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03)
레필리아 레소드-203화(203/398)
레필리아 레소드 203화
천재 vs 천재(7)
빅스터는 눈을 내리깔며 주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탄식을 내뱉었다. 애초에 빅스터가 생각한 그림은 유트군을 일망타진한 이후에 리즈가 이끄는 잔여 병력을 토벌할 예정이었다.
유트 왕은 빅스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빅스터는 젊은 왕이 자신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담담하게 바라봤다.
이제 그에게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패전한 장수는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목숨을 잃는 것이라 하여도.
“이 사람이 오제 중 하나인 빅스터인가요?”
유트의 곁으로 붉은 머리카락의 미남자가 다가왔다.
리즈 지센라이드. 페리안의 재상이자, 일등공신인 인물이다.
유트 못지않게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니 빅스터는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전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리즈는 빅스터 쪽을 한 번 흘낏 바라봤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수도 쪽은 전부 정리되었답니다.”
“무사한 겁니까?”
안 그래도 유트는 유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교단의 변칙적인 찌르기는 치명적이었다.
수도에서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병력이 없었기에 내심 크게 걱정하고 있던 찰나였다.
“리에르군이 제때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리에르가.”
유트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 녀석이 있다면 유이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기사들은 두 손을 부여잡으며 드디어 굳어졌던 표정들을 풀었다.
상기된 아군의 분위기를 보면서 유트는 노골적으로 안도했다.
모두 환희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빅스터만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병력도 하나 없는 왕성에서, 정예 중의 정예들만 추리고 교단 최강의 검사인 레이루나마저 출동했는데 실패할 줄은 몰랐다.
이것도, 저것도 완벽한 패배였다.
“전하, 빅스터 나이브만을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비록 적이지만 오트리아 제국의 그 누구보다 널리 알려진 전략가, 빅스터 나이브만.
그로 인해서 선황은 숱한 전적을 올렸고, 넓은 땅덩어리를 더욱더 펼쳐내면서 제국의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작스러운 선황의 죽음 이후 빅스터는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다. 그는 이곳저곳을 전진하다가 아크우드 가문 밑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흐음.”
유트는 긴 호흡을 하면서 맑은 두 눈을 떴다.
“일단 먼저 해야 할 것이 있군요.”
“맞습니다.”
리즈가 빙긋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유트는 자신의 무기를 높이 들어 올렸다. 젊은 패왕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아군도, 적군도 마찬가지였다.
“제군들의 눈부신 용맹으로 우리 페리안이 이 땅 위에서 승리했음을 선포하겠다!”
유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우와아, 하는 커다란 함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지를 두드리는 함성을 들으며 빅스터는 두 눈가를 여미었다.
전장에서 살아온 지 30여 년이 된 지금, 생애 첫 대패를 당했다.
망해가는 오트리아 제국에 이 정도로 용맹한 사기를 지니고 있을 군대가 또 어디에 있던가?
빅스터는 페리안이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 더더욱 강해질 것을 느꼈다. 교단에게 승리함으로써 주변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영지는 전부 페리안에게 복속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페리안은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가 될 것이 뻔했다.
총대장이었던 인물부터가 차이가 난다.
패왕의 자질을 가진 유트와 폭군의 자질을 가진 티미.
맹목적인 교리에 따라 목적 없이 칼을 휘두르는 교단의 병사와 신념을 가지고 칼을 든 페리안의 병사.
적의 군사인 리즈와의 싸움은 자신의 경험으로 어떻게 해서든 한 발 앞장섰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이미 무너진 저울추를 달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치지 않는 군의 함성이 성이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 아키서스 성에 숨어 있던 시민들도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승리를 기뻐했고, 앞으로의 평화를 감사했다.
유트는 다시 한번 도를 들어 올렸다. 예리하게 반사광을 일으키는 유트 페브리안의 무기를 보면서 일시에 군의 함성은 멎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 누구의 침략도 허용치 않을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제국을 건설할 것이다. 앞으로도 그대들의 힘이 나의 창과 칼이 되어 페리안을 번성시켜 주길 바란다!”
