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14)
레필리아 레소드-214화(214/398)
레필리아 레소드 214화
전쟁의 끝, 그리고 평화(10)
어렸을 적부터 타인에게 배타적이던 유이였다.
아무리 멜런과 친해졌다지만 꼼짝도 못 하게 된 약점이 궁금해졌다.
‘나도 그 약점 좀 이용해 보고 싶은데.’
리에르는 호기심이 생겼다.
전투에 대한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예민했다. 하지만 유이에 대해서는 둔감했다.
유이가 아무런 말 없이 앞장서서 걷는다. 종종걸음으로 걸어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이전의 선머슴 같은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리에르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유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왕성에 어울리는 교육을 받았다.
남성들과 검을 맞댈 정도로 손재간이 좋고 다재다능한 그녀이니만큼 낯선 교육도 빠르게 익혀 나갔다.
예전에 비해 여성스러워진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어디로 가는지 말도 하지 않고서 유이는 온갖 물건들을 파는 도매상을 지나고, 물건을 하역하는 창고 쪽으로, 그리고 손님을 호객하는 가게까지 걸어 나갔다.
무수히 지나가는 사람들. 낯선 사람들과 낯선 옷차림새.
문화와 말투, 억양들은 다르지만,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어디나 시끌벅적하고 활기가 넘쳤다.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의 빛은 눈을 부시게 만든다.
살이 오른 돼지를 쭉, 갈라서 연한 부위를 자르는 점원. 페리안 같은 추운 지방에서 필수품인 머플러와 장갑, 그리고 안감이 양털로 되어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는 로브를 파는 상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이는 말없이 한참을 걸어 다녔고, 아직 페리안 날씨에 적응하지 못한 리에르는 로브 자락 안으로 찬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옷깃을 여몄다. 입만 열면 찬기에 입김이 서린다.
사방팔방에서 소리치고, 떠드는 상인과 점원들도 입김을 내뿜으며 미소를 그린다.
물론 영업용 웃음이긴 하지만 물건이 팔리고 값이 나가는 것으로 그들은 만족감을 느끼고 또 다른 희망을 이어간다.
과일 가게에서 걸음을 멈춘 유이는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후덕하게 생긴 아줌마는 손님이