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01)
레필리아 레소드-201화(201/398)
레필리아 레소드 201화
천재 vs 천재(5)
실소를 머금는 리에르를 보면서 레이루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양손검을 말아 쥐었다. 생각보다 공주의 궁술 실력이 뛰어났다.
혼잡한 와중에 빠르게 움직이는 자신을 정확하게 쏜다는 것은 실력이 뛰어나다는 증거다.
지금 빨리 리에르를 끝내지 않는다면 위험했다. 레이루나는 이제 총력을 다하기 위해 힘을 끌어모았다.
유이의 서포트가 없었다면 위험할 뻔했다.
리에르는 자존심이 상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잊어먹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눈앞의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리에르는 아르카를 힘껏 말아쥐고서 얼굴 옆으로 검을 치켜세웠다. 그의 시야 안으로 레이루나 뒤편에 있는 유이가 보였다. 그녀는 다시 활시위를 길게 당기고 있었다.
레이루나는 리에르를 확실하게 도륙하기 위해 몸 안의 한기를 최대한으로 끄집어내면서 돌격해 왔다.
얼음송곳들은 마치 넝쿨처럼 솟아오르며 리에르를 향해 휘감겨 온다. 그 순간 리에르는 유이의 옆쪽으로 달려오는 교단 기사가 보였다. 피투성이인 교단 기사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유이에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저 바보 녀석!’
유이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근처에 에레사가 있다지만 그녀가 교단 기사를 막아낼 수 있을 리 없다.
엘 파실드의 신성 마력은 최고라고 들었으니 다친 상처 정도는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치료해 줄 수 있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 에레사가 엘을 칭찬하는 것을 보고 질투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엘은 포스를 사용하지 못하는 제약 덕분에 가더를 이끌고 싸웠다. 가더의 피해도 막심해서 계속 치료 마법을 구사 중이다. 즉, 마력 소모가 꽤 컸다.
혹시나 유이를 치료해 주지 못할 정도로 마력이 바닥날 수도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그녀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처참하게 목이 잘려 몸과 분리된 유이의 모습.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전신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상처 때문에 땀과 뒤범벅된 핏방울을 송골송골 흘려대는 유이는 어지러운 정신 속에서 오로지 리에르에게 집중했다.
에레사도 교단 기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리에르를 돕는 유이를 보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키이이익!
찢어지는 듯한 얼음송곳의 파공음이 위협적으로 솟아오른다.
레이루나의 혼신이 가득 담긴 일격이 순식간에 옥죄였다. 리에르의 손끝이 떨려온다. 선택의 기로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달려가도 이미 때는 늦었다. 교단 기사의 검이 유이의 잘록한 허리를 도려내기 위해 움직였다.
유이의 위험을 막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이 뇌리에 스친다.
페이서스의 비극, 시체의 산들이 매일 밤 꿈에 나타나 발목을 낚아채는 꿈, 살육자의 칭호. 트라우마들이 손끝을 떨게 하고 마음의 추가 무겁게, 무겁게 심연의 나락 속으로 떨어진다.
강력하게 몰려드는 마나의 기운은 이 혼탁한 세상에 너만이 유일하다고, 너만이 단 하나의 존재라고, 너는 우월하다고 소리친다.
그것들은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살육을 유혹한다. 한 번 빠졌었던 달콤함이기에 더욱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아는 리에르는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용하기를 거부했다.
‘빌어먹을.’
리에르의 등 뒤로 칠흑의 깃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레이루나는 리에르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끝이다!”
레이루나의 외침과 함께 거센 설 폭풍이 리에르를 향해 덮쳐졌다.
휘몰아치는 설풍 속에서 레이루나는 적의 최후를 의심하지 않았다.
티딕, 티딕!
얼음 결정들이 바람에 몸을 부서뜨리며 휘날렸다.
서걱!
서늘한 소리가 레이루나의 귓가에 들려왔다.
“뭐야……!”
레이루나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확장된 동공을 열며 비척거렸다.
배에서 치이익, 소리 내어 쏟아지는 핏방울들이 하반신을 뜨겁게 적셔오자 현실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 느껴졌다.
