처들을 훑는 리에르의 표정은 분노가 서려졌다.
본성이 착하디착한 리에르라면 주변에 쓰러진 병사들에게도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오로지 한 곳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에레사는 왠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유이를 구한 리에르의 눈이 분노로 뒤덮였다. 다친 유이를 내려다보며 일그러진 눈은 당장에라도 눈시울을 붉힐 것처럼 보였다.
그때 에레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리에르가 유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상했다. 단순히 친구의 동생을 바라보는 것 이상의 감정이 느껴졌다.
‘어?’
에레사의 가슴이 불길함으로 두들겨진다.
리에르가 유이의 상처를 소매 끝으로 훑어 닦는다. 그러고는 자신의 망토를 벗어 그녀를 덮어주었다.
리에르는 아르카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백한 분노.
다가가기만 해도 베여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살기가 주변의 모든 것을 뒤엎고 있었다.
슬픔을 포효하는 듯한 리에르의 모습을 보면서 에레사는 안타까움과 미묘한 의문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설마.’
리에르는 유이를 좋아하고 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하면서 에레사는 역겨움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리에르를 좋아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다른 여자에게 질투하고 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유트의 여동생 유이에게.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진 유이의 앞에 서서 리에르는 칠흑의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다가오는 기사들을 일격에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픽, 푸쉭!
땅바닥과 허공을 찌르고 들어오는 선혈은 사방을 난도질한다. 유이의 위로 덮인 망토가 피를 대신 맞는다.
리에르는 적들을 단 하나도 남겨두지 않으려는 듯 무자비하게 썰어댔다.
“역시 리에르는 이전보다 강해졌군요.”
전투가 벌어지는 중에도 엘은 여유롭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는 에레사를 향해 엘은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도 이전보다 강해졌나요?”
리에르가 에레사의 부모님을 죽인 사실을 직접 전달한 엘. 그리고 믿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서 당시 상황을 기록한 마법구까지 비춰줬었다.
엘은 에레사에게 진실을 볼 것을 강요했다. 에레사는 엘의 과도한 친절을 원망하였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진실. 그것을 알게 된 뒤로 에레사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계속되는 번뇌에 시달려야만 했다.
엘은 진실을 전하던 날, 에레사에게 또 다른 위로의 말도 하였다.
‘당신이 그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그를 아낀다면 진실을 이기고,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에레사는 엘의 말처럼 리에르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그를 너무나 보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리에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리에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망설이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야 안에 들어오는 리에르는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분노로 적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이전의 어눌했던 모습과는 이질적으로 달라진 청년.
분명 유이가 아닌 에레사가 저렇게 되었어도 똑같이 분노해 줄 것을 안다.
하지만 그가 유이를 바라보던 안타까운 시선이 에레사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니야…….’
에레사는 자신의 못난 마음을 부정했다.
리에르를 용서하는 것도, 리에르를 사랑하는 것도, 리에르를 단죄하는 것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저런, 많이 다쳤군요.”
엘은 정신을 잃은 유이의 상처를 보더니 오른손을 허공에 들어 보였다.
반딧불처럼 은은한 황금빛이 그의 손안에 넘실거렸다. 그는 그것을 유이의 상처를 어루만지듯이 움직였다.
“에레사, 좀 도와주겠어요?”
“아, 네…….”
입술을 질겅질겅 씹어 내리고 있던 에레사는 엘이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강력한 신성 마법을 소유한 엘은 유이의 치료를 벌써 끝냈는지, 에레사에게 눈웃음을 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 소녀를 잠시 데리고 있어 주세요.”
엘은 에레사에게 유이를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검지를 들어 허공에 휘젓기 시작하였다.
엘의 손가락이 그어진 공중에선 잠시 후 환한 빛줄기가 뿜어지면서 룬 문자들이 그려졌다.
“아쉽게도 교리를 따르는 자들에겐 포스를 사용하지 못하니 마법으로 지원이라도 해야겠죠.”
엘은 부드러운 눈가를 들었다.
그때 양손검을 든 금발의 남자와 리에르가 서로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칠흑의 빛과 푸른빛이 서로를 갉아먹을 듯이 마멸하고 맞부딪힌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금발의 사내는 굉장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리에르에게 절대로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근소하게 앞서고 있었다.
엘도 리에르를 지원하기 위해서 마력을 끌어모으며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전투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 있는 사이, 에레사는 상처 입은 유이를 돌보면서 답답함을 느꼈다.
비극을 겪고 난 이후, 모든 것을 잃은 그녀에게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 마음 때문에 상처를 입었어도 힘겹게 스스로를 다잡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사이, 리에르는 달라지고 있었다.
챙, 채엥!
푸른 자장을 일으키는 양손검이 아르카와 맞부딪히면서 서리를 일으켰다.
닿는 것은 모두 얼려 버릴 듯이 강력한 공격.
거대한 검을 들고도 빠른 선회를 해오는 레이루나를 보고 리에르는 상대가 엘빈 이상임을 깨달았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강자가 나타나자 리에르는 내심 당황하였다.
하지만 이미 레필리아 레소드를 사용하는 기사들이 즐비하다. 새삼 놀랄 필요도 없었다.
검은 자장을 일으키는 아르카는 닿는 모든 것을 베어버릴 듯이 날카롭게 허공을 선회하였다.
매섭게 찌르고 들어오는 리에르의 공격을 보고 레이루나는 이야압, 하는 기합성과 함께 머리 위에서 내려쳤다.
레이루나의 허리를 베어 들던 아르카는 퉁겨졌다.
팔목이 꺾여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리에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레이루나의 검이 스쳐 지나가자 허공에 서리가 일어난다. 그것은 리에르의 주변을 압박하듯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다시 검을 가슴 위까지 들어 올렸다. 서리를 깨부수고, 상대의 목을 급습한다.
챙!
둔탁한 소음과 함께 이번 공격도 무위로 돌아간다.
리에르는 손목의 시큰함을 느꼈다. 공격을 막아낸 레이루나는 기분이 좋다는 듯이 크게 웃어젖혔다.
“자, 이제 슬슬 제대로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