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04)
레필리아 레소드-204화(204/398)
레필리아 레소드 204화
천재 vs 천재(8)
엘과 리즈는 한배를 탄 이래, 의견이 충돌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많은 부분에서 서로를 닮아 있었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내왔다. 그것을 세상에서는 친구라고 불렀다.
서로가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존중해 왔다.
리즈의 의견을 엘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엘의 의견을 리즈는 적극적으로 수렴하였다.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다.
두 사람의 동맹은 이전부터 이어져 왔다.
폭주하는 유일신을 막기 위해 세상을 재창조하여 생명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려 했다.
그것이 엘과 리즈의 목적이었고, 신세계의 신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이유였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장기 말을 선택했다.
첫 번째 말은 당연히 리에르 아르빈트다. 정상 각성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었으나 아르미안의 음모로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
새로이 세워진 엘의 계획을 위하여 신흥 세력을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 지목된 상대는 리에르의 지인인 유트 페브리안.
은회색 머리카락의 잘생긴 소년은 지혜로웠고 용맹했다.
처음에 페이서스에서 떠나려는 유트, 유이 남매를 뒤따르기 시작했을 땐 그들의 경계가 심각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리즈는 진심으로 실웃음이 배어 나왔다.
지금은 몰라볼 정도로 성숙하고 아름다워진 유이도 둥그런 눈을 들어 리즈를 잔뜩 경계하면서 눈빛을 희번덕거렸었다.
조그마한 토끼가 맹수 흉내를 내고 있으니 그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닌지라, 인간을 싫어하는 리즈로서도 왠지 관심이 생겨났다.
그중 눈여겨볼 만한 것은 엘에게 지목받은 유트였다.
리에르를 감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트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분명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청년이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고, 열을 알려주면 능히 백을 바라보는 청년.
세상은 그러한 존재들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 못하여, 단순한 단어로 호칭하고 말아버린다.
천재.
엘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매를 관찰하고, 보호하고 인도하였다.
유트 역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맹랑하게도 리즈를 이용하고 있었다.
부족한 자금을 리즈에게 조달하도록 하였고, 필요한 지식을 캐내는 데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리즈는 알면서도 유트에게 속아주는 척,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생활하였다.
1년, 그리고 또 1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두 사람이 성장했다.
유트는 놀랄 만큼 늠름해졌고, 스스로 타인에게 벽을 만들고서 대화하는 버릇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잘생긴 얼굴에 감춰진 카리스마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는 아버지의 신하들을 하나씩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군사력으로 세력을 늘리기 시작한 유트는 순식간에 신흥 강자가 되어갔다.
유이도 둥글둥글했던 얼굴이 점차 갸름해져, 페리안의 꽃이라 불렸다. 뭇 남성들을 울릴 미모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성격만큼은 여전하였다.
「리즈, 밥 해줘.」
루비빛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당연하다는 듯이 새침하게 말해온다.
은빛 소녀를 보면서 리즈는 기가 막힌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수십 년 동안 자신이 조용히 지냈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역사의 한 페이지 속에서 희대의 살인마로 쓰인 그 포스 오브 머더러였다.
이전 같았으면 ‘당신의 머리통으로 요리를 해도 좋다면.’이라고 대답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리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식칼을 들고 있었다.
탁탁탁!
도마 위에 채를 써는 자세가 제법 익숙하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요리에는 익숙해졌다. 나름 자신도 할 수 있다.
천재적인 살인마인 자신이 음식을 갖다 바쳐야 하는 신세가 되어 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느껴보지 못한 유쾌함이 느껴졌다.
채소를 씻고 볶고, 묵묵히 생선을 다듬는다.
유트나 유이도 처음엔 리즈의 정체를 몰랐지만,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오히려 유트는 리에르와 같은 포스라는 것을 알고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고 좋아했다.
대담한 것인지, 아니면 바보인지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당신 덕분에 제가 꿈꾸던 미래에 몇 발자국 빨리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언제인가 리즈 혼자 달빛을 안주 삼아 자작하던 때가 있었다.
유트는 어떻게 알고 찾아와 술잔을 따라 주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의 순수한 웃음과 미소를 보면서 리즈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트의 눈빛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신용과 신뢰가 느껴졌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많은 위험과 생사고락을 같이했었다. 자연스럽게 페브리안 남매는 리즈를 믿었다.
과연 그 믿음을 배신당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리즈는 궁금했다.
이들을 돕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자신들의 계획에 필요한 톱니바퀴기 때문이다.
자조적으로 웃던 리즈는 유트가 따라준 술을 붉은 입가에 머금으며 달빛을 올려다보았다. 더럽게도 밝았다.
“사람을 믿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유트.”
리즈는 굳어졌던 얼굴로 웃음기를 머금었다. 유트도 어느새 손안에 잔을 쥔 것을 보고 리즈는 그윽한 향기를 뿌리는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당신은 제 스승이니까요.”
재능만 넘치던 유트라는 원석을 몇 년간 갈고닦은 단 하나의 남자.
음탕한 귀족 집안의 부인에게 농락당하며 살아오고, 피는 이어져 있지 않았지만 단 하나의 가족으로 여긴 첫사랑의 여성을 잃고 스스로 죽음을 생각하던 인생.
순탄치 않았던 인생, 비극만 가득하고 지옥 속에서 숨 쉬고 눈뜨던 살육자는 유트의 말에 싫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그의 말을 들은 그때부터 무언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 * *
-유트 페브리안을 죽여주세요.
