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02)
레필리아 레소드-202화(202/398)
레필리아 레소드 202화
천재 vs 천재(6)
‘좋지 않다.’
빅스터는 군세가 바뀌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전략적으로 완벽하다. 하지만 유트 왕의 주변으로 뭔가가 바뀌고 있었다.
적의 사기가 줄어들지 않는다.
계속해서 타오르는 듯한 적의 투지를 보고 빅스터는 눈을 찌푸렸다.
숱한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면서 그가 느꼈던 그 육감은 무언가 불안함을 예고하였다.
아무리 훑어보아도 적의 앞 열을 깎아내고, 아군의 시체를 밟고 적에게 창을 뻗는 교단군이 곧 적군의 중앙을 돌파할 것으로 보였다.
그 어떤 전술적 전투에서도 중앙이 뚫린 뒤에 승리하는 예는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빅스터는 자신의 불안함이 무엇 때문인지 의아했다.
교단군의 중보병들이 유트군의 중보병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뒤편으로 궁수대가 지원을 하고 있다지만 같은 선상에서 싸우는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기엔 어려웠다.
교단의 중기병과 페리안의 경기병 싸움은 팽팽했다. 아니, 살짝 페리안이 유리했다.
히트 앤드 런. 상대를 희롱하듯이 피하고 화살을 쏘아대는 경기병의 전술은 중기병을 지치게만 했다. 그러다 점점 중기병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페리안의 진형을 파고들어 가자니, 경기병이 마음껏 활개 치게 둘 수밖에 없었다.
빅스터는 그때 아군의 앞 열이 더 빨리 무너지는 것을 포착하고 의아함을 느꼈다.
수적으로 불리한 유트군은 경기병을 지키고 있던 창병들을 끌어내서라도 중앙 돌파를 막기 위해 애써야 했으나, 오히려 중기병들에게 창을 찔러댔고, 경기병들은 활과 검을 들어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무너지는 양익의 중기병들을 보면서 빅스터의 가슴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인해 두근거리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던 그의 눈 안으로 들어온 것이 있다.
페리안의 화살 숫자가 줄어들지 않는다. 이미 서로 전투가 시작되었는데도 말이다.
같은 위치 선상에서 쏘아내는 화살은 아군이 맞을 가능성도 크고, 적의 앞 열을 명중시키기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적의 곡사 사격은 끝없이 쏟아진다.
빅스터는 막막함에 자신의 턱수염을 뜯어내듯이 매만지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 우리가 이겼다!”
한껏 망상을 머릿속으로 그려내던 티미는 신이 난 듯이 자신의 보검을 하늘 높이 들며 소리쳤다. 그와는 반대로 빅스터는 아군이 위험한 것을 바라봤다.
적의 궁병이 상당히 뛰어나다. 적의 경기병이 뛰어나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전면에 선 유트 왕의 존재다.
큰 공을 세우고자 허락 없이 전열을 어지럽히는 녀석들 때문에 대열이 무너졌다.
“아직 아닙니다. 지금 남은 성기사를 보내 적의 후미를 쳐야 합니다.”
빅스터는 평지처럼 보이지만 페리안 쪽의 고지가 좀 더 높은 것을 확인했다.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높이 있는 쪽이 밑에 있는 쪽을 상대하기가 더 쉽다. 시체가 쌓이고, 적이 늘어갈수록 그 차이는 심해진다. 더군다나 적은 궁병이 많다. 단순 화력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가졌다.
‘설마.’
빅스터는 아까 페리안이 무의미하게 움직였던 양익의 기병 돌진을 떠올렸다. 분명 페리안에게 있어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은 없다.
‘그것은 눈속임이었던가.’
단지 평지가 아니라는 것을 속이기 위한 작은 눈속임.
당장 나라의 국운이 걸린 대전이 벌어진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그런 상황에서 이런 작은 것까지 신경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스물이 조금 넘은 나이에.