다시 한번 함성과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것을 바라보는 빅스터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저 얼굴만 잘생긴 청년이 아닌, 기개가 넘치고 재량이 보이는 왕의 모습은 마치 오트리아가 대륙에 빛을 발하던 선황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유트를 보면서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는 빅스터는 입을 다문 채로 눈을 감아 내렸다.
빅스터를 포함한 포로들은 아키서스 성으로 인도되었다.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하는 바닥 물을 들어내는 작업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가장 전투를 많이 한 전방의 부대들은 특별히 휴식하게 되었고, 후위에 배치되었던 잔존 부대들과 적의 포로들이 성 복구 작업에 이용되었다.
시민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뒤로 한 채, 성의 작업을 돕는 교단 군들은 어색한 몸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신들의 운명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렌드 강의 주둔군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것을 격파하러 곧바로 움직인 것은 리즈였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200과 자신이 이끌고 있던 300을 합쳐서 주둔 2천을 박살 냈다.
리즈가 학살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자연스럽게 사기가 땅으로 떨어진 주둔군은 너 나 할 것 없이 항복해 왔다.
만약 리즈가 아니었다면 이들은 끝까지 저항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즈는 다시 한번 공을 세우고 돌아와 아키서스의 병사와 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핏물로 목욕을 한 것 같은 리즈의 모습은 누가 봐도 두려웠다. 하지만 같은 살인마라 하더라도 전쟁 영웅은 대우가 다르다.
그 모습을 보고 리즈는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베리타스께는 조금 있다가 찾아뵙겠노라 전해주세요.”
리즈는 시종이 건넨 타올을 받아 얼굴과 머리를 닦아냈다. 시뻘건 핏물이 삽시간에 타올을 붉게 적신다. 그것을 보고 시종은 움찔했다.
단순히 피 때문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유유자적하게 행동했던 리즈지만 오늘은 굉장히 날카로워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지금 매우 피곤했다. 피를 많이 봤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괴로웠다.
적색 망토를 땅바닥에 끌며 걸어 나가는 리즈의 앞을 기사도, 병사들도 두려운 듯이 길을 비켜서기 시작했다. 몸을 적신 수많은 핏자국이라면 자신뿐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을 거로 생각했고, 억지로 참아낸 목마름이 미친 듯이 머릿속에 뜨거운 고열로 남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손을 뻗으면 수많은 이들의 목을 벨 수 있다.
그들의 목에서 흘러넘치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생명을 취한다면 이 미칠 듯한 고열과 목마름은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리즈는 망토를 벗어 던졌다. 그동안 잠들어 있던 핏방울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리즈는 머릿속에서 고열이 속삭이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생명을 취하라고, 목마름을 해결하라고.
씻는 것도 포기한 채로 옷을 벗어 던졌다.
침대 위로 쓰러지듯이 누운 리즈는 눈가를 여미었다.
떨려오는 손의 감각이 무미건조하다. 항상 흠모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이 공포로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쯤 전투에 대한 전황을 보고하고, 이후의 일을 의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포로들에 대한 처우도 결정될 자리다.
그런 것을 처리할 수 있는 인물은 리즈였다. 하지만 좀처럼 목마름이 진정될 생각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폭주할 것 같았다.
미래가 창창하고, 키우는 맛이 있는 유트 페브리안이다.
그런 그의 목을 꺾어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싶었다. 지독한 욕구가 자꾸 고개를 든다.
애초에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포스 오브 머더러가 사람을 지킨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일이었다.
‘세상을 지키는 영웅이 되어야 해.’
지금은 곁에 없는, 다시는 함께할 수 없는 여인이 했던 말이다.
항상 같은 시간을 공유했던 진녹색 머리카락의 여성을 떠올렸다. 사랑의 저주로 미쳐 버린 그녀와의 시간은 행복했지만, 아픔만이 가득했다.
