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12)
레필리아 레소드-212화(212/398)
레필리아 레소드 212화
전쟁의 끝, 그리고 평화(8)
“여기요. 얼른 오세요~ 아. 가. 씨.”
갈색 머리카락을 노란색 리본으로 단정하게 맨 여성이 손을 흔든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쾌활한 성격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녀는 헌팅캡을 눌러쓴 여성을 향해 일부러 짧게 끊어서 아가씨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아가씨라 불린 여성은 타인의 이목을 신경 쓰고 있었다.
타고난 아름다움을 지닌 은발의 긴 머리카락. 그리고 인형처럼 늘씬한 체형은 누가 봐도 시선을 끌었다.
은발의 여성은 채 낫지 않은 오른팔에 부목을 대고서 뚱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아가씨라니 왠지 기분 나빠.”
“어머, 공주님이라고 광고하고 다닐 순 없잖아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그야…….”
은발의 소녀, 유이 페브리안은 멜런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고서 망설였다. 지크 페브리안의 피를 이은 유트의 인기는 말로 하기 어려웠다.
젊은 나이에 북방의 영주들을 무릎 꿇리고, 이제는 교단의 군대까지 격파했다.
유트에 대한 대륙의 관심은 뜨거웠다.
자국에서는 어떻겠는가? 말 그대로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전부 유트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유이 역시 빠지지 않았다.
공주라는 존재는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 공주가 정말 끝내주게 이쁘다.
살아 있는 인형처럼, 꽃과 같다는데 관심을 갖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물론 그녀의 실제 성격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냥 유이라고 불러.”
“감히 공주님께 이름으로 부르라니요. 그런 무례를 범할 정도로 제가 막 나가진 않는답니다. 하지만 공주님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명을 거역할 수는 없으니 그렇게 할게, 유이.”
“반말로 하란 소린 안 했는데…….”
“유이라고 부르라면서 존대를 하면 뭔가 이상하지 않니?”
왕성 바깥으로 나왔다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흔들어대는 멜런을 보면서 유이는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기왕 데이트 나오실 거면 좀 더 예쁘게 차려입고 나오시지, 사내처럼 하고 나오실 건 뭔가요?”
자신의 하늘거리는 치맛단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멜런을 보고 유이는 울컥하는 얼굴로 반발하였다.
“데이트가 아니야! 그저 시민들 분위기를 보러 나와 봤을 뿐이야!”
“어머, 그럼 굳이 위장까지 하고 나오실 건 뭐람?”
붉은색 치맛단에 제법 꾸미고 나온 멜런에 비해, 유이는 헐렁한 바지에 조끼를 걸친 애송이 복장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녀의 타고난 미모가 죽지 않았는지, 지나가는 남성들의 흘낏흘낏 바라보는 시선들이 뺨 위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밖에 나와서도 귀염성 없는 건 여전하네요. 이래서야 그분을 실망시켜 드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애초에 그 녀석과 난 소꿉친구라는 사실 이외에 별거 없거든?”
왕성에서 나오자 멜런은 더 짓궂어졌다.
유이는 잔뜩 화가 치밀었는지 눈이 가늘게 떨렸다.
“그런 생각을 하면 손해 보는 세상인 거 몰라요?”
그렇게 말하면서 멜런은 턱 끝으로 유이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검은 제복을 걸친 리에르가 양손에 음료를 들고 있었다.
리에르는 왕성을 나와서까지 심부름이나 하는 자신의 신세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뚱한 얼굴을 보고 뭇 여성들의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길게 뻗은 두 다리. 걸을 때마다 뒤로 젖혀지는 제복 안으로 보이는 셔츠는 단단한 복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소 까칠해 보이는 눈꼬리. 무엇보다 준수한 외모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았다.
리에르는 따끔따끔한 사람들의 시선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 창피해.’
리에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이유가 지금 들고 있는 음료수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의 손에 있는 민망한 음료는 ‘베리핑크슬라임’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분홍색 빛이 나는 잔에 핑크빛 괴상한 생명체가 출렁이고 있다.
생긴 것은 괴기해도, 달콤하고 맛있다.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 지방의 음료였다.
