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07)
레필리아 레소드-207화(207/398)
레필리아 레소드 207화
전쟁의 끝, 그리고 평화(3)
“탈옥이다! 놈을 잡아라!”
궁중 요리사가 음식을 만드는 주방 쪽에 다다랐을 때, 근위병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항상 이 시간대면 으레 있는 소란이다. 리에르는 한숨을 토해냈다.
익숙한 주방의 풍경이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운데, 요리사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리에르가 걸어갔다.
근위병들에게 둘러싸인 금발 청년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피투성이가 되어 검을 겨루던 남자였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압도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던 금발의 전사는 능청맞은 표정으로 식탁 위의 음식들을 입안에 쓸어 담고 있었다.
“네 이놈, 탈옥을 아주 밥 먹듯이……!”
“감방 밥이 맛없는 걸 어쩌란 거야?”
순식간에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금발의 청년은 꺽, 하는 트림을 뱉으며 이를 쑤셔 보였다. 근위병들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황당한 사내의 등장에 비지땀을 흘리며 검을 겨누고 있었다.
분명 감옥에서 탈출한 포로를 발견하면 제압을 해야 하지만 일개 근위병의 실력으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기도 들지 않은 상대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더더군다나 이 황당한 포로는 매 식사 시간만 되면 탈옥하기를 밥 먹듯이 하고, 식사가 끝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스스로 감옥 창살을 엿가락처럼 휘고서 들어갔다.
아무리 힘이 센 전사라 해도 단단한 감옥 창살을 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지라, 근위병들도 상대하는 데 애먹고 있었다.
처리하는 데에 난색을 보이는 근위병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금발 남성은 그에게 손을 흔들며 휘파람을 불어 보였다.
“이야, 흑사자.”
리에르는 레이루나가 자신을 부르자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뱉었다.
“쟤랑 좀 놀다가 바로 돌아가면 안 되나?”
레이루나는 근위병들에게 웃으면서 말했으나, 듣는 이에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몇몇 근위병들은 생각지 않게 등장한 검은 기사에 예를 취해 보였다.
지금 왕성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이야기는 대승을 거두고 귀환하고 있는 왕과 그의 친우이자 단신의 몸으로 위기에 빠진 왕성을 구한 흑사자였다.
네 번째 근위 기사가 될 거라는 지배적인 소문을 불러일으키는 주인공을 눈앞에서 보자 근위병들은 자연스럽게 예를 취했다. 그 모습이 리에르에게는 부담스러운지라 멋쩍은 웃음만 지어 보였다.
“제가 감옥까지 처박아 놓죠.”
리에르의 말에 근위병들은 살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노골적으로 좋아했다.
지금 왕성에서 교단 최강의 검이라는 레이루나를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은 리에르밖에 없었다.
리에르가 한숨을 쉬면서 레이루나에게 다가갔다.
근위병들은 포위를 풀며 물러났다.
“이야, 오늘도 공주님 빵 셔틀 신세인가?”
“포로면 포로답게 감옥 안에서 딱딱한 빵 껍질이나 씹을 것이지 왜 자꾸 기어 나오냐, 너?”
능글맞게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이는 레이루나를 향해서 리에르가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았다.
곱지 않은 리에르의 말투에 레이루나는 단단하게 근육이 잡힌 복부를 손바닥으로 툭툭 쳐 보이며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누구 덕에 배에 구멍이 나서 피가 모자란단 말이지. 고기가 필요해.”
“교단 사람들은 하나같이 좀비냐?”
이제는 소실된 네 번째 포스 아일 하사드의 끊임없는 재생에도 놀랐지만, 치명상을 입었던 레이루나가 일주일 만에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할 말이 없어졌다.
너무 멀쩡한 덕분에 반찬 투정을 할 여유까지 있었다.
세상천지에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죄수가 어디 있겠는가.
“아니, 이 몸이 특별한 거지. 하하하하하하!”
자랑스럽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서 웃어 젖히는 레이루나를 보면서 리에르는 피곤이 몰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론 단순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서 한시라도 편하지 못했다. 그런 자신에 비해 레이루나는 너무나도 자유분방해 보였다.
“특별한 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흑사자. 아니, 적혈의 악마.”
