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
레필리아 레소드-2화(2/398)
레필리아 레소드 2화
재회(2)
리에르는 화장실을 간다고 말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우울했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쁜 머리로 중등 과정을 마친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같이 다니고 싶어.’
리에르는 에레사와 소꿉친구였기에 항상 붙어 다녔다.
성장할수록 아름다워지는 에레사는 보석과도 같은 존재였다.
원래 같으면 그녀에게 말도 못 붙여볼 리에르도 소꿉친구의 권리로서 친분을 유지했다.
하지만 에레사가 카이샤에 진학하고 나서 사정이 달라졌다.
에레사는 다른 학우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잘생긴 남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카이샤에서 가장 뛰어난 미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덕분에 나쁜 벌레들이 잔뜩 꼬여 들고 있었다.
‘그러니 지켜줘야 해.’
누군가에게 빼앗길 것 같았다.
점점 아름다워지고, 화려해지는 에레사가 멀어지는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났다.
‘왜 난 아르빈트지.’
리에르는 자신의 성을 저주했다.
아르빈트 가문.
마법이 사라진 대륙은 전국 시대가 되어 검으로 통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중 대륙에서 최강의 기사단으로 손꼽히는 곳은 아렌 왕국의 십일검 기사단이었다.
온갖 휘황찬란한 업적과 위명을 차지한 그곳에서 기사단장인 인물의 성도 아르빈트였다.
대륙 최강의 기사, 신검의 로이스타 아르빈트.
바로 리에르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뿐만이 아니지.’
십일검 기사단에서 칠검 기사대의 최연소 대장인 파에트 아르빈트.
바로 리에르의 친형이었다.
대륙 최강의 아버지.
왕국 제일의 천재 형.
“빌어먹을.”
리에르는 저절로 욕지기가 나왔다.
두 사람에 비해서 리에르는 검의 재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죽하면 번개 검 아르빈트라는 별명이 붙었다.
번개 같은 검을 휘두른다고 번개 검이 아니었다.
둔재라는 의미에서 비꼬는 뜻이었다.
재능도 없고 잘생기지도 못했다.
리에르는 자신의 모든 재능이 형에게 빼앗긴 채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리엘?”
부드럽고 자상한 목소리.
맑은 공기가 허공에 파문을 일으키듯이 울려 퍼졌다.
“아? 에렌?”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에레사가 걱정스러운 듯이 다가왔다.
“남자란 항상 고뇌하는 법이지.”
“웃기셔. 고뇌한 애가 옷에 침 흘린 자국을 남기니?”
“응?”
리에르는 수업 시간에 깜박 졸았던 기억이 났다.
자라고 하는 수업이 분명하긴 했다.
강사의 말이 너무 느릿느릿했으니까.
“집에 가는 길이야?”
“응. 너도?”
“같이 가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함께 걸어갔다.
어차피 가는 방향이 같았다.
리에르의 집 옆이 에레사의 집이었기에.
리에르는 옆집 사는 소녀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에 대해 감사했다.
“요새 유트는 어때?”
“그 녀석? 여전히 재수 없지.”
“재수 없긴. 네 친구치곤 엄청 제대로 된 애잖아.”
“제대로 된 사람에겐 제대로 된 사람이 따를 뿐이죠.”
“과연 그럴까? 예외란 것도 있지 않아?”
“그렇게 말하면 에레사 레이나드 양은 어떻게 될까요?”
“아, 그렇네. 미안.”
대번 에레사가 꼬리를 내렸다.
리에르는 승리의 기쁨에 턱을 추어올렸다.
“아, 맞다. 이제 슬슬 진학 시즌인데. 유트는 카이샤로 진학한다고 해?”
“왜 유트만 자꾸 물어봐? 나도 오랜만에 만난 거 아냐?”
일주일 만에 마주한 에레사였다.
예전에는 하루에도 지겨울 만큼 마주쳤던 에레사지만, 지금은 달랐다.
“넌 항상 늦게 일어나니까 못 보지.”
에레사의 핀잔에 리에르는 할 말이 없어졌다.