과도하게 커다란 눈망울인 핑크빛 슬라임들이 가득한 음료. 리에르는 그것을 유이와 멜런에게 넘기며 치욕을 삼켜냈다.
“제발, 이런 것 좀 사 오라고 시키지 마.”
홍시처럼 붉어진 리에르의 얼굴을 보면서 멜런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을 받아들였다.
“공주를 지키는 기사가 되어서 이 정도로 어려움을 느끼면 어떡하신대요?”
“이거 사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자들뿐이잖아!”
여자들과 뒤섞여서 줄을 섰던 리에르는 생각만 해도 민망했는지 팔짱을 끼며 몸을 떨었다.
그런 리에르에 대해서 연민 따위는 없다는 듯이 유이와 멜런이 음료를 맛봤다.
“와, 맛있어!”
“후훗, 이게 바로 서민의 맛이다. 애송이.”
“멜런, 미쳤어?”
“앗, 설마 유이에게 말하는 걸로 들렸어?”
“눈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거든?”
유이와 멜런이 말하는 걸 듣고 있던 리에르가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그 슬라임이라는 거 어차피 몬스터 아냐? 몬스터 먹는 저질들.”
“바보 원숭이. 그냥 이미지만 그런 거지.”
“그래? 너희들 슬라임 이미지가 그렇게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줄 아나 보지? 실제 슬라임 못 만나봤으면 말을 하지 마. 습하고 음침한 곳에서만 서식하는 녀석들은 역하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점액질 몸을 빨판처럼 움직여서 벽, 바닥, 천장에서부터 기어 다니지.”
유이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러다가 먹잇감이 나타나면 산성으로 이루어진 몸을 그물처럼 퍼뜨려서 덤벼드는데, 아, 내 동료 한 명도 녀석에게 당해서 피부가 전부 녹아버리고 내장과 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했었지.”
멜런마저도 표정이 굳어서 음료수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겨우 1분도 안 될 시간에 말이지. 그렇게 끔찍한 ㅅ…….”
퍽!
리에르는 베리 슬라임이 가득 든 컵을 얻어맞고서 뒤로 넘어가 버렸다.
“안 먹어!”
유이는 비위가 상했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노려보았다.
리에르도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당최 알 수 없어 멜런은 아픈 머리를 끌어안았다.
“공주님이 많이 먹고 싶어 하시던 건데…….”
“저런 소리를 듣고서 어떻게 먹어!”
평소 베리 슬라임을 무척이나 먹고 싶어 했던 유이였다.
당장에라도 먹으러 나가보고 싶었지만, 함부로 왕성을 나갈 수가 없었다. 공주라는 신분이 이럴 때는 걸리적거렸다.
오늘처럼 남장하고 나올 수 있는 것이 흔한 기회는 아니었다.
유이는 베리 슬라임을 홧김에 던진 것이 못내 후회되었다.
“나 참…….”
성질을 내려던 리에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자신 몫으로 사 왔던 것을 유이에게 건넸다.
“성질머리 좀 고쳐라. 공주가 지녀야 할 품위는 지켜야 하지 않겠어?”
“생각 없거든?”
퉁명스러운 유이의 눈.
대체 저 녀석은 항상 무엇이 그리 불만이기에 투덜거리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 걸 진지하게 물어본다 해도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지는 의문이지만.
관심 없다는 듯이 말하던 유이는 리에르의 손안에 있는 베리 슬라임의 달콤함이 자꾸 아른거리는지 자신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리에르의 베리 슬라임을 덥석 집어 든 유이는 새침한 얼굴을 지어 보이며 못 이기는 척 받아 들었다.
홀짝홀짝.
입안의 달콤함을 느끼며 유이는 다시 기분이 좋아진 듯 헤실거렸다.
그런 유이의 모습을 보면서 리에르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얼마 되지도 않는 음료이기에 한 번 쭉 들이켜면 끝날 것을 저렇게 아껴서 먹을 필요가 있는가 싶을 정도였다.
멜런과 유이는 손에서 베리 슬라임을 놓지 않았다.
컵은 어차피 시장에서 나갈 때 반납하면 되는 공용 자산이기에 상가를 돌기 시작했다.
