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199)
레필리아 레소드-199화(199/398)
레필리아 레소드 199화
천재 vs 천재(3)
십 여분 이상 검을 맞댔는데도 상대는 기운이 넘쳤다.
리에르는 어느새 젖은 앞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은 것을 느꼈다.
그의 시야 안에 들어오는 유이를 보자, 검을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엘이 응급치료 정도는 해주었을 테고, 에레사가 유이를 돌봐줄 거다.
그래도 혹시 몰랐다. 최대한 전투를 빨리 끝내고, 유이를 편히 쉬게 해줘야 했다.
피로 적셔진 채 힘없이 쓰러진 유이를 보면 두려움과 분노가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다.
페이서스 비극의 바로 전, 티미에 의해 에레사가 죽었을 때 느꼈던 무력감과 공포감이 떠오른다.
머릿속의 실타래가 몸과 정신을 뒤엉키게 했다.
“즐겁냐?”
레이루나는 리에르가 말을 걸자 씨익 웃으면서 답했다.
“안 즐겁냐?”
강한 자와 겨뤄보기 위해서 뛰쳐나온 고향,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대륙에는 강하디강한 존재들이 너무나 많았다.
자신의 피를 뜨겁게 하고 흥분되게 하는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는가?
단 하나뿐인 생명을 가지고 하는 서로의 도박. 당연히 쾌락이 물밀 듯이 몰려들어 온다.
“혼자 즐거워해라.”
리에르는 아르카를 턱까지 끌어 올린 채로 레이루나에게 달려들었다.
레이루나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그리며 양손검을 들어 올렸다.
“자, 받아봐라!”
레이루나의 주변으로 바닥에서부터 투명한 얼음송곳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레이루나를 향해 휘두르던 검을 고쳐 잡았다.
갑자기 지면을 뚫고 나오는 위력적인 송곳은 닿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듯이 보였다.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리에르는 서늘한 감각이 목에 전해지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지면을 올라오는 송곳과는 별개로 레이루나의 맹검이 리에르에게 날아든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검 옆면으로 막아낸 리에르는 엄청난 힘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쭉 밀려났다.
한쪽 무릎을 땅에 굽힌 리에르는 계속해서 투두두, 소리 내어 달려드는 얼음송곳들을 보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싸울 땐 나를 봐라! 넌 즐겁지 않은 거냐?”
레이루나는 도망만 다니는 리에르를 보면서 양손검을 어깨에 두른 채로 소리쳤다.
처음에는 리에르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힘겨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예리함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레이루나는 실망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전투를 즐기고 있는 레이루나와 달리 리에르는 극도의 분노를 느끼며 단숨에 적들을 쓸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강한 레이루나, 그리고 계속해서 공격해 들어오는 교단 기사들 덕에 쉽게 승부를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상처를 입은 유이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당연히 조급한 마음만 찾아 들었다.
얼음송곳이 사라지자 리에르도 잠시 서서 정리되지 않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레이루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엘 파실드는 그사이 페리안의 근위병을 도와서 교단 기사를 하나하나 격파하고 있었다.
엘이 포스로서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이미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을 터다.
하지만 유일신의 저주는 강력했다. 교리를 따르는 자들을 상대로는 그가 가진 포스는 무력하기만 했다.
유일신에게 패함으로써 얻게 된 저주.
다시는 신과 싸울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엘에게 유일한 희망은 리에르와 리즈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당신은 성장해야 합니다.’
엘은 전투에 진입하자마자 자신의 장기인 신성 마법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죽어가고 있던 병사들이 다시 일어섰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던 이들이 초점 없는 눈을 든다. 전투할 수 없는 상처는 삽시간에 아물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도록 강요한다.
환한 금빛에 둘러싸인 병사들은 갑자기 일어난 기적에 어리둥절해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적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잠시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통각을 막고서 전투할 수 있도록 치유해 준 것에 불과하다.
교단 기사를 향해 땅에서 뿌리가 솟아난다. 녀석들은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단단히 고착된 뿌리는 흔들리지도 않는다.
엘이 손을 뻗는다. 광활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퍽, 퍼퍽!
소음과 함께 교단 기사가 나가떨어진다.
엘은 캐스팅이 긴 큰 마법들을 사용하는 대신에 가볍게 사용할 수 있는 것들만 활용하면서 교단 기사들을 쓰러뜨렸다.
