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06)
레필리아 레소드-206화(206/398)
레필리아 레소드 206화
전쟁의 끝, 그리고 평화(2)
리에르는 반사적으로 유이의 허리를 붙잡았다.
품 안에 안긴 유이는 놀랍도록 가벼웠다. 체중이 없는 것처럼.
부드러운 체온과 함께하는 달짝지근한 향이 느껴진다.
항상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던 유이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이 굉장히 가까이에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듯한 촉촉한 입술. 만지면 녹아버릴 것 같은 보드라운 피부. 투명한 루비를 깎아놓은 듯한 눈망울은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 무엄하다!”
“어?”
갑자기 빽, 소리를 지르며 유이가 왼손으로 리에르의 가슴을 밀어냈다.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던 리에르는 무방비한 상태에서 뒤로 밀려났다.
콰당!
넘어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찧은 리에르는 뒤통수를 감싸며 고통스러워했다.
덕분에 리에르가 붙들고 있던 음식들도 와장창 소리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리에르는 벌떡 일어나서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무엄하다는 뭐야. 네가 무슨 영감님이냐?”
“흥, 예법으로 배운 거거든?”
무슨 예법이 무엄하다를 가르치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리에르는 그냥 넘겼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도와줬는데 오히려 원수로 갚는 경우도 있냐?”
“누가 도와달래?”
당당한 유이의 모습을 보고 리에르는 할 말을 잃었다.
어느새 멜런과 시녀들이 들어와 어질러진 음식을 정리했다.
멜런이 눈꼬리를 말아 올리며 유이를 힐끔힐끔 바라본다. 그녀의 입가에 피식피식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다른 시녀들도 멜런처럼 대놓고 웃지는 않지만, 간헐적으로 숙인 고개가 흔들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유이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리에르는 아직도 통증이 남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본의 아니게 순간적으로 유혹당하는 기분이었다. 리에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친구의 동생에게 헛생각을 품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아, 공주님의 일용할 양식이 못 쓰게 되어버렸네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멜런은 훤칠한 리에르를 올려다보면서 애교 있게 눈웃음을 쳤다.
“공주님께서 드실 식사를 다시 갖다 주시면 안 될까요?”
“어째서 내가…….”
주변에 시녀들도 많은데 자신이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리에르는 불만을 토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금방 멜런이 말을 이었다.
“어머, 저희는 공주님을 살펴야 하거든요. 그리고 저희처럼 가녀린 여성들이 식사를 가져오면 팔이 아프거든요.”
“잠깐, 아깐 바빠서 나보고 해달라고…….”
“어머, 흑사자라고 불리며 나라 안의 모든 이들이 주목하는 영웅이 가녀린 여성들의 부탁도 못 들어주시고……. 흑흑.”
갑자기 시녀들이 서로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 가운데 갈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대면서 흐느끼는 시늉까지 해 보인다. 당황한 리에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영웅이라는 단어에 귀가 팔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 어렵지 않으니까.”
볼을 긁적이더니 리에르는 유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리에르의 시선이 다가오자 유이는 간단명료하게 한마디를 내뱉는다.
“밥.”
“나 참……. 하기야 네가 먹는 양이 좀 많냐. 시녀분들이 들고 오기도 힘들겠지.”
리에르가 빈정거리며 비웃음을 지어 보이자 유이가 울컥한 표정으로 포크를 집어 던졌다. 흥, 코웃음을 치면서 리에르는 가볍게 손을 들어 포크를 붙잡았다.
일찍이 마검술 레필리아 레소드를 마스터하고, 가문의 검술까지 익혔다. 겨우 유이가 던진 포크에 당할 리 없었다.
리에르는 차갑게 비웃어주려고 할 때 같은 궤도로 날아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평소 유이가 즐겨보던 책이었다.
표지에는 무겁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로 긴 속눈썹을 가진 남자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내고 있었다.
에레사와 유이가 굉장히 좋아하는 소설, 장미의 기사 프란츠였다.