기분 좋게 웃어 젖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이 레이루나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마치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한 맹수 같은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리에르는 눈가를 찌푸려 보였다.
“그딴 식으로 부르는 것은 그만두지그래.”
생각도 하기 싫은 과거. 그리고 그 과거를 내뱉는 레이루나를 향해 검이라도 뽑아 들고 싶었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으나, 레이루나의 눈동자는 오히려 호기심을 보인다.
“본 적 있었지. 페이서스를, 광기만이 남겨진 도시를. 살육의 잔재만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어떤 녀석이 이런 짓을 했을까 가슴 설레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런 개소릴 하고 싶었던 거냐?”
리에르의 눈가에서 피어오르는 살기, 그것을 느끼면서 레이루나는 이를 드러냈다.
“넌 나와 동류야. 싸우면서 느낄 수가 있었지. 서로 다른 존재의 힘을 지니고 있지만 끝없는 싸움을 원하는…….”
검과 검의 마찰, 서로 육체를 소진하면서 누가 강한지를 가리는 순수한 본능.
패자는 목숨을 바치고, 승자는 살아남아 우월감을 느낀다. 몸의 모든 힘을 다 쏟아붓는 투쟁, 세포 하나하나를 활용하면서 살아 있음을 즐기는 그 시간을 생각하노라면 레이루나는 쾌락을 느꼈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날아드는 리에르의 손은 레이루나의 멱살을 쥐어틀었다.
금발의 머리카락 아래 가려진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힌다.
레이루나는 리에르를 향해 살기 어린 눈동자를 열어 보였다.
“너 따위와 동급 취급하지 마라, 이 쓰레기야.”
리에르도 지지 않을 정도로 살기를 뿜어냈다. 제대로 된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
페이서스에서의 일이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절망에 찬 힘없는 사람들의 비명과 뜨거운 혈액이 피부에 닿는 서늘한 감촉들은 괴롭고 두려웠다.
“안 놓으면 네 손모가지 못 쓰게 만드는 수가 있다.”
“그전에 네 목과 생이별하게 만들어주지.”
레이루나와 리에르는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비틀어 잡았던 레이루나의 멱살을 던지면서 리에르는 차가운 눈동자로 입술을 연다.
“다 처먹었으면 감방에나 얌전히 박혀 있어라.”
“빵 셔틀로 바쁜 분의 시간을 빼앗았나 보군.”
레이루나의 말에 리에르는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자주 감옥을 탈출해서 식당에 와 있던 레이루나,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친 유이 덕분에 음식 나르는 신세가 되어버린 리에르는 서로 만나고 싶지 않아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레이루나를 다시 감옥 안에 처박아 두는 것도 리에르가 하게 된 일 중의 하나였다.
“누가 빵 셔틀이냐?”
귀찮은 일투성이기에 리에르는 짜증을 뱉어냈다. 레이루나의 시야에 리에르가 하는 것이 보였다.
화를 내면서도 요리사들이 준비한 음식들을 하나하나 성실하게도 주워 담는다. 그는 어처구니없어서 한마디 내뱉었다.
“지극정성이구나. 하기야 그 정도 반반한 얼굴과 몸매에, 공주라는 지위까지……. 정성을 안 들일 수가 없겠지.”
“충혈 눈알이 좋아서 하는 일인 줄 아냐?”
리에르는 그냥 다 때려치우고 아르카를 뽑아 들고 레이루나와 붙어버릴까 생각했다.
사실 레이루나가 귀찮게 구는 바람에 몇 차례 전투를 벌인 적이 있었다.
물론 주변이 난장판이 되기 전에 둘 다 멈췄지만.
“너희들 정말로 사귀는 사이 아닌 거야?”
“귀먹었냐?”
“정말이지? 엉?”
“싸우잔 거면 대놓고 말하지그래, 어? 붙어볼까?”
화가 치밀 대로 치민 리에르가 유이의 식사가 담긴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서 아르카를 뽑아 들었다. 레이루나는 위협적인 기세를 풍기는 리에르에게 손사래를 치면서 낄낄거렸다.
“거 새끼 성깔하곤. 임자 없으면 작업 좀 들어가 보실까나.”
레이루나는 생각만 해도 설렌다는 듯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레이루나의 모습을 보면서 리에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 보인다.