교단 기사의 검을 부서뜨린다든지, 발목을 붙잡아 전투 불능으로 만든다.
그러면서도 부상한 심한 사람을 회복시켜주면서 엘은 전투에 크게 일조했다.
그의 존재 덕분에 병사들도 교단 기사와 맞설 수 있게 되었다.
죽이고 죽이는 살육전이 반복한다. 리에르와 레이루나는 계속 전투를 이어나갔다.
그냥 무식하게만 휘두르는 것 같은 레이루나의 양손검은 내려치는 것 같이 움직이면서도 갑자기 궤도를 돌리며 횡으로도 베어 들어왔다.
리에르는 다급하게 회피하지만 자잘한 상처를 반복해서 입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얼음송곳이 바닥에서 튀어나와 견제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는 레이루나의 공격은 날카로웠다.
‘이 녀석 강하다.’
리에르는 목으로 베어드는 레이루나의 양손검을 막아내자 힘에 부쳤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발이 지면 아래로 파고든다.
레이루나의 기습적인 발차기가 리에르의 가슴을 걷어찼다.
둔탁한 통증을 맞고서 리에르는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쿨럭, 쿨럭.
리에르는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서 기침을 해댔다.
쇄에엑!
무언가 날아드는 소리에 리에르는 다급하게 땅을 짚고서 몸을 굴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에 꼽히는 얼음송곳은 파편이 되어 사라졌다. 조금만 늦었다면 송곳에 몸이 난도질당할 뻔했다.
“뭐야, 너.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간 거냐?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하더니.”
점점 힘을 잃어가는 리에르를 보면서 레이루나는 슬슬 흥미가 떨어졌다.
자신의 검을 받아치고 반격도 해야 싸우는 맛이 있는데 이건 일방적이었다.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는 리에르를 보니 김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레이루나의 비아냥거림이 없어도 리에르는 충분히 당황스러웠다.
레필리아 레소드를 습득해서 강해졌다. 지금은 아버지의 신검을 사사받아 이전보다 압도적으로 강해졌다.
그런데도 리에르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닥을 뒹굴면서 적의 공격을 피하는 것뿐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는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신검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나…….’
리에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르미안에게 배운 레필리아 레소드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 아버지에게 사사받은 신검으로 싸웠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리에르를 보면서 레이루나는 흥, 하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자신의 무기, 임페리얼 프리즘의 검면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딱 보아하니 넌 자신보다 약한 녀석에게 강한 녀석이었구나. 입맛만 버렸군.”
어디 선가도 들었던 말이었다.
리에르는 밀려들어 오는 수치심을 느꼈다. 어렸을 적에는 숱하게 들었던 말이지만 강해진 이후론 잊어버렸던 말이기도 했다.
-적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잠자코 있던 아르카가 웅웅 하는 검은 빛을 일으켰다.
-Master는 힘의 조절을 못 합니다. 당신은 일격에 상대를 쓰러뜨려 왔기에, 자신과 동등한 능력치를 가진 상대와 전투를 할 땐 헤매는 경향이 있습니다.
“캬, 말 잘하네. 네 검은 말도 하냐? 이 녀석은 말은 못 하는데.”
아르카의 목소릴 들은 레이루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무기를 흔들어 보였다. 그리곤 힐트를 고쳐 잡으며 다시 공격 자세를 갖췄다.
“그렇다고 내 무기가 네 무기보다 후질 거란 생각은 하지 마라!”
말을 하는 에고 소드가 있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레이루나는 호기심이 들어왔다.
리에르의 검 아르카, 그리고 자신의 검 임페리얼 프리즘처럼 의지가 있는 무기들은 절대 약한 주인을 따르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사용할 수 없는 주인이라면 무기로서의 성능을 발휘해 주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레이루나는 지금의 리에르를 보아선 그저 좋은 검을 운 좋게 가지고 있는 애송이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말하는 재주밖에 없어 보이는 단단한 검이 기껏 한다는 위로가 동등한 능력치라는 의미라니.
그것을 생각하며 레이루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비웃음을 머금는다.
채엥!
강렬하게 내려치는 임페리얼 프리즘을 막아내며 리에르는 힘에 부치는지 뒤로 다시 한번 밀려났다.
“약한 녀석에게 쥐어지는 무기의 심정을 헤아린 적 있냐? 검에게 미안함 정도는 느껴라.”
키릭, 키리리릭.
레이루나의 검이 리에르의 머리 위에서 비틀림을 내뱉는다.
