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10)
레필리아 레소드-210화(210/398)
레필리아 레소드 210화
전쟁의 끝, 그리고 평화(6)
턱.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음을 나타내는 딱딱한 벽면이 그녀의 등 뒤로 느껴진다.
“흰둥이에게 내 이야긴 들어서 알고 있나 보구나. 난 네가 원하는 그 무엇도 이루어 줄 수가 있다. 그리고 넌 내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할 의무가 있고 말이야.”
에레사의 눈앞에서 꼬마는 앙증맞은 손을 허공에 흔들어 보였다. 환한 빛의 파장이 호수의 파동처럼 물결이 일고, 그 안에서 검붉은 물체가 천천히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보기만 해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물체였다.
그것은 파동을 밀어내고, 빛을 집어삼키면서 작은 단도의 형태를 취했다.
당장에라도 시뻘건 피를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불길한 칼날. 꼬마는 손끝으로 그것을 잡고서 에레사의 손에 쥐여주었다.
“넌 엘 파실드를 믿고 있겠지만, 너라는 존재는 리에르를 갖기 위한 가엾은 미끼에 불과해. 엘 파실드가 왜 너에게 진실을 알려줬는지 알고 있나?”
아무것도 몰랐던 에레사에게 양친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려준 엘 파실드.
그는 에레사에게 리에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이라 말했었지만, 설득력이 있진 않았었다.
“내가 알려주지. 너희 두 사람이 연인이 되면 엘 파실드에겐 득보다 실이 크지. 그가 알고 있는 리에르 아르빈트라는 아이는 자신이 지켜야 할 것에 집중하는 면모가 크거든. 그렇게 되면 전쟁의 대운보다 너라는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게 될 거야. 그렇다면 흰둥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거든.”
눈앞의 꼬마가 하는 말을 에레사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반론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너희 둘의 길을 다르게 만들 필요가 있던 거야. 아아, 가엾은 아이. 넌 이용당한 거란다.”
자못 안타깝다는 듯이, 불쌍하다는 듯이 말하지만, 꼬마의 눈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기왕 이용당할 거라면 나에게 이용당해. 엘 파실드가 너에게 주는 것은 없지만, 난 네가 원하는 갈망, 그 어떤 것도 이루어 줄 수 있어.”
꼬마는 에레사의 손안에 쥐어진 단검을 가리키면서 눈웃음을 그렸다.
“도대체 왜 나에게…….”
엘 파실드의 진의를 들은 에레사는 그동안 궁금했던 의문이 풀리며 혼란스러워하였다.
눈앞에 보이는 꼬마 아이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의 앞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꼬마 아이의 등 뒤쪽에서부터 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문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네게 준 그 단검, 쓸모가 있을 거다. 너라면 잘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스스로 테헤라자드라고 말하는 꼬마는 천천히 몸을 돌려 빛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아주 잘 사용하겠지.”
귀 끝까지 찢어지는 듯이 입술을 벌리며 광소를 터뜨린다.
테헤라자드는 또다시 즐거운 유희가 벌어질 것을 기대하며 문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곧바로 문이 닫혔다.
마치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없었다는 듯이 방 안은 조용해졌다.
그녀의 방에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종이만이 허공에서 춤을 추며 추락한다.
에레사가 본 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증거는 손에 쥐어진 핏빛 단검뿐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들어 보였다. 적당한 무게감과 손에 딱 들어맞는 촉감이 오래전부터 써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단검을 계속 들여다보면 볼수록 빨려 들어가는 듯한 묘한 충동을 느꼈다. 에레사는 입술을 깨물면서 가방에 단검을 쑤셔 넣었다.
* * *
이 세상의 모든 것, 만물의 근원을 담고 있는 문의 너머로 테헤라자드는 걸어 나왔다.
헤븐 게이트(Heaven Gate)라고 불리는 테헤라자드만의 이동수단이었다.
헤븐 게이트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
진녹색 머리칼의 여성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르미안의 뒤로 교단을 이끄는 장로들이 떨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며 오오,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무릎을 꿇었다.
코스모스의 교리를 평생 실천하고 노력해도 볼 수 없을 광명의 존재였다.