엘의 냉랭한 말이 떨어진다.
리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리즈의 대답을 들은 엘이 말이 없다.
잠시간의 정적을 틈타서 성 내부에 다시 한번 환호성들이 울려 퍼졌다.
병사들이 술과 고기를 먹으며 승리를 자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이라도 들은 건가요? 포스 오브 머더러, 리즈 지센라이드가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그대가요?
“아니요, 유트 페브리안을 죽여도 상관은 없지만, 그는 아직 이용 가치가 큽니다. 겨우 이 정도 일하고서 죽일 거라면 그를 키우지도 않았습니다.”
리즈의 말에 엘은 다시 말이 없었다.
승리의 기쁨으로 노래를 부르고 검투를 즐기고, 술을 마시는 병사들을 생각하며 리즈는 최악의 수를 생각하였다.
-전 리즈가 반대하리라 생각 못 했어요. 이미 그쪽으론 네버 에이지의 정예들이 출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부 제거하겠습니다.”
리즈의 말에 엘은 적지 않게 당황한 듯 다시 한번 말 없는 정적만을 내보내었다.
아군 몬스터 부대를 전부 제거하겠다는 의미는 쉽게 말해서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면 적대하겠다는 의미였다.
-리즈, 우리가 하려는 일을 잊은 거예요?
“아니요,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번엔 리즈 쪽에서 한 템포 쉬면서 대답을 지연하였다. 엘 파실드는 항상 정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지만 리즈 자신 못지않은 광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만약에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편끼리 싸우게 된다면 교단 쪽만 좋은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엘 파실드 또한 모르지 않았다.
“제가 만약 당신이 관리하는 리에르 아르빈트를 죽이겠다면 어떻겠습니까?”
엘은 리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텔레파시가 막대한 마나를 사용하는 기술도 아니고, 서로의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유지 가능한 마법이기에 힘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마음먹는다면, 우리와 뜻을 맞추지 않을 위험인물은 리에르입니다. 그런데도 전 그를 죽이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죠. 그것은 당신의 재량에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유트 페브리안 역시 내가 만들어낸 나의 무기입니다. 그를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이 리즈의 생각인가요?
“그렇습니다. 엘, 당신은 너무 서두르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미 운명의 흐름은 우리에게 왔으니 일을 급하게 처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리즈의 말에 한동안 엘은 답이 없었다. 오랫동안 생각하는 엘을 보면서 리즈는 혹시 모를 싸움도 대비하려 했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이 다르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험하디 위험한 길을 건너게 된다.
한 번도 서로 겨뤄본 적은 없었지만, 첫 번째 포스자로서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차원 이동자로서 남들과는 다른 힘을 소유한 엘을 이기긴 어렵다.
하지만 유트 페브리안을 이렇게 죽게 하기에는 아까웠다. 아니, 그렇게 죽게 둘 수 없다.
리즈 스스로도 감상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자신도 그러니 엘이 보기엔 어떻겠는가.
-알겠습니다. 유트 페브리안을 제거하는 문제는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네요.
다행히도 엘이 한발 물러서서 리즈의 생각을 따라주었다.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는 리즈의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마음을 이해해 준 것인지는 모른다.
두 사람이 대립각을 세우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유트 페브리안 암살 이야기를 끝으로 두 사람은 평범한 대화를 주고받고 텔레파시를 끊었다.
“하하.”
엘은 리즈와의 대화가 끝난 후 마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람을 죽이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살인마. 그런 살인마가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좋을지 나쁠지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아니, 리즈 지센라이드라는 희대의 살인마는 항상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 인물들이 지금껏 없었을 뿐.
그도 아르미안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애정에 미친 듯이 굶주렸던 존재였다.
엘은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페리안의 수도에서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후하하.”
엘은 자신의 백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리즈.”
엘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웃음을 흉내 냈다.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거부할 거라는 것을.”
엘의 동공에서 초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앞이 아닌 한참 후를 내다보고 있었다.
“역시나 당신도 그 정도 그릇밖에 되지 못하는군요. 미리 확인해 보길 잘했어요.”
엘의 낄낄거리는 웃음에 입이 귀 끝까지 찢어질 듯이 벌어졌다.
“하하하하, 결국은 내 그릇과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잖아요.”
평소와는 다른 엘의 차가운 말과 냉랭한 눈빛은 일그러졌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명백하게 분노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끝에는 처연함이 담겨 있었다.
어차피 혼자서 가야 한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엘이 광기를 드러내며 차갑게 웃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는 카르샤는 입술을 닫고 있었다.
* * *
‘일단은 된 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리즈는 눈가를 가리는 붉은빛 앞머리를 이마 위로 쓸어 올렸다.
자신이 이상해진 것인지, 아니면 이상해졌던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인지. 리즈는 지금 이 순간 안도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스스로 안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엘과 적대하지 않게 된 일? 아니면 조급해하는 엘을 진정시킨 일? 그것도 아니라면 은회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죽게 되지 않은 일?
스스로의 생각이 어처구니가 없어져 엷은 붉은빛 입가가 길게 미소 지어졌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난 내 생각을 관철한다. 그것뿐이다.’
세상에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리즈는 엘 파실드조차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트도, 유이도, 페리안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하나하나가 자신의 장기 말일 뿐, 모든 것은 이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리즈는 붉은 루비 같은 눈동자를 열며 조소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생각과는 달리 훗날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