빅스터는 상대의 얕은수를 때려 부수기 위해서 예비대를 움직였다. 본진을 지키고 있던 100기의 성기사들이다. 이들은 정예 중의 정예로, 적의 허리를 칠 생각이었다.
교단의 정예 성기사가 진출했다. 빅스터가 쏜 부대는 화살이 되어 페리안의 허리를 삽시간에 잘라먹는다.
“끝이군.”
티미는 이를 드러내 웃었다.
“우리의 승리다.”
유트는 미소를 머금었다.
어지럽게 서로 뒤엉켜서 싸우고 있을 때, 갑자기 언덕 위로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던 티미는 갑자기 나타난 부대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빅스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 갑시다. 베리타스에게로.”
300의 기병대를 이끌고 붉은 머리칼의 지휘관이 나타났다.
리즈 지센라이드를 선두로 한 군대가 적 허리를 노리고 오는 예비대의 허리를 공격하기 위해 돌진했다.
리즈는 선두에 서서 말을 탄 상태로 손을 머리 위로 추어올렸다. 그가 나지막하게 조소하며 주문을 외웠다.
붉은 번개가 그의 손에서 머금어지며 주변을 어둡게 내리깔았다. 그것을 본 교단군이 두려움에 벌벌 떨기 시작했다.
곧 리즈의 마법이 적에게 쏟아졌다.
쿠콰아아앙!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이 울린다. 그리고 정신없는 적에게 급습을 가하기 시작한다.
리즈는 병력 500 중 200은 강으로 진군하는 시늉만 했다. 그리고 몰래 300을 빼돌려서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렸다.
유트와 리즈가 빅스터를 방심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함성과 비명, 외침과 강철의 유린. 그 모든 것이 아우러진 죽음의 향연 속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겨야 할 교단군의 밀집 대형이 차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없이 쏟아지는 화살 비, 그리고 쌓여만 가는 시체의 산.
빅스터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등장한 리즈의 지원부대는 교단의 예비 부대를 말 그대로 박살 냈다.
좌익과 우익의 대결은 팽팽하다. 아니, 근소하게 페리안의 경기병이 우위를 자랑한다.
하지만 절대적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우세한 중앙 밀집 전투도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기에는 곧 중앙 돌파당하고 양분될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페리안의 진형이 단단했다.
빅스터는 모든 것이 허탈해졌다.
완벽한 패배였다.
그동안 전장에서 쌓았던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며 빅스터는 차마 후퇴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패전할지라도 아군의 총대장을 적 진영에 넘겨주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총대장을 모셔라! 남은 병사들은 적 기병을 막는다. 무기를 들어라!”
빅스터는 광기 어린 목소리를 내뱉으며 망토로 가려졌던 팔을 펼쳐 바쁘게 지시하기 시작했다.
허술하게 보였던 페리안의 진형은 처음부터 교단의 밀집 대형을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졌었다.
패배의 이유는 세 가지였다.
언뜻 봐선 그 누구도 몰랐지만, 평지는 약간의 고저를 가지고 있었다.
5㎝의 고저.
유심히 본다면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전장에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 그것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또한, 5㎝가 의미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공성과 수성 간의 기본 관계와 같은 구조였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에 있는 성의 사수들을 격추하긴 어려움이 있어도, 성의 사수들이 낮은 곳에 있는 사수를 겨냥하긴 손쉽다.
약간의 고저로 인해 페리안군의 중앙은 등 뒤로 사수들의 원호를 받을 수 있었고, 당연히 순수하게 정면으로만 치고받는 교단군의 피해가 점차 늘어갔다.
전투에 있어서 위에서 공격하는 사람과 아래에서 공격하는 사람의 유리함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쌓이기 시작하는 시체에 비해서 앞으로 나가는 것이 느리다. 교단군은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아로운의 파천대다. 원래 전투는 밀집 대형으로 모든 승부가 끝난다. 혹은 천재적인 기병 전술로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한다. 궁병은 절대로 전술의 중심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신궁 아로운이 직접 이끄는 파천대는 달랐다. 이들은 끝없이 보급해 주는 화살을 가지고 마치 비처럼 뿌려댔다.