요새 부쩍 늦잠을 잔 덕분이었다. 만약 에레사랑 같은 반이었다면 그럴 일은 없었다.
“사실 유트에게 관심 있는 여자애들이 많거든. 다들 유트가 카이샤에 진학할지 안 할지를 너무 궁금해하더라고.”
“유트 녀석은 바로 일할 것 같던데?”
“그래? 하기야, 유트는 동생이랑 둘이 살았지.”
에레사는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는?”
“유트 힘들겠다.”
“나는?”
“너? 너는 안 물어보던데?”
리에르는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물어라도 봐야지.”
“응? 진학이 가능해?”
에레사는 대단히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리에르는 팔짱을 끼면서 코웃음 쳤다.
“나를 뭐로 보고. 당연히 안 되지.”
“뭐야……. 그럼 졸업하고 뭐 할 거야?”
에레사도 리에르가 성적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옆집 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몇 번이나 개인 교사를 자처했지만 포기했었다.
“어차피 할 것도 없으니 카이샤에 진학해 봐야지.”
“아깐 안 된다며.”
에레사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되물었다.
리에르는 코웃음 쳤다.
“검술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지!”
“검술 대회……. 누가?”
“내가.”
“네가?”
“내가.”
에레사가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꿉친구를 위해서 뭔가 사실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차마 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어떻게든 될 거야.”
“어떻게든이 아니라……. 다칠지도 모르는데 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나도 수련은 열심히 했거든?”
리에르는 반발심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에레사는 진짜로 걱정스러운 듯이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너 나보다 약하잖아.”
“…….”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순수 검술만으론 나와 편안하게 대무하지도 못했잖아.”
에레사는 최대한 돌려 말하려 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재능이 없었다. 몇 번이나 포기하려 했지만, 몇 번이나 도전했었다.
손이 물집으로 터지고, 또 터져서 굳은살이 박일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약했다.
근력은 생겼지만, 그냥 어린 애들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 그래도 힘내.”
“어, 그래야지.”
그렇게 말은 했지만, 예선조차도 통과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아, 맞다. 다음 주부터 축제면 바쁘겠네.”
“뭐, 그렇겠지.”
“이번에 축제 같이 다닐 여자애는 구했어?”
갑자기 훅 들어오는 에레사의 말에 리에르가 긴장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축제는 가장 연인이 많이 탄생하는 기간이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기와 열띤 감정을 들뜨게 하기 때문이다.
고백하기엔 최고의 기간이었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날 뭐로 보는 거야.”
“어? 그럼 있어?”
에레사가 놀랍다는 듯, 의외라는 얼굴을 하였다.
리에르는 덕분에 약이 더욱 올라 아집을 부리며 되는대로 말을 내뱉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헤에, 그렇구나.”
리에르는 속으로 후회했지만, 이미 입 밖에 내놓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머리 좋고, 성격 좋고, 미인이고, 몸매까지 좋은 에레사는 이미 카이샤의 여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와 매년 함께 축제를 보냈던 남자는 다름 아닌 리에르였다.
덕분에 리에르는 뭇 남성들의 시기 어린 시선을 항상 받아내야만 했다.
따가운 질투 속에서도 리에르는 그저 우월감에 빠지는 행복함을 느꼈었다.
이번에도, 앞으로도 축제를 함께하는 사람은 에레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리에르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너무나 당연한 순서였다.
리에르는 알면서도 에레사에게 아까 받았던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넌 있냐?”
리에르의 물음에 에레사는 빙긋 웃었다. 해맑은 대답이 곧 들려왔다.
“응.”
“그래, 그럼 나랑 같이……. 응? 있다고?”
“응.”
그녀의 말에 리에르는 가슴속 한편이 쿵, 하고 내려 찍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나랑 함께이었던 것이 아니야? 누구랑? 남자냐? 그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미소는 뭐냐?’
리에르는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을 수습하지 못했다.
그런 리에르에게 에레사는 양손을 모아 턱을 괴며 쑥스러운 듯이 입술을 열어 보였다.
“사실 나 애인 생겼거든.”
“…….”