장로들은 풍선처럼 부푼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숨쉬기도 힘들어했다.
유일신의 모습이 자신들이 생각한 모습과는 다소 달랐다. 하지만 헤븐 게이트가 열리는 숭고한 모습은 분명 자신들이 모시는 신이었다.
“오셨습니까, 유일신이시여.”
아르미안은 긴 녹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차림새도 요염한 평소와는 달리 청순함이 돋보이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반면에 모두를 굽어살피는 테헤라자드는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로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자신을 극단적으로 섬기는 광신도들, 그것들을 이끄는 아르미안의 아름다움은 세월이 흐르고, 차원을 넘어도 테헤라자드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이마에 테헤라자드가 달콤한 키스를 했다.
“다녀왔어, 아라미아.”
“태초를 관장하시옵고, 생명을 깃들게 하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존귀한 존재께서 돌아오신 순간을 영광되게 생각하나이다.”
“유일신에 대한 찬양을!”
대장로가 감격한 듯이 높이 소리쳤다. 그 뒤를 잇듯이 엎드려 있던 장로들이 감정에 복받쳐서 소리친다.
그 찬양의 물결 중심에 서 있는 테헤라자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이 냄새 나는 것들은 뭐야.”
“…….”
테헤라자드의 물음에 아르미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장로들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테헤라자드는 차가운 조소를 입꼬리에 머금고서 말했다.
“꺼져.”
테헤라자드의 냉랭한 명령은 장로들을 당황하게 했다.
눈앞에 강림한 신에게 매몰차게 거부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장로들의 심경을 대변해서 아르미안이 입술을 열었다.
“신이시여, 이들은…….”
“나라는 유일신을 믿고 떠받들던 신자들이라 이거지? 지금 눈앞에 있는 꼬마 아이가 정말 신일까, 의심하는 무엄한 놈들이? 응? 날 우습게 보고 있잖아?”
테헤라자드는 일그러진 눈동자를 들어서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찬란한 황금빛을 뒤로 한 채 테헤라자드는 손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의 행동을 보고 아르미안이 움찔하며 입술을 열려는 순간이다.
꿇어앉아 있던 대장로의 무릎에 시뻘건 금이 그어지더니 천천히 옆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무릎이 잘려 나가 땅바닥을 나뒹구는 대장로는 고통스럽게 허벅지를 움켜쥐었고, 테헤라자드는 시큰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한다, 꺼져. 아니, 다리가 없으니 한 놈은 못 나가겠네? 도와줄까? 응?”
고통스럽게 허벅지를 부여잡고 있던 노쇠한 대장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테헤라자드를 보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다른 장로들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경직되어 도망가지도, 소리를 내지도 못하였다.
오로지 단 한 명, 아르미안만이 테헤라자드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침착한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오랜만에 강림하셨으니 쉬시는 것은 어떤가요?”
천성적으로 사악함을 타고난 테헤라자드였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모든 장로를 개미 죽이듯 죽일 것이 뻔했다. 교단이 운영되려면 장로들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그래, 그럼 그럴까?”
조금 전만 해도 모든 장로를 죽일 것처럼 굴었던 테헤라자드가 활짝 웃어 보였다.
그제야 장로들은 눈치를 보면서 대장로를 부축해서 나갔다.
장로들이 물밀듯이 빠져나간 대실에는 아르미안과 테헤라자드만이 남았다.
“그런데 말이야.”
테헤라자드는 피 냄새가 가시지 않은 대실을 둘러보면서 입술을 열었다.
“언제부터 감히 날 막아서기도 했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테헤라자드의 손이 아르미안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낚아채는 테헤라자드의 손은 보기에는 작달막하고 귀엽게 보인다. 하지만 악력만은 바위도 두부처럼 부술 수 있다.
테헤라자드의 손에 딸려간 아르미안은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채를 그에게 붙잡힌 채 내동댕이쳐졌다.
쾅!
둔탁한 소음과 함께 아르미안의 얼굴은 바닥에 으깨져 주변으로 핏물을 튀게 했다.
그녀의 머리를 짓누르며 테헤라자드는 이죽거렸다.