손재주가 좋은 장인이 만든 장신구라든지, 새로 들어온 옷이라든지.
명목상 경호라는 이유로 따라붙은 리에르는 말없이 두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노골적으로 피곤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런 리에르에게 두 여자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한창 옷가지나 장신구들을 구경하더니 광장에서 류트를 연주하는 음유시인을 구경하기도 했다.
낡고 지저분해 보이는 녹색 고깔모자의 시인이 깨져 나간 손톱을 들어 류트를 켠다. 그윽하고도 경쾌한 연주는 주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했다.
음유시인의 모자에도 동화와 은화가 모일 때쯤에 일행은 벤치에 앉았다.
리에르는 멜런과 유이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홀짝홀짝.
‘아직도 먹어?’
리에르는 두 사람이 여태 음료수를 못 먹은 것을 보고 신기해했다.
혹시나 컵에 무슨 연금술사의 마법이라도 걸리지 않았나 의심될 지경이었다.
옛 전설의 노래, 인류 최초의 아리아를 기리는 이야기와 그에게 불을 전달한 자애로운 불의 여신 아라미아를 기리는 노래가 들려온다.
몬스터만이 가득한 대륙에 인간들만을 위한 왕국을 건설한 위대한 아리아.
그는 소수 부족의 부족장들을 하나로 모았다. 여신 아라미아에게 전달받은 불과 마나로 아리아는 인류를 이끌었다.
불은 인간을 추위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불은 인간으로 하여금 적을 쫓아내게 하였고, 기술을 발전시켰고, 문명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그 문명은 몬스터들의 날카로운 발톱을 흉내 낸 도검과 창을 제작하게 했다.
아라미아의 은혜로 영웅왕 아리아는 황금의 샘에서 칠흑의 마검 칼리프 니체를 얻었다. 칼리프 니체를 가진 영웅왕은 다섯 무구를 얻게 된다.
황금의 룬 위시(Rune Wish), 기적의 그랜드 크로스(Grand Cross), 성검 발락시아(Ballacksia), 공간의 투 헤븐(Two Heaven), 신화의 문 리버(Moon River).
영웅 신화의 음악을 들으며 리에르는 곧 만나게 될 유트를 떠올렸다.
벌써 전쟁이 끝난 지도 한 달여 이상이 지났다. 그 시간이면 수도에 도착할 시간이다.
리에르는 잠시간의 평화 속에서 유트와 함께할 시간을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요 근래 보기 어려운 에레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집에 들르고부터 묘하게 쓸쓸함이 보이던 그녀는 페리안의 왕성에 도착한 이후 급속도로 보기 어려워졌다.
그녀가 묵는 손님용 객실에 찾아가도 문이 굳게 닫혀 있거나 외출하고 없을 때가 많았다.
겨우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식사 시간에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얼굴을 마주하지만, 그녀가 짓는 웃음은 어딘가 모르게 지치고 처연해 보였다.
항상 활달하고 명랑했던 그녀가 밝아 보이는 웃음 뒤로 슬픔을 가진 것은 분명히 리에르 자신 때문이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리에르는 아무런 걱정 없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왔던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저절로 입가에 씁쓸함이 머문다.
곧 승전을 거두고 돌아오는 왕의 귀환을 환영하기 위하여 축제를 준비하는 수도의 사람들.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함은 지켜졌다고 안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리에르 자신과는 동떨어진 것만 같았다.
늦잠을 자서 어머니한테 혼나고, 반찬 투정을 하고, 부스스한 머리로 눈곱도 떼지 않은, 감은 눈으로 등교하던 자신이라는 존재는 기억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어딘가 놀러 가는 듯한 소년들이 몰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자신도 그랬듯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티끌만큼 존재하지 않는 녀석들이다.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정신이 팔렸다.
“그럼 아가씨, 전 이만.”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리에르는 멜런의 목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멜런은 잘 차려입은 젊은 남성의 팔짱을 낀 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너…… 설마…….”
유이는 긴 속눈썹이 무겁기라도 한 듯이 눈을 깜박거리며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단순히 수도에 놀러 나온 것치고는 너무 꾸몄다 싶었던 멜런이 동갑내기로 보이는 남자와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