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13)
레필리아 레소드-213화(213/398)
레필리아 레소드 213화
전쟁의 끝, 그리고 평화(9)
멜런은 당당하게 턱 끝을 올리면서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리에르와 유이, 서로에게 호감이 충분하면서 관계가 미적지근한 두 사람을 위해 둘만의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왕성에서 아무리 얼굴을 맞대고 있다 해도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고, 신경을 쓰지 않으려야 안 쓸 수가 없었다. 또한, 바깥으로 나와 시간을 보낸다면 아무리 느려 터진 두 사람이라 해도 진도가 나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멜런은 외출을 유도했다.
자신의 이 갸륵한 희생정신을 유이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감동할지 가슴이 뜨거웠다.
그 귀여운 토끼 같은 눈망울을 글썽거리며 자신을 바라볼 것을 생각하면 왠지 언니가 된 기분이었다.
멜런은 뿌듯한 얼굴로 유이를 바라봤다.
‘자, 그래요. 공주님, 당신을 이렇게도 생각하는 사랑스러운 시녀랍니다. 고맙지요? 절 다시 보게 되셨지요?’
멜런은 설레는 마음으로 유이의 말을 기다렸다. 유이는 사랑스러운 표정 대신에 미간을 찌푸리면서 흥, 하는 비아냥거림을 입가에 머금어 보였다.
“뭐야, 설마 네 데이트 때문에 감히 공주님을 왔다 갔다 하게 하는 거야?”
“네?”
멜런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유이의 반응에 잠시 얼이 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종장 눈치 때문에 쉬지는 못하고, 내 담당인 네가 데이트를 하기 위해선 내가 왕성에 없어야 하겠고……. 설마 날 이용할 줄이야.”
“그렇게밖에 생각 못 해요? 제가 겨우 데이트 따위를 하기 위해서 그랬을 거라고…….”
유이의 냉랭한 말에 멜런은 충격받은 듯이 반론을 펼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의 옆에 있던 동갑내기 남성이 사색이 되어서 멜런을 내려다보았다.
“겨우 데이트 따위……. 하기야 나 같은 녀석 따위는…….”
검술 훈련을 한 듯, 다부진 체격을 지닌 사내는 다소 충격받은 듯이 보였다. 어울리지도 않게 눈물이 글썽거렸다.
깜짝 놀란 멜런이 손사래를 치면서 부정했지만 사내는 몹시 마음이 여린 듯 보였다.
그것을 보고 유이가 코웃음 치면서 멜런에게 물었다.
“나야, 쟤야?”
“왜 갑자기 그렇게 진행되는 건가요?!”
자신을 괴롭히는 유이를 보면서 멜런은 당황스러움을 드러내 보였다. 아직 정식으로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최근 소개를 받아 만나고 있는 남성은 괜찮은 가문에 적당한 재력을 지닌 남성이었다.
유이는 그 예쁘장한 얼굴에 어울리지도 않는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멜런의 당황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멜런은 생각지도 않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자,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는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뭐 하세요?”
“구경.”
유일한 돌파구인 리에르를 향하여 멜런은 질타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리에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담백하게 대답하고, 더는 반응하지 않았다.
멜런은 개인적으로 리에르가 유이를 데리고 사라지길 원했지만, 그가 그럴 생각 하고 있지 않다는 걸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멜런은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아가씨, 그런 것보다 성 나올 때부터 가지고 나오신 그건 뭐예요?”
“어?”
멜런이 갑자기 화제를 돌리자 유이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팩을 들고나온 유이는 평소 꾸미는 것도, 화장 같은 것도 잘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언가 들고나온 것을 보며, 멜런은 그 물건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에 심술궂은 표정으로 역공을 취하였다.
“날씨도 쌀쌀한데 선물 주실 거면 얼른 주시지, 왜 가지고만 계실까 몰라?”
채 완성되지 않았던 머플러를 서둘러서 마감했다.
유이는 깜짝 놀라 뭐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두 남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멜런의 친구는 리에르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근데 멜런이 아까 언뜻 말하던데……. 지금 모자 쓰고 있는 아가씨의 정체가…….”
은발이라는 머리카락이 대륙에서 보기 희귀한 색이기도 하고, 페리안의 수도에서 은발은 단 한 사람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젊은 패왕과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 시녀라는 직위가 조건 없이 천민이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의 직위에 따라서 시녀들의 직책도 정해진다. 집안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고위직 시녀가 될 수조차 없었다.
멜런이 공주의 시녀로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남자 친구는 남장한 은발 소녀를 보며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성의 꽃이라는 거짓말로 포장된 성질 더러운 녀석이지.”
리에르의 말을 들은 남성은 그제야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유이를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투박해 보이는 차림새에 비해 놀랍도록 매끄러워 보이는 피부와 이색적인 은색의 머리카락들.
다른 사람과는 이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투영되는 듯한 유이를 보면서 남성은 잠시 굳어 있었다. 그러다가 남성은 공주, 그리고 공주의 시녀가 있는 이곳에 서 있는 남자의 정체를 생각했다.
칠흑의 제복을 걸친 남자. 그의 이미지로 보면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곧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젊은 시절 지크 페브리안이라는 영웅을 동경하여 검술을 배우고 수련했다.
뛰어난 재능은 없었기에 수습 기사의 신분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새로운 근위 기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네 번째 근위 기사는 홀연히 나타나서 수많은 적을 제압했다.
페리안 최강의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과 공주의 소꿉친구라는 소문이 계속 불어났다.
남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리에르를 향해 말했다.
“호, 혹시 그쪽 분이 흑사자?!”
리에르는 마주 보고 있는 남성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적혈의 악마보다는 낫지만,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칭호다.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어, 어? 정말로!”