“우리 리엘이 같이 갈 여자가 없으면 내가 대신 가주려고 했었는데 많이 컸네? 나 대신 같이 갈 여자도 생기고.”
에레사는 웃으면서 즐겁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에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항상 자신과 함께했던 에레사였다.
자신 말고는 다른 남자가 있을 수 없었다.
리에르는 집으로 들어가면서도 무슨 대화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이 멍해졌다.
계속 불안하던 예감이 사실로 드러났다.
에레사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이었다.
리에르에게는 너무나 낯선 얼굴이었다.
자신이 만들어 줄 수 없는 얼굴.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미소였다.
* * *
“데려다줘서 고마워. 들어가.”
“바보냐, 우리 집 옆이 너희 집 아냐.”
에레사는 뚱한 리에르의 대답을 듣고서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너?”
“얼른 들어가기나 해, 멍청아!”
리에르는 쌀쌀맞은 대답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에르가 이상한 것이야 하루 이틀이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들쑥날쑥한 행동은 처음이었다.
‘케이크라도 만들어서 놀러 가면 기분 금세 좋아지겠지.’
에레사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할 것 없이 낙천적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는 오랜만에 리에르를 만나서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하지만 리에르는 인생 최악의 경험을 하고 있었다.
“엄마, 다녀왔어.”
“그래, 배고프지.”
“아니, 괜찮아. 쉴 거야.”
리에르의 모친, 라일라는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크보다 더한 식성을 가진 자기 아들이 음식을 마다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힘없이 방으로 직행하는 리에르를 보면서 라일라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아니.”
짧게 대답하고 계단을 오르던 리에르는 잠시 멈칫하였다.
“메뉴가 뭐야?”
“응? 오늘 신선한 치즈가 듬뿍 발라진 파이야. 어때 생각 있니?”
라일라는 자기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나는 먹을 것. 또 하나는 에레사였다.
리에르는 이 두 가지라면 아무리 기분이 울적해도 금세 기분이 들뜨는 성격이었다.
그러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라일라였다.
그렇기에 일부러 갓 구운 치즈 파이의 냄새를 풍겼다.
리에르는 올라가다가 잠시 움찔했다.
라일라는 치즈 파이를 꺼내어 접시에다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아들을 한 번 쳐다보았다.
리에르는 군침이 당기는지 치즈 파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부드러울 것 같은 파이 위에 신선하고 향긋한 치즈가 부드럽게 녹아 들어 있었다.
너에게 잡아 먹혀서 한 몸이 되고 싶다는 향기로운 유혹에 아찔함마저 느꼈다.
결국, 리에르는 쪼르르, 계단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신검합일이 아닌, 신빵합일이 되듯이 파이 한 조각을 입안에 집어삼켰다.
신선한 부드러움과 담백함이 입안에 퍼졌다.
침샘이 자극되자 뱃속의 거지들이 하모니를 울리는 듯 느껴졌다.
리에르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어 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리에르는 한숨을 쉬더니 힘없이 돌아섰다.
“올라갈래.”
보통 때 같으면 주변에 먹을 것이 다 떨어질 때까진 움직이지 않을 리에르였다.
오늘은 유달리 침울해 보였다.
라일라는 아들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람.”
라일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이 만든 파이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지만 참 알 수 없는 아들이었다.
“아, 빌어먹을.”
리에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침대 위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푹신푹신한 침대의 흔들림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편안해진 마음은 안정을 가져온다.
리에르는 팔과 다리를 쭉 펴고 누워 화를 삭이는 데 애를 썼다.
하지만 에레사의 얼굴은 금방 떠올랐다.
「사실 나 애인 생겼거든.」
리에르는 죄 없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생각만 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함이 끝도 없이 밀고 들어왔다.
쿵!
리에르는 혼자 발버둥을 치다가 침대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오랜만에 딱딱한 바닥의 기운이 등 너머로 느껴졌다.
‘에렌, 이 배신녀.’
리에르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식히며 중얼거렸다.
쑥스러운 듯이 살짝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
긴 금발 머리카락을 귀 뒤편으로 넘기는 에레사의 모습들.
리에르는 너무나 답답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소식이, 그에게는 가장 슬픈 소식이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