바인딩 상태에서 대처하니 힘에서 밀렸다.
리에르는 손목의 저릿함 때문에 마비될 것 같은 느낌이 찾아왔다.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거대한 양손검이 순식간에 내리쳐져 몸을 부서뜨리고 생명을 빼앗아 갈 것 같다.
레이루나의 발밑에서부터 다시 한번 얼음의 송곳들이 튀어 올랐다.
부욱!
상대의 무기를 막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던 리에르는 갑자기 튀어나온 송곳에 정강이가 찢겼다. 삽시간에 그의 바지가 핏물로 적셔졌다.
레이루나의 검을 튕겨내면서 리에르는 뒤로 물러났다. 정신을 집중해서 싸우지 않는다면 패배는 불 보듯 뻔했다.
-Master, Irregular를 사용할 것을 권장합니다.
아르카는 웅웅 하는 울음소릴 내면서 의사 전달을 하였다.
아르카가 말하는 이레귤러가 의미하는 것은 리에르가 사용하기를 망설이는 그것을 의미했다.
“자, 이제 가라.”
레이루나는 마무리를 지으려는지 설풍을 불러일으키는 검을 횡으로 배어들었다.
허공을 집어삼키는 양손검을 막기 위해서 리에르는 아르카를 고쳐 잡았다.
고전하고 있긴 하지만 포스를 사용하는 것은 망설였다.
페이서스에서의 악몽. 그것으로 상처 입은 것은 희생자의 가족들뿐이 아닌, 평생을 짊어지고 나가야 할 리에르의 죄였다.
손쉽게 적을 쓰러뜨리고, 편하게 살인을 한다는 것은 붉게 물든 손을 씻어도, 씻어도 역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포스를 사용해서 다시 폭주하게 된다면,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리에르는 혹시나 해서 미리 엘이 만든 앰플을 복용했다.
미세한 마약 성분 덕분에 몸의 고통이 안정은 되었지만, 되도록 포스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으음…….”
긴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유이는 핏기가 채 닦이지 않은 입가를 힘겹게 열어 보였다.
푸른 하늘이 눈가를 아리게 만들었고, 정신이 들자 몸 곳곳에 찾아오는 통증은 저절로 신음을 내뱉게 했다.
“괜찮니?”
유이는 자신의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금발 머리카락의 여성. 그녀는 유이의 볼을 쓰다듬어 보인다.
“언니, 여긴…….”
멍한 머릿속을 흔들면서 상반신을 힘겹게 일으킨 유이는 에레사가 왜 앞에 있는지를 생각했다.
그 순간 정신이 퍼뜩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가득한 전장. 그 안에서 아직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유이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땅에 손을 짚었다.
터진 입술에서 스며들어온 피 때문에 혀끝이 쓰리다.
땅을 짚은 팔은 정신이 퍼뜩 들 만큼 아파 왔다. 유이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오른쪽 팔은 퉁퉁 부어올라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유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검은 망토를 보았다.
유이는 리에르를 떠올리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죽고 사는 전투가 지독하게 반복되는 곳에는 누구보다 눈에 띄는 순백의 마법사가 있었다.
그는 유이 대신에 병사들을 독려하며 전장을 지휘했다.
가볍게 손끝을 흔들 때마다 거대한 빛의 새가 일렁이며 적들을 집어삼켰다.
다친 자들을 회복하는 왼손과 적군을 거침없이 파괴하는 오른손은 거의 동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빠른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원래는 교단 기사에게 일방적이던 전투였지만, 엘 한 명으로 인해서 동등한 수준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순백의 엘과는 정반대로 칠흑의 리에르는 상황이 좀 달랐다.
유이는 믿기지 않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로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도, 자신이 본 가장 강한 남자는 리에르였다.
전투에 힘이 부치고 위기를 느꼈을 때 리에르를 떠올렸던 것 역시 그의 강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바람대로 리에르가 도와주러 온 것은 기뻤다. 하지만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거대한 양손검을 가볍게 휘두르는 금발의 남성을 상대로 거의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리에르는 지쳐 보였다.
리에르는 칠흑의 검, 아르카를 세우고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를 상대하는 금발의 남성은 지치긴커녕 아직도 건재해 보였다.
찢긴 옷가지 사이에서 얇게 베인 상처들이 피를 꾸물꾸물 흘려댄다. 유이는 입술을 깨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저 바보가 도와주러 왔으면 이길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