리에르가 순순히 인정하자 빌마르크는 생기 넘치는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아, 정말 영광입니다! 소문만 무성하던 영웅을 내 눈으로 보게 되다니,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서!”
“아니, 뭐……. 그럴 것까지는.”
“나이도 나와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 강하다니. 저는 아무리 검술을 갈고닦아도 재능이 없는지 실력이 늘지 않던데. 게다가 잘생기고, 왕의 친구이고……. 아, 정말 세상은 불공평하네요.”
빌마르크의 말투는 잘못 들으면 시비조로 들릴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리에르는 재능이 없어서 힘들어했다.
어쩌면 지금 앞에서 떠들고 있는 남자와 자신은 다른 점이 없을지도 몰랐다.
리에르는 자신의 힘과 재능 덕분에 비극을 겪게 되었다.
그 비극은 아직도 리에르의 발목을 놓지 않고 있었다.
-살아남으렴, 나에게 복수하고 싶다면 살아남아서 발버둥 쳐봐.
아르미안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리에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 다정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친 그녀였다. 갑자기 왜 자신의 운명을 비틀어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행복했던 삶은 박살 났고, 적혈의 악마라는 호칭과 함께 세상의 증오가 되었다.
리에르는 모든 원망과 분노를 아르미안에게 쏟아붓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복수라는 불꽃에 자신의 몸을 던져야 했다.
자신의 목숨을 땔감 삼아서 끝없이 태워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살려는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트와 유이를 재회하였고, 에레사를 다시 만났다. 죄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을 잊지 않는 가족이 있었으며 돌아갈 장소마저 있었다.
“소문으론 공주님과 연인 관계라던데, 사실인가요?”
남자는 누가 멜런의 지인이 아니랄까 봐 리에르를 붙잡고 질문 세례를 시작했다.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리에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검술이나 마법 쪽의 질문이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유이와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만 있었다.
리에르는 남자의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에는 멜런에게 협박받고 있는 듯한 유이의 모습이 보인다.
왠지 리에르는 빙긋 웃음이 흘러나왔다.
끔찍했던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준 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리에르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었다.
유이는 그에게 있어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이다.
대륙에 악명 높은 흉악범이 되어버린 자신에게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대해준 그녀.
항상 찡그린 얼굴로 시비 걸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서툰 배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자신의 몫을 해내기 위해 위험한 전투를 치렀다.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가끔 환한 미소를 지을 때면 그것이 너무나도 특별하고,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묘한 마력들이 있었다.
잃기엔 너무나 소중한, 버리기엔 너무나 행복한.
“으으…….”
유이는 멜런의 놀림에 분통이 터지는 얼굴을 지었다. 그녀는 냅다 리에르를 붙잡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멜런은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저에겐 안 된답니다!”
멜런의 도도한 말을 듣고서 남자 친구는 눈만 깜박거렸다. 그는 리에르와 유이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무슨 놀림을 당했는지 몰라도 유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서 터질 것 같았다.
왠지 리에르는 피식, 웃음이 지어졌다.
천하의 유이 페브리안도 못 당하는 녀석이 있을 줄이야.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조소를 머금는다.
예전의 유이는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고 나서 꽤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에르는 그런 유이의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봤던 그녀의 얼굴은 항상 찡그린 얼굴과 투덜거리는 모습뿐이었으니까.
리에르의 손을 붙들고 멜런에게서 도망치는 유이의 손이 묘하게 따뜻했다. 이 행복한 온기가 언제까지나 유지되기를 자신도 모르게 기도한다.
한참 동안 마주 잡은 손. 간혹가다가 유이와 스킨십이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손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으으…….”
유이는 신음을 내뱉었다.
따뜻한 온기.
작고 부드러워 금방이라도 손에서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유이는 지금 손을 잡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달리면서 남은 한쪽 손으로는 모자를 눌러 벗겨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렇게 해도 긴 머리카락 올이 하나, 둘씩 빠져나와 허공에 출렁인다.
이미 멜런은 보이지 않았다.
즉, 더 뛸 필요가 없었다. 리에르는 맞잡은 유이의 손을 붙들어 세웠다.
덕분에 유이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간헐적으로 숨을 헐떡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리에르를 향했다.
“아!”
유이는 그제야 자신이 리에르의 손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얼굴을 붉어진다. 짜증 난 듯이 유이는 리에르에게 화를 냈다.
“아우, 정말!”
“내가 잡은 게 아니란 걸 잊지 말아 주길 바란다.”
리에르가 중요한 부분을 잊지 말라는 듯이 넌지시 입을 열어 보였다. 유이는 눈을 흘기면서 입술을 삐죽였다.
“알고 있어.”
“그것참 다행이네.”
제법 쌀쌀한 날씨 덕분에 손안의 부드러운 온기가 서로에게 전달되었다. 이 온기를 놓친다는 것은 손해다.
“놓으면 되잖아!”
유이의 말에 리에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도리어 성질을 부리는 유이의 모습을 보니 양심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리에르는 연장자가 지녀야 할 품위를 보여주려 노력했다.
“난 신사거든. 그리고 날이 추우니 보온용으로도 나쁘진 않았고.”
왕실의 꽃이라고 불리는 그녀. 소년, 소녀에게 설렘을 불러오는 존재.
비록 리에르와 코흘리개 시절부터 함께 지냈다지만, 선머슴 같았던 어린 시절과는 달랐다.
유이는 자신의 손을 겨우 보온용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리에르의 말에 입술을 비죽였다.
그 덕분에 유이는 리에르의 손을 허공에 털어버렸다.
손안에 감돌았던 따뜻한 온기가 금방 사그라든다. 왠지 모르게 리에르는 아쉬움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