“요, 용서를…….”
아르미안은 비릿한 선혈을 내뱉으며 고통을 뱉었다.
테헤라자드는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잘 안 들려.”
“용서해…… 주세요.”
항상 당당하고 도도했던 아르미안의 입술이 원하지도 않는 말을 내뱉었다. 테헤라자드는 대답을 듣고서 그녀의 검붉게 물든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뺨에 흐르는 핏물을 혀로 핥아 보였다.
“용서를 구할 것이 많지? 이 개 같은 것아.”
선혈로 물들어가는 진녹색 머리카락을 힘껏 틀어 당기자 아르미안이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테헤라자드는 주변에 누군가가 들을까 봐 두려워하는 듯이 조용히 속삭인다.
“검둥이는 어디에 있어?”
확장된 테헤라자드의 눈동자는 광기로 득실거렸다. 몸서리쳐지는 그의 시선을 받으며 아르미안은 힘겹게 눈가를 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미…… 저희와는…….”
“흰둥이 자식과 놀아보려면 검둥이를 유혹하라고 했어, 안 했어?”
“죄송…… 합니다.”
흥, 하는 코웃음을 치면서 테헤라자드는 손안에 움켜쥐었던 아르미안의 머리카락을 풀어주었다. 주저앉은 아르미안은 테헤라자드의 광기가 여전한 것을 느꼈다.
한때는 정말로 자애로웠던 테헤라자드다.
생명의 소중함을, 생명을 지키는 것을 가르치던 존재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권능의 힘에 휩싸여, 불멸의 시간에 속박당해 버린 광기는 절대자라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왜? 몸이라도 섞으니까 정이라도 생겼나? 왜, 내 말은 듣기 싫고 짜증 나디? 반항기야? 게임 재미없게 만들 거야?”
“그 스스로 교단을 떠났으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테헤라자드가 흥분해서 소리치는 것을 보고 아르미안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미치광이 신이 만든 운명.
백 년 전의 내기를 위해 만들어진 신의 장기 말.
리에르의 운명은 그저 신의 유희를 위해 만들어졌을 뿐이다.
“풉. 넌 검둥이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테헤라자드가 배를 잡고 익살맞게 웃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면서 고개를 비틀었다.
“라고 착각하는 거야?”
테헤라자드의 비웃음.
아르미안은 착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리에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 곁에 두는 것만이 전부라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점점 약속의 그때가 되니 두려워졌다.
그래서 아르미안은 그를 자신에게서 밀어냈다.
“넌 그저 미끼일 뿐이야. 내가 네게 내린 저주는 그저 포스를 낚아 올리는 낚싯대에 불과할 뿐이라니까?”
테헤라자드가 깔깔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는 엘과의 못다 한 내기를 하기 위해서 돌아왔다. 리즈, 리에르, 아일.
포스라는 존재는 전부 테헤라자드의 장기 말에 불과했다. 게임을 즐겁게 만들어줄 이레귤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뭐, 좋아. 다른 장기 말을 준비하면 되니까. 잊지 마, 아라미아. 엘 파실드와의 내기에 따라서 너의 소망이 구현되니까.”
백 년 전, 엘 파실드는 절대자를 향하여 혼자서 도전했다.
그리고 그는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
친구들의 복수를, 모든 억울한 죽음을 대신해서 복수자로 나섰다. 하지만 엘은 곧바로 나락으로 떨어져 영원한 고통의 연옥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엘 파실드는 테헤라자드를 도발했다.
재대결 요청.
엘 파실드는 자신의 힘만으로 신을 쓰러뜨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애초에 신이 엘을 만들어낸 이유는 단 하나 때문이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괴물을 만들어 영원불멸의 시간에 자극을 주는 것.
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인간.
그것의 호칭은 포스가 되었다.
색욕, 식욕, 탐욕, 그 모든 욕구를 만든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이제 자신이 만든 놀이에도 질렸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것은 자신의 목숨으로 도박하는 것뿐이다.
그 사실을 아르미안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저주에서 벗어날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테헤라자드의 죽음.
혹은 이 세상의 죽음.
아르미안의 눈동자가 살며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