마지막 세 번째는 유트의 존재다.
아무리 영웅의 아들이라 해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서 왕이 될 수는 없다. 하물며 전쟁 영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능한 존재였다. 유트 페브리안은.
그것도 무와 지를 전부 가지고 있는 지휘관이자, 신하를 아우르는 카리스마를 가진 젊은 인재였다.
그것도 직접 병사를 이끌고 선두에 서니 사기가 드높았다.
이 세 가지가 서로 뒤엉키니 아무리 빅스터 나이브만이라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티미는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일단 몸을 피신하기 위해 말을 몰기 시작하였다.
그의 수행원인 기사 몇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빅스터는 적어도 총대장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군사들을 정렬시켰다.
교단의 군대는 대다수 인원이 코스모스 교리를 따르는 광신도였기에 죽으라는 명령에 망설임은 없었다.
빅스터는 자신이라면 모를까 애꿎은 병사들만 죽게 해야 한단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적군의 기사, 레온 폴 하르츠가 기사를 이끌고 진격해 오고 있었다.
교단은 더 이상 군을 지휘하는 깃발이 올라오지 않았다.
밀집 대형은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만 남게 되었다.
혼란스럽게 서로서로 몸을 부딪히고, 자기들끼리 발에 걸려 넘어지고 짓밟히는 것을 반복했다.
서로 약속한 바도 없었는데 교단의 병사들은 하나, 둘씩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땅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시체로 이루어진 산의 뒤편으로는 무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울타리가 시커멓게 올라섰다.
더는 전장을 아우르던 소음들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 혼란스러웠던 전투가 언제였냐는 듯이 전장이 고요함으로 감돌았다.
빅스터는 티미가 멀찍이 도망간 것을 확인했다.
최소한 총대장이라도 도주시키는 것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였다.
천재 군사라고 불렸던 빅스터의 최후치곤 너무나 빈곤하기 짝이 없었다.
화려한 경력에 비해 날개를 펴지 못한 새는 자신의 목에 닿는 차가운 검날을 보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청년은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가 빅스터 나이브만인가?”
“그렇소.”
“무기를 내리라고 명령해 주시오.”
쓸데없는 희생을 치를 필요가 없다는 말. 그런 것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는 빅스터는 레온의 말에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병사들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더는 싸울 필요가 없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피투성이로 정신없이 전투를 치르고 있던 교단의 병사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빅스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그들은 필사적으로 반항하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이 하나둘씩 무기를 땅에 버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나의 주군께 모셔가야겠소.”
“승자의 뜻대로 하시오.”
빅스터는 비록 패자였으나 당당했다. 아니, 오히려 레온은 패자에게 위압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빅스터는 무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즉, 기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주인을 위해 도주 시간을 벌어주고, 스스로 희생하는 모습은 훌륭한 기사도와 맞물렸다.
처음 유트를 보았을 때는 나이 어린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레온은 이제 그 누구 왕의 한쪽 팔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 역시 유트를 위해서라면 명문 귀족 집안이라는 배경도 버리고 목숨을 다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런 그에게 빅스터의 행동은 존경심을 우러나게 하였다.
레온은 빅스터를 포박하지도 않은 채, 말을 내주어 자신과 나란히 움직였다.
포로인 자를 포승줄로 묶지도 않았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이견을 말한 자는 없었다.
심지어 적을 굴복시키고 전선을 추스르고 있는 유트 페브리안조차 이견을 말하지 않았다. 빅스터는 유트를 가까이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선황의 곁에서 많은 전쟁에 참전했던 빅스터는 중년에 이르러 자신의 능력을 정점으로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런 자신을 패배시킨 군주는 생각보다 젊었고, 생각보다 빼어난 미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