‘저거 꽤 아프던데…….’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얼굴로 책을 받아낸 리에르가 휘청거렸다. 역시 꽤 아팠다.
유이는 아직 멀었다는 표정으로 흥, 코웃음을 쳐 보였다.
킥킥거리는 시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망신살이 뻗친 리에르는 화도 못 내고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유이는 손을 툭툭 털면서 쌤통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을 마친 시녀들은 유이의 방에서 나갔다. 멜런은 혼자 남아 유이의 침대 시트를 펴주면서 눈웃음을 쳐 보였다.
“분위기 좀 잡으라고 했더니 왜 싸운대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랬지?”
멜런의 말에 유이는 으르렁거리며 노려보았다. 나름 화가 나서 노려본다고 해도 무섭지는 않았다.
인상을 쓴 토끼의 모습인데 뭐가 두렵겠는가.
멜런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애써 본능을 억제하듯이 자신의 오른손을 움켜쥐는 멜런을 보며 유이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플러는 왜 안 주셨어요?”
“뭘?”
“전부터 열심히 만드시던 거요.”
“주긴 누, 누굴 줘!”
설마 자신을 항상 감시라도 하는가 하는 얼굴로 유이는 멜런을 노려보았다.
멜런은 흐응, 하는 콧소릴 내면서 장난기 넘치는 눈가를 찡그리며 여기저기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평소 자신의 방을 관리하는 멜런이라면 머플러의 위치 정도는 금방 들킬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이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무, 무엄하다!”
“어머. 제가 무엄한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유이의 나약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멜런은 방 안의 서랍들을 익숙하게 열어젖히고 훑어보기 시작했다. 수사망이 점점 좁혀져 오자 유이는 식은땀을 흘렸다.
침대 옆의 수납장으로 멜런이 다가가자 유이는 깜짝 놀라면서 몸으로 막아섰다. 그러자 멜런은 어머, 어머. 하는 소릴 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거기에 있나 봐요?”
“없어!”
“에이.”
“아, 진짜!”
호호호, 웃으면서 유이를 밀어내는 멜런의 완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평소 빨래와 청소로 단련된 그녀에게 유이가 당해낼 리 없었다.
결국, 그녀는 감췄던 물건을 빼앗기고 말았다.
‘팔만 멀쩡했다면.’
유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수납장에서 떨어져 나갔다. 마치 점령자의 웃음을 만면에 지으며 멜런이 검은 머플러를 꺼내 들었다.
“이렇게 잘 만들어 놓고는 왜 안 주셨대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하는 멜런을 보고 유이는 시큰둥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여 보였다.
“그거 아직 안 됐어.”
유이의 말에 멜런은 칠흑빛 머플러를 둘러보았다.
의외로 손재주가 좋았던 것일까?
유이가 만든 머플러는 처음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되어 있었다. 아쉬운 것은 끝단이 마감되지 않았다는 정도.
멜런은 왜 완성을 못 했냐는 듯이 머플러를 들어 보였다.
유이는 자신의 다친 팔을 들어 보였다.
“공주님 같은 미인에게 이런 선물을 받는 남자는 정말 좋아할 텐데 아깝네요.”
“내가 쓸 거라니까.”
자꾸 놀리듯이 능청을 부리는 멜런에게 유이는 정말 화났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쯧쯧, 혀를 차면서 멜런은 그녀의 곁에 바싹 달라붙는다. 유이는 갑자기 다가오는 멜런에게 불길함을 느끼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멜런은 유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도주로를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
“그분도 공주님께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나랑 상관없다니까! 그리고 그럴 일도 없고 말이지.”
리에르와 유이의 관계는 소꿉친구, 혹은 친한 친구의 여동생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리에르에게는 오랫동안 사랑해 온 여성이 있었다.
그녀와 다시 재회를 이루었기에 자신 따윈 안중에도 없을 터다.
그런데도 멜런의 말에는 자신도 모르게 귀가 기울여진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눈치채지 못할 멜런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계속 유이를 공략하였다.
