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05)
레필리아 레소드-205화(205/398)
레필리아 레소드 205화
전쟁의 끝, 그리고 평화(1)
교단의 기사들이 공격한 지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평화로웠던 페리안 수도를 침범한 교단 기사는 대다수 죽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금발의 기사는 항복했다.
패왕 지크 페브리안의 사후,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 북방 대륙은 야만족이 되었다.
절대적인 약육강식의 세계.
타인의 것을 빼앗는 것이 일상이었다. 약하면 무엇도 가질 수 없다. 강자에게 착취당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과도 같았다.
약육강식.
아주 간단한 법칙 아래 돌아가는 북방 대륙은 평화로운 곳이 없었다. 마을 도로에서 시체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지역마다 도적 떼들이 들끓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마을은 용병 부대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용병 부대는 양날의 검과도 같아서 도리어 마을을 습격하는 도적 떼가 되기도 한다.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화전민 마을은 용병을 고용할 금액이 없어 자경단을 꾸리기도 했다. 하지만 큰 의미를 갖진 못했다.
싸움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과 농사를 하는 사람은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다.
곳곳마다 날뛰는 도적단은 서로의 세를 과시하며 마치 경쟁하듯이 약탈을 하고 노예 시장을 운영하였다.
무법천지의 세계를 이루던 북방 대륙에 새로운 질서를 창립하고 만들었던 것은 유트 페브리안의 아버지, 패왕 지크였다.
무법천지로 약자를 갈취하며 살아가던 조직들을 힘으로 제압하고, 군대 규모로 자리 잡은 도적들에겐 뛰어난 지략과 전술로 쳐부순 지크 페브리안이 만든 질서.
그 질서는 북방 대륙의 평화를 가져왔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내일을 만들었다.
그 잠시간의 평화는 지크 페브리안이 불의의 사고로 죽고 나서 그를 따르던 수하들도 흩어지게 되었다.
다시 북방 대륙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다시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르자, 평화라는 단어는 잊혔다.
지크의 이름이 그리워질 때, 그의 아들인 유트가 다시 북방에 나타났다.
평화를 그리워하던 많은 사람이 패왕의 핏줄인 유트를 반겼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무법자들을 부서뜨리기 시작했다.
그런 유트의 활약이 소문나자 사람은 모여들었고, 인재들이 찾아들었다.
패왕이었던 아버지와 같이 유트도 자신의 근위 기사를 만들게 되었다. 레온, 프세, 테스타롯사. 세 명의 출중한 인재들은 근위 기사가 되어 유트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였다.
그들과 함께 유트는 아버지가 이전에 만들어 두었던 안배를 타고 빠르게 세력을 형성하였다.
유트로 인해 다시 시작된 평화를 교단의 군대가 침략해 옴으로써 다시 비극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시민들은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아키서스의 공방전에서 페리안이 대승을 거두며 교단의 위협을 물리쳤다.
아리아 대륙에 신흥 강국이 등장했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유트 페브리안은 여러 도시와 영지를 들르면서 천천히 복귀하고 있었다.
젊은 영웅 유트의 귀환을 반기는 도시의 시민들은 한바탕 축제를 벌였고, 수도에는 또 다른 영웅에 관한 이야기로 들끓고 있었다.
왕의 친구이자 새로운 근위 기사. 정보는 없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영웅에 시민들의 관심이 쏠렸다.
오랫동안 지켜지길 바라던 평화가 깨어지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
순식간에 적을 일망타진한 리에르의 소문으로 매일 밤, 수도의 주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왕성 안에 지인이 있는 몇몇 시민들은 리에르에 대한 정보를 캐기 시작했고, 호기심 많은 소년, 소녀들은 리에르를 보기 위해서 왕성 근처를 배회하게 되었다.
“그렇다는데……. 왜 여기에 네가 있는 건데.”
유이는 시큰둥한 루비빛 눈동자를 굴리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리에르를 불편하게 바라보았다.