“뭘 하든 네 자유긴 하다만, 교단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가 포로로 붙들린 네가 할 소린 아닌 것 같다.”
리에르 스스로도 단순하다고 생각했지만, 레이루나는 그 범주를 넘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쳐들어왔다가 포로로 붙잡힌 주제에 도망칠 수 있으면서도 도망 안 치는 희한한 녀석은 이제 공주에게 추파를 던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까짓것 망명하면 되지.”
“뭐?”
주머니에서 손을 넣다 뺐다 하는 듯한 레이루나의 말에 리에르는 황당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레이루나가 낄낄,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정식으로 교단에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아르미안 때문에 잠시 용병 생활을 했을 뿐이다. 그쪽보다 이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의미하는 레이루나의 시선을 받고 리에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신흥 국가인 페리안은 여러 인재가 모여들기 시작한 단계이지만, 거대해지는 몸집에 비해서 사람이 부족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루나 정도의 실력자가 망명해 온다는 것은 페리안에 있어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자신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자유분방해 보이는 레이루나를 보면서 리에르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질투였는지, 아니면 부러움이었는지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바쁘니까 다시 감옥 안으로 돌아가라.”
리에르는 귀찮은 레이루나를 감옥 안에 처넣고서 유이의 방으로 향했다.
“공주 전하께 내 이야기를 꼭 해둬야 할 거다!”
“안 했다가는 공주 방까지 쳐들어올 기세네.”
“하하, 어려울 것도 없지.”
“하하, 이번엔 목을 베어주랴?”
진짜로 화가 난 리에르를 보며 레이루나는 목덜미를 쓸며 물러섰다.
리에르는 다시 빵 셔틀을 시작했다.
다른 국가의 사치스럽고도 호화스러운 궁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붉은 융단을 깐 복도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는 붉은 융단을 밟는 것조차 거북하고, 낯설기만 하였다. 일반 서민들은 평생 구경도 못 하고 만져보지도 못할 고가의 카펫인데 그것을 발로 밟고 지나간다는 것은 호사스러움을 넘어서 거만한 사치였다.
비록 신검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이긴 하나, 리에르 그가 자라온 환경은 평범한 항구도시였다.
성장 과정도 일반인과 다르지 않았다. 덕분에 화려한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흰색 레이스가 수 놓인 푸른 계열의 옷을 걸친 시녀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타이즈 하의를 걸친 왕국의 귀족들이 성의 정원을 거닌다.
정원을 거니는 귀족들은 페리안의 건국 공신인 하르츠 후작이었다. 그는 제1기사인 레온의 아버지기도 했으며, 왕국 제일의 실력자이기도 했다.
햇볕 아래에서도 칠흑을 머금고 있는 머리카락,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결같은 검은색을 띠고 있는 소문의 청년이 지나가자 귀족들의 눈이 자연히 모였다.
귀족들뿐이 아닌, 시녀들의 시선도 한데 모여서 리에르는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왜들 이렇게 쳐다보지?’
가는 곳마다 시선이 몰리니 부담스러워서 리에르는 머리를 굴려보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시녀들이 얼굴이 상기된 채로 치맛단을 붙잡고, 가슴 언저리를 감싸며 인사를 올렸다. 새롭게 회자되는 왕국의 영웅. 젊은 나이에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실력을 지니고, 전설로만 이야기되던 힘을 소유한 인물.
거침없이 적을 향해 돌진하는 그 모습이 마치 용맹한 사자와 같다 해서 붙여진 호칭, 흑사자.
리에르라는 이름보다 그의 호칭이 대륙에 먼저 알려졌다.
교리를 따르지 않는 마을에 군대를 파병하여 박해를 가하고 있던 교단을 단신으로 돌파한 사건은 매우 유명했다.
그를 바라보는 시녀들의 눈빛은 설렘을 담고 있었으나, 그런 부분에서 둔감한 리에르는 무안함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최근에 유이의 식사를 가지고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보고 몇몇 시녀들은 그런 그의 모습이 의외로 귀엽다고 웃음을 머금기까지 하였다.
선망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종, 시녀들과는 다르게 귀족들은 리에르라는 존재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런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제1기사 레온의 아버지, 하르츠 후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