일그러진 자신의 세상 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로 여겼던 그녀에게 배신을 당했던 기억은 아직도 파편이 되어 남아 있다.
그녀가 지키려는 세상을, 모순된 사랑으로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복수한다. 엷은 미소가 리즈의 입가에 그리워졌다.
-리즈, 들리나요?
엘 파실드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리즈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포스로 인해 감정이 격해진 지금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쉬고 싶었다. 그것이 설령 엘이라고 해도.
“말씀하시죠, 엘.”
이전의 부드러운 어조가 아니고 다소 딱딱한 말투인 것을 느꼈는지 엘은 걱정스러운 듯이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은 듯하군요.
“당신과는 달리 난 학살자로 태어났으니까.”
유일신을 부수고 자신의 세계를 되찾으려 하는 엘과 유일신이 만들어낸 학살자인 리즈는 너무나도 달랐다. 둘 다 정중한 말투로 속을 감추고 지내면서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살아온다.
-당신의 저주가 풀릴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유일신을 멸할 수 있는 강력한 존재, 리에르 아르빈트만 있으면 뒤엉킨 운명의 틀을 부술 수 있었다.
리즈에게 있어선 저주받은 숙명을 벗어버릴 기회였고, 엘에게 있어선 평생의 염원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소중한 존재는 뭘 하고 있답니까?”
-글쎄요, 그는 눈치가 빨라서 제가 지켜보는 것을 바로 알아챕니다. 덕분에 들여다보기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지금쯤은 오붓한 데이트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엘의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고생한 리즈에겐 죄송하지만 한 가지 더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뭔가요?”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 족했다. 이 이상 무언가를 했다간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어서 큰 사고를 치고야 말 것 같았다.
그렇기에 리즈는 엘이 어떤 부탁을 하든지 일단은 휴식을 취하고 나서 행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리즈에게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 튀어나왔다.
-유트 페브리안을 죽여주세요.
리즈의 루비빛 눈동자가 천천히 열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 다시 한번 엘에게 같은 말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말았다.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의외였나요? 페리안의 왕, 유트 페브리안을 죽여야겠습니다.
유트를 도와 페브리안의 왕가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뜻을 가졌던 엘과 리즈였다.
리즈는 그래서 유트의 행적을 따라나섰고 이후에는 그가 자신의 세력을 굳히는 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이제 승리를 거두고 나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를 암살한다는 것은 리즈로서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째서입니까? 엘.”
리즈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설정치까지 잘 해주었습니다. 더는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리에르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될 게 뻔하므로 지금 제거해야 합니다.
리즈는 괴물로서 살아왔고, 스스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아르미안에게 쓰디쓴 배신을 당한 이후로 감정이란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느꼈었으나, 착각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리즈는 당황하고 있었다.
“유트 페브리안은 이용가치가 충분합니다. 곧 교단의 중심을 치기 위해선 그의 힘이 필요합니다.”
-네, 맞아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그의 여동생 유이 페브리안도 충분한 이용가치가 있어요. 유트 페브리안은 우리 뜻대로 움직이기엔 이제 너무 성장해 버렸어요.
분명히 유트는 생각 뛰어난 인물이었다.
유트 페브리안을 죽인다.
리즈는 분명히 누구든지 죽이고 싶은 목마름을 느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유트의 얼굴이었다.
그를 죽여서 우월함을 증명하라고 머릿속에서 계속 들려오는 속삭임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을 돕기 위해서 네버 에이지의 부하들이 곧 지원하러 갈 겁니다.
네버 에이지의 부하?
리즈는 지금 이야기가 정리가 안 되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네버 에이지가 왜 나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혼란을 틈타서 유트 페브리안을 확실하게 죽여주시면 돼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엘의 말은 리즈가 듣기에 타당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유일신에게 농락당하는 세상을 재창조하기 위해선 희생은 필요한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