“먹을 것 주러 왔으면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웃기셔, 내 시종 있거든?”
콧잔등을 찡그리며 입을 삐죽거리는 유이.
그녀의 얼굴에는 한쪽 볼을 통째로 가리는 상처 습포제가 붙어 있었다.
지난 전투의 상처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녀의 흰 어깨가 보인다. 소매 없는 옷을 입고 있는 덕분에 붕대가 감겨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네 시종이 도와달라고 한 거다. 네가 식사도 제대로 못 할 거라고.”
리에르는 유이의 오른쪽 어깨를 가리키면서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검상을 입은 그녀의 어깨 위로 감긴 끈의 끝에는 금이 간 팔목을 고정하기 위한 삼각건이 있었다.
오른손잡이인 유이로서는 양손을 사용할 수 없으니 불편하디 불편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엘 파실드의 신성 마법 덕분에 재생력이 빨라져 있다는 사실이다. 며칠이면 삼각건을 푸를 수 있었다.
‘이게 쓸데없는 짓을 하네?’
유이는 리에르가 자신의 시중을 드는 것이 누군가의 흉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전담 시녀의 음모리라.
유이는 오지랖 넓은 시녀를 떠올리며 잔뜩 눈썹을 찌푸려 보였다.
상처를 잔뜩 입고 돌아온 유이를 보고 펑펑 울어대면서 매달리던 것은 언제고, 안정되고 난 이후에는 리에르와 유이를 돌아가면서 거슴츠레하게 바라본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때부터 불안하기는 했었다.
전투가 종료된 일주일 동안 시녀 멜런의 불필요한 행동 덕분에 리에르와 있는 시간이 부쩍 많아진 것은 사실이었기에 유이는 별다른 불평도 하질 못했다.
“그냥 가줄래? 못생긴 바보 원숭이 얼굴 보고 있으면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겠다.”
왼쪽 손으로 포크를 들어 치즈 가루를 얹은 스파게티를 돌돌 말다가 유이는 투덜거렸다.
멀뚱멀뚱하니 앉아 있는 리에르를 보면서 유이는 볼멘소리를 내었다.
“거 참, 진짜.”
유이가 계속 투덜거리자 리에르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보였다. 리에르가 정말로 나가려는 듯 발걸음을 움직이자 유이가 움찔하면서 루비빛 눈동자를 굴렸다.
그래도 딴에는 걱정되어 와준 것이다.
괜히 멜런이 한 말들이 떠올라서 자신도 모르게 심술을 부린 것이 후회된다. 하지만 지금 와서 리에르를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공주라는 지위 때문이 아니다. 그저 성격상 그런 것이 불가능했다. 유이는 리에르를 붙잡을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시무룩해진 유이는 리에르가 갑자기 뒤돌아서는 것을 보고 움찔하였다. 그는 나가려던 걸음을 바꾸어 다시 유이에게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이전과는 달리 검술 연습을 하느라 투박해진 손가락이다.
유이는 리에르의 작은 변화에도 시선이 닿았다. 그가 작은 물 주전자를 들어 컵에 물을 따랐다.
잔을 건네며 리에르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투덜거리면 목은 안 마르냐? 물이라도 마시지그래.”
“흥.”
유이는 리에르가 건네준 컵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몇 모금 물을 마셔 목을 축이고는 컵을 내려놓았다.
신선한 물이 입안에 들어오자 시원한 청량감이 느껴졌다.
기분은 좋았으나, 유이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리에르는 유이가 짜증 내는 이유를 알지 못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한숨을 쉰 그는 팔짱을 끼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충혈 눈…….”
대번 유이가 들고 있던 포크로 찍을 기세였다.
리에르는 호칭을 바꾸기 위해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자신에게는 원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을 선사하고 있으면서, 정작 자기는 거부 의사를 밝힌다.
그것도 안하무인의 태도로.
