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08)
레필리아 레소드-208화(208/398)
레필리아 레소드 208화
전쟁의 끝, 그리고 평화(4)
“출신을 알 수 없는 비천한 자가 성을 제집처럼 들락날락하니, 왕께서 돌아오시면 진언을 드려야겠습니다.”
“그렇소. 그가 비록 금번의 사태에 큰 공을 세우고, 폐하의 친우라 하지만 너무 기고만장해 보입니다!”
주변 귀족들은 하나같이 하르츠 후작을 바라보면서 각자의 생각을 발언하기 시작했다.
대화의 중심에 서 있는 하르츠 후작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근엄한 표정으로 잔에 담긴 포도주를 흔들어 보였다.
“게다가 미혼인 공주의 방에 들락날락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불경한 행위입니까? 이 사실을 알면 국민이 개탄을 금치 못할 것이오.”
“유이 공주께서 결혼한다면 이 나라에서 어울리는 남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아직 정식으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왕국의 국민도, 우리 귀족들도 레온 경과 공주님이 이뤄지길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이 아닙니까.”
겉으로 하르츠 후작을 생각해서 하는 말로 보이긴 했지만, 하나같이 자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발언들이었다.
일등 건국 공신인 하르츠 후작의 라인에 서 있으면 자연히 자신들의 입지도 상승하게 될 것을 생각했고, 그 생각은 마땅한 보상이 이뤄지고 있었다.
하르츠 후작과 뜻을 함께한 귀족들은 왕국을 움직이는 실세들이었다. 머지않아 하르츠 후작의 자제인 레온과 유트 왕의 동생, 유이 페브리안이 결혼하게 된다면 더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실제로 하르츠 후작은 아무것도 없던 유트 왕에게 믿음을 주었고, 그 믿음으로 자신의 영지마저 선뜻 내주었다.
자신의 재산을 털어 유트 왕의 군대를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왔고, 레온 폴 하르츠는 유트 왕의 한쪽 팔이 되어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왕국의 국민에게도 레온 폴 하르츠는 진정한 기사의 귀감이었고, 인기가 높았다.
게다가 이번 아키서스 전쟁에서 레온은 큰 공을 세우고 왕과 함께 돌아오니 그 인기는 더욱 드높아져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왕의 친구, 리에르로 인해서 국민의 관심이 뒤바뀌게 되었다.
위기의 순간에 돌연 나타나서, 하르츠 후작의 군대가 당도하기도 전에 단신으로 위기를 해결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레온을 비롯한 유트 왕의 근위 기사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리에르가 보여준 활약은 그 누구도 보여줄 수 없는 영웅상이었다.
“그가 세운 수훈이 없었다면 그대들이 지금껏 공들였던 왕국도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오.”
파리 떼처럼 주변에서 왱왱거리는 귀족들을 향해 하르츠 후작이 일침을 내뱉었다. 만약에 리에르가 적군을 막지 못했다면 왕성은 정복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단 한 번이라고 하더라도 정복을 당한다면 그 왕국은 신뢰를 잃게 되고, 웃음거리로 남게 될 것이다.
하르츠 후작의 군대가 뒤늦게 적군을 몰아내도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격이었다.
후작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는 귀족들은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입을 닫고 눈만 껌벅였다.
가장 분통을 터뜨려야 할 후작이 이렇게 말하니 그들로서는 더 말을 붙이기도 힘들었다.
‘어차피 유트 왕은 내 말을 무시할 수 없다.’
왕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하르츠 후작은 자신이 왕가의 친인척이 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예상했다.
유이 공주가 아니어도 막내딸인 레나가 있었다.
유트 왕에게는 약혼을 약속한 여인도, 사랑하는 여자도 없었다. 얼마든지 페브리안과 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리에르는 불편함 때문에 걸음 속도를 올렸다.
‘이게 다 충혈 눈알 때문이야!’
리에르는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유이의 방을 벌컥 열어젖히면서 소리쳤다.
“야! 이제 이런 거 나한테……!”
리에르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움찔했다. 즐거운 표정으로 침대 위에 옷을 늘어놓고 있는 시녀 멜런이 보인다.
그녀는 반강제로 유이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불편한 팔로 반항하고 있던 유이는 속옷까지 드러난 채로 허우적거리다 굳어졌다.
눈부시게 하얀 피부를 드러낸 유이를 보고 리에르가 눈을 깜박였다.
가슴의 굴곡과 어우러진 허리를 보면서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내 찾아올 공격에 대비하여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머, 거봐요. 반항하시니까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멜런이 입가를 가리며 눈웃음을 쳤다.
굳어졌던 유이는 아……. 하는 소릴 내더니 옷가지를 재빨리 들어 올렸다.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질 뻔했다. 그랬다간 주변에 시녀들이 다시 몰려들 것이 뻔하다.
유이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내었다.
여자의 공간에, 게다가 공주라는 신분으로 있는 사람의 방에 이렇게 벌컥벌컥 들어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에게 고의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이는 주변에 놓여 있던 자신의 무기를 주섬주섬 주워 들면서 조용히 입술을 벌렸다.
“봤지……?”
“어.”
“어?”
“어. 괜찮은데?”
휘릭!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리에르를 향해 책이 날아들었다. 어차피 그녀가 공격해 올 것을 짐작하고 있던 리에르는 침착하게 손을 들어 책을 옆으로 쳐내 보였다.
“그럴 땐 못 봤다고 하는 거야!”
“그런 거짓말하기엔 내 시력이 너무 좋거든.”
다시 한번 리에르의 머리를 향해 책자가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리에르는 가볍게 손을 들어 책을 쳐냈다.
“몸이나 낫고 덤비시지?”
비아냥거리는 리에르의 말에 유이가 피식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평소 같으면 펄펄 날뛰고도 남을 그녀였다.