비틀거리면서 땅을 짚은 레이루나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피를 토해낸다. 그의 시야 안으로 칠흑의 빛 깃털이 허공에 춤추는 것이 보였다. 이미 리에르의 모습은 사라졌다.
서걱!
유이는 갑자기 옆에서 뭔가가 베이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재었던 시위를 풀었다.
옆을 바라보니 끔찍한 피 보라가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움직였다. 깜짝 놀란 유이는 활과 화살마저 손에서 떨어뜨린 채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선혈은 그녀의 루비빛 눈동자를 공포로 물들게 했다. 하지만 뒤에서 안아주는 따뜻한 누군가의 품은 기묘하게 안정을 준다.
익숙한 체취였다.
고개를 들자 피가 엉겨 붙은 리에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너…….”
유이는 얼어붙었던 입술을 달싹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동자를 열어 보였다.
리에르의 등 뒤로 펄럭이는 칠흑의 날개 한 쌍이 피어올랐다.
‘리엘…….’
에레사의 눈동자가 이질적으로 꿈틀거렸다.
리에르 본인이 위험할 때는 무서워서 사용하지도 못했던 포스였다.
그런데 유이가 위험에 처하자 망설이지 않고 포스를 사용했다.
에레사의 눈동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싸늘해지고 말았다.
* * *
“뭐, 뭐야 저거.”
경기병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티미는 당황해서 멍한 얼굴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적의 경기병은 양익으로 갈라졌다. 양쪽에서 엄습해 오는 공격은 밀집 대형에게 치명적이다.
정면의 적 방진에서도 화살이 쏟아졌다. 다른 화살도 아니고, 대륙에서 활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신궁 아로운이 이끄는 부대였다. 그가 직접 키우고 가르친 정예 궁병대는 파천대(破天隊)라는 일당백의 부대다.
“어차피 얕은수에 불과합니다. 우리 쪽 기병대도 움직이면 됩니다.”
“그렇군. 우리도 기병을 내보낸다!”
티미는 밀집 대형의 뒤로 대기 중이던 기병을 출정시켰다.
마갑을 입힌 전투마 위로 중무장한 성기사들이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검과 창끝에 오러를 상징하는 환한 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많은 수가 한꺼번에 오러를 발하니 장관이었다. 물론 적에게는 악몽처럼 보일 것이 분명하다.
“회군.”
유트는 망설일 것 없이 양익을 회수했다.
기병의 장점은 기동력이고, 그 장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경기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중무장한 중기병을 상대로 경기병이 이기는 것은 어려웠다. 일반 보병들이 경기병의 속도를 따라올 순 없겠지만, 중기병은 아무리 중무장을 했다 해도 기동력이 보병보다 월등했다.
“중보병 양익 진출.”
경기병이 양익에서 회군하자 유트는 긴 창을 든 중보병을 양 날개로 진군시켰다.
“중기병 회군.”
유트가 중보병을 꺼내 드는 것을 보고 빅스터는 중기병을 회군시켰다.
중보병으로 중기병을 막는단 것은 좋다.
하지만 교단의 밀집 대형은 아무 문제 없이 전진하고 있다.
페리안은 교단의 밀집 대형에 비해서 인원 배치가 적다. 당연히 교단이 수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기병의 숫자도 교단이 압도적이다. 같이 들이닥치면 페리안에서는 막을 재간이 없었다.
원래 밀집 대형의 싸움은 누가 밀리느냐의 싸움이다.
대형이 서로 부딪치면 상대의 열을 파괴하고, 또 파괴하며 앞으로 야금야금 파먹는 것이 정석이다.
기본을 뛰어넘는 기교는 없다. 아무리 기교가 뛰어나도, 이미 목에 칼을 대고 있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부분이 기병이나 궁병으로 된 페리안과 교단이 격돌하면 승리는 당연히 교단의 것이었다. 대형 전투에서는 중앙이 돌파되면 그대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빅스터는 유트의 도박과 가까운 수를 보고 초보자라고 판단했다.
“우익, 좌익 재차 출진.”