화가 나기는 하지만 리에르는 애써 참아주기로 했다. 자신은 매우 너그러운 연장자이므로.
“도대체 또 뭐가 불만이라 그러십니까, 공주 나으리.”
“모두 다!”
비꼬는 리에르의 말에도 공주라는 호칭에는 별말을 하지 않는 유이, 그런 그녀는 당최 알 수 없는 말들만 하고 있었다.
“대답이 불성실하잖아?”
“응, 친절하게 설명해 줄게. 네 얼굴도, 네 성격도, 네 말투 모두 다.”
유이는 이번에 정말로 친절하게 눈웃음까지 치면서 설명하더니 움직이지 못하는 오른손 대신에 왼손을 들어 크게 원을 그려 보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리에르는 “그것참 미안하게 됐네.” 하고 중얼거리며 유이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턱을 괴었다.
그런 리에르의 모습을 보면서 유이는 입을 삐죽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보인다.
“언제부터……인 거야?”
“뭐?”
난데없는 유이의 말에 리에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되물었다. 자신을 향하는 리에르의 시선을 피하며 유이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면서 입술을 열어 보인다.
“언제부터 다시 그 힘이 생긴 거냐고.”
그제야 알아들은 리에르는 아,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일로부터 일주일 이상이 지났는데 어째서 유이가 물어보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느낄 정도였다.
“얼마 안 됐어.”
유이의 루비빛 눈동자가 물끄러미 리에르를 바라본다. 난처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리에르의 모습을 보고 유이는 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한다.
“이전처럼 폭주는 안 하나 봐?”
“아마도.”
그 물음에는 리에르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약으로 인해 부활한 힘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그 약품이 만들어진 재료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 전, 스스로의 의지로 포스를 사용한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 힘 덕분에 유이가 부상 정도로만 그쳤고, 수도의 피해도 최소화하였다. 하지만 가공으로 만들어진 힘은 불안정하기만 했다.
불타는 듯이 환하게 빛을 뿜어내는 칠흑의 깃털, 비어버린 몸 안에 가득 차오르는 물처럼 시원한 느낌을 주는 마나. 쿵쾅거리며 들끓는 심장의 고동 소리, 그것을 일깨워주는 푸른빛의 눈동자 사이로 적들이 느리게 보인다.
마치 일부러 느린 동작으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
고열인 것처럼 머릿속은 뜨거웠고, 어지러운 혼미함마저 느껴졌다. 그것은 생각을 방해하고, 이상할 정도로 흥분을 유발하여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대로 자신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갑작스레 다가올 것 같아서 두렵기만 하였다.
그런 리에르에게 온기를 전해주는 유이의 둥그런 눈이, 체온이 정신을 붙잡아주는 것만 같았다. 아니, 만약에 유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들을 떠올리며 리에르는 가슴 한쪽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벗어나지 못한 과거,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이젠 안 아프겠네.”
안색을 굳히고 있던 리에르에게 유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처럼 이유 없이 쏘아붙이는 것이 아닌, 누그러져서 부드럽게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유이의 물음에 리에르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리에르는 잠시 생각을 하고 있어야 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불치의 몸이 되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 그리고 최대한 보이지 않으려 했었던 각혈.
유이가 자신의 몸에 대해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유이가 눈치 빠르단 것은 리에르도 알고 있었으나, 그녀가 모르기를 바랐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리에르는 대답했다.
“아마도.”
다시 포스를 갖게 된 이후로 각혈은 멎었다. 아직도 간혹가다 가슴의 통증은 전해진다. 하지만 전처럼 심한 것은 아닌지라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 말을 들은 유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화색이 돋는 것은 리에르의 착각일까.
유이가 놀란 얼굴로 급하게 몸을 돌리며 “정말이야?” 하고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앞에 놓여 있던 점심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당황한 유이가 떨어지는 음식들을 붙잡으려 하였다. 불편한 오른손 덕분에 옆으로 균형을 잃는 그녀를 보고 리에르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