리에르는 왠지 모르게 불안함을 느꼈다. 그때 책을 쳐냈던 팔뚝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려보니 팔에 포크가 꽂혀 있었다.
“어느 나라 공주님이 식사를 가져다준 사람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포크를 꽂냐?”
“여기.”
자신을 찾았냐는 듯이 대답하는 유이를 보면서 리에르는 할 말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힘겹게 가져온 유이의 식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리에르는 팔에 꽂힌 포크를 뽑았다.
철철철 흘러넘치는 피를 보면서 리에르가 팔을 들어 유이에게 보여주었다.
유이는 어쩌라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리에르는 이마에 힘줄이 굵어지며 이성의 끈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그깟 몸 좀 조금 봤기로서니 사람 팔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냐?”
“그, 그깟 몸?”
유이와 리에르가 다시 한바탕 벌일 기세로 씩씩거리는 것을 보고 멜런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재하고 나섰다. 만나기만 하면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보니,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리에르 님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시간이 남아도니까 성격 나쁜 녀석 빵 셔틀이나 하고 있지.”
“밥 축내는 바보 원숭이가 허드렛일이라도 거들어야지.”
애써 멜런이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려도 리에르와 유이는 서로를 견제하며 으르렁거렸다. 어떻게 보면 사이가 좋아 보이기도, 어떻게 보면 천하에 둘도 없는 원수지간처럼 보이기도 하는지라 멜런은 암담했다.
“보다시피 누워만 계시니 스트레스가 많으시거든요. 워낙 활동적인 분이시다 보니.”
멜런은 당장에라도 리에르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려는 유이의 손목을 양손으로 붙잡고서 생긋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가 왠지 모르게 의미심장해 보여서 리에르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공주님 외출 좀 시켜 드리려고 하는데, 같이 가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면서 쳐다보는 멜런을, 유이는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쏘아보았다.
그녀 딴에는 신경 써준다고 하는 행동이었다.
리에르는 묘하게 거부감이 들었다.
“굳이 내가 따라갈 필요가 있을 리가.”
“어머, 얼마 전만 해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연약한 공주님이 호위도 없이 나가실 수는 없잖아요.”
멜런은 오, 맙소사 하는 얼굴로 능청을 부렸다. 리에르는 아직도 피가 멎지 않는 자신의 팔뚝을 들어 보이면서 “누가 연약하다는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세상에나……. 공주를 구하고, 왕성을 지킨 영웅의 실체가 사실은 가녀린 여성을 혼자 위험에 내모는 불한당이란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흑흑.”
“아니……. 그 이전에 안 나가면…….”
“흑흑, 불쌍한 우리 공주님. 자유를 잃은 새처럼 새장 속에 갇혀 지내셔야 한다니…….”
멜런은 정말 우는 것처럼 손등으로 눈가를 훑으며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그녀의 행동은 매우 효과가 있었다. 리에르의 안색이 파리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멜런은 무언가 필요할 때에는 영웅이라는 단어를 언급했고, 리에르는 그때마다 귀가 팔랑거렸다.
멜런은 당연히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상대에게 능숙하게 주입한다.
“알았어, 알았다고!”
결국, 리에르는 항복하듯이 소리쳤다. 어차피 어려운 일도 아니거니와 왕성에 있어봤자 부담스러운 시선들 덕분에 답답함을 느꼈었다.
리에르가 승낙하자 멜런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역시 리에르 님이세요!” 칭찬하였다.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유이는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서 입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왠지 익숙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 * *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냄새, 그리고 떨어지는 물방울조차 음산하게 느껴지는 낯선 장소.
그 속에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외모의 남자였다. 백발의 남자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에게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페이서스에 찾아온 악몽, 그리고 그녀에게 찾아온 불행에 대해서. 그녀는 모든 것이 꿈일 거라 생각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쭉 살아왔던 고향, 페이서스 항구도시.
매년마다 축제를 하고, 떠들썩한 수산 시장이 인상적인 도시는 이전의 부산스러움과 활발함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어둠 속에 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연인을 기다리는, 혹은 친구를 기다리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던 광장은 거대한 몬스터의 사체, 그리고 잘려 나간 사람들의 살덩어리들이 가득했다.
어둠을 품은 그믐달이 은은하게 세상을 비춰주었을 때는 붉디붉은 대지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주르륵.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눈가를 적시고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강의가 끝나고 친구들과 몰려가던 식당도, 새로 나온 신상 옷을 구경하던 가게들도 모두 피로 칠갑을 한 채,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소꿉친구와 어릴 적부터 뛰어놀던 거리는 더 이상 이전의 추억을 상기할 수 없었다.
죽음의 늪이 깊게 펼쳐져 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집엔 이전의 안락함은 없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집. 그리고 찢겨 나간 고기 조각들이 생명을 꺼뜨린 채였다.
쿵쾅거리는 가슴속의 고동은 지금 보이는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소리친다.
눈가를 가득 메우는 눈물은 지금 보이는 현실을 부정하라고 속삭인다.
금발의 여성은 집안에 들어서면서 무언가 발에 밟히는 것을 느끼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기분 나쁜 발의 촉감과 함께 보인 것은 누군가의 팔 한 짝이 생기를 잃은 채,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익숙한 체크 무늬의 소매. 딸과 아내를 먹이고 입히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던 한 남자의 굳은살이 박인 손이 익숙하단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감정을 폭발시키며 슬픔을 토해냈다.
칭얼거리는 자신을 항상 따뜻하게 안아주시던 아버지의 팔을 양손으로 끌어안고서 금발 소녀는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고 싶어 했다.
누군가에게 깨끗하게 씹어 먹힌 자국만 남았을 뿐, 금발 여성은 부모님의 시체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