레온은 왕의 명령을 보내는 수신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이 있는 왕이니 까닭이야 있겠지만, 재차 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또 진출하면 적의 중기병이 들어올 것이 뻔했고, 그럼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시 적의 중기병도 본진으로 후퇴하는 것을 반복하는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시간을 끌수록 좋은 것은 유트군이 아닌, 밀집 진형을 갖추고 있는 교단군이었다.
어쩔 수 없이 레온은 우익 경기병들을 출정시키며 적의 밀집 진형을 측면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프세의 좌익도 레온과 나란히 적의 우군을 공략하자 자연스럽게 적의 중기병들이 다시 앞장서서 나왔다.
“양익 회군. 중앙은 밀집 방진으로.”
유트는 이번에도 똑같이 양익을 회군시키며 공격을 멈췄다.
그리고 상대의 밀집 대형을 막아내기 위해 방진을 형성하였다.
이미 적의 밀집 대형은 강력한 쐐기가 되어 들이닥친다.
같은 밀집 대형끼리 맞붙으면 무장 수치와 훈련도로 승리가 갈린다. 그리고 승리를 결정짓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대형을 이루는 숫자였다.
보병에 투자한 교단군은 종과 횡에서 압도적으로 많았고, 유트군의 종과 횡렬은 상대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중기병은 적의 날개를 꺾는다.”
빅스터는 아군의 밀집 대형의 적의 중진과 교전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희미하게 웃으며 명령했다.
안 그래도 밀리는데 교단의 중기병이 양 날개가 되어 페리안을 감쌌다.
“이겼다.”
티미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당연한 사실을 내뱉었다. 아렌 왕국에서의 대패를 씻은 듯 잊게 만들어주는 역전승이었다.
티미는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은 그 누구도 자신에게 함부로 굴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지휘관으로서 군림할 것을 생각하며 티미는 견고해진 자신의 입지를 떠올렸다.
티미는 자신이 타고 있는 기마 옆에 서서 턱수염을 매만지는 빅스터를 내려다보면서 이를 드러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일차적으로 빅스터의 머리를 좀 더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비록 하는 행동거지는 건방지고 마음에 안 드나, 그의 능력만은 티미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티미의 음흉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빅스터는 의아함이 찾아 들기 시작했다.
유트는 전면에 서서 아군의 사기를 극도로 상승시켰다.
지휘관이 앞에 서는 것은 너무나 멍청한 행위다. 지휘관은 단순히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승패를 가름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정보기 때문에 위험하다.
지휘관이 죽으면 이기고 있어도 자신들이 졌다고 생각하는 병사들이 많다. 그리고 전투를 포기해 버린다.
소수의 군대가 다수의 군대를 종종 그런 식으로 이기고는 한다. 하지만 그 위험함을 감수하는 장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영웅들이 아직까지 선두에 서는 것을 반복하는데.
그 장점이란 바로 사기(士氣)다.
군대에 있어 전투력을 극한으로 올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사기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이 첫 열에 서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주가 있다면, 옆에 있는 병사들의 사기는 짐작할 수도 없다.
“베리타스 뒤로 피하십시오!”
“전하, 이곳은 위험합니다!”
몇몇 장군급이 걱정스러워했다. 하지만 유트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다.
한 페리안의 병사는 적의 창에 찔려 죽을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유트 왕이 직접 그의 목숨을 구하고 정신없이 적병을 치는 것을 보았다.
“유트 왕이다!”
“저 녀석만 죽이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유트 왕의 목을 가져간다면 평생 사치를 부려도 모자라지 않을 금화를 얻게 된다.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진 병사들의 대열이 무너진다. 서로가 유트의 목을 취하겠노라 달려든다.
“전하를 지켜라!”
“빌어먹을 자식들! 단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그와 반대로 기사와 병사들은 유트에게 쏠리고 있는 적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왕의 목숨이 끝나면 패한다. 아니, 그것뿐만은 아니다. 지금 당장 자신들의 등에 목숨을 기댄 왕이 있다. 왕이라는 존재에 비하면 잡초나 다를 바 없는 목숨이다.
유트라는 젊은 패왕은 병사들과 함께 자고 함께 식사했다.
오늘의 전투에 이르기까지 그와 함께 식사하지 않은 병사가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