“공주님이 아직 남자 대하는 법이 서툴러서 그런 것뿐이지,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공주님의 남자로 만들 수 있을걸요?”
“내가? 어떻게?”
유이는 귀찮은 척하면서도 귀를 쫑긋거리며 유이는 멜런에게 힐끗 시선을 움직였다.
유이의 관심에 멜런은 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입술에 검지를 대고 생각에 잠겼다.
유이만큼은 아니지만, 멜런도 남자를 사귀어 본 것은 두어 번 정도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성격 차이로 금방 헤어진 뒤, 일만 열심히 했었으니 딱히 유이에게 조언해 줄 만큼 경험이 풍부하진 않았다.
“남자들은 노출하는 여성을 좋아하더군요.”
“왜……? 아니, 그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해?”
유이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멜런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기 할 말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뭐랄까, 그…… 원단이 적게 들어간 옷을 입고 있으면 측은한 마음, 또 남자들의 동정심이 유발되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걸…… 왜 나에게 물어.”
음, 하는 신음을 내뱉더니 멜런은 자신의 연애관에 대해서 유이에게 하나하나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차피 남자 한 번 못 사귀어 봤을 것 같은 유이라면 자신이 그 어떤 말을 해도 의심하진 못할 것이다.
유이가 멜런에게 집중 교육을 받고 있을 때, 리에르는 공주님 밥상을 준비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자신이 왜 유이 음식이나 나르는 신세가 되었는지 의문도 생기긴 했지만, 지금 상황이 일사천리로 잘 풀리고 있기에 굳이 따지고 들진 않는다.
왕성에 일촉즉발의 위험이 있었던 것은 바로 얼마 전의 일, 게다가 다급하게 도착한 수도에서 유이가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을 땐 모든 것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리에르에게 깊게 새겨진, 과거와 현실을 괴롭히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혔던 포스.
유이의 위험을 보고 리에르는 포스를 폭발시켰다.
그때 느꼈던 그 절망감은 단순히 친구의 여동생, 어렸을 적부터 만나왔던 아이에 대한 감정이 아니었다.
절망적이고, 두려웠고, 절실했다.
리에르 스스로도 그때 느꼈던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자문자답을 하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았던 그때의 그 감정은 머리를 마비시켜서 포스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잊히게 했었다. 그런 감정과 생각들은 유이 페브리안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다.
유이 페브리안을 좋아한다.
하도 말이 안 되는 생각이라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어렸을 적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은 단 하나였다. 에레사 레이나드.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그 감정에 거짓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이를 마주하면 이전과는 다른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그녀를 가까이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꼭 끌어안아 버릴 것 같은 본능이 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한다.
아직 생생하게 느껴지는 유이의 체온과 부드러운 향은 리에르의 얼굴을 붉혔다. 얼굴을 감싸 안으며 리에르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은 이상 그럴 일은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됐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자신에겐 에레사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가족을 잃고, 오로지 자신만을 다시 보기 위해서 찾아온 그녀의 마음을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돌았다.
비록 그녀의 마음이 어쩔 수 없는 애증이라도, 거짓이라도 리에르에게 있어서는 가장 소중한 단 하나다.
그가 가장 지키고 싶은 사람은 에레사였다.
추억이라는 이름 속에 갇혀 있는 에레사는 리에르에게 있어서 설렘, 그리고 자상함으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듯한 에레사의 저주와도 같은 흐느낌이 떠올랐다.
가슴 한쪽이 무거운 추가 매달아진 느낌이었다.
모든 전쟁이 끝나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그런 때가 온다면…….
자신이 만든 죄업 때문에 병들어 가는 에레사를 보면서 리에르가 했던 하나의 생각이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할지라도, 평화로운 곳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서 에레사와 함께 살고 싶었다.
그것이 부부라는 이름이 되어도, 이웃이라는 단어만으로 그친다 하여도.
망상이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작은 소망이 다가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면 어두운 마음이 씻은 듯 사라지고 기분이 편안해졌다. 정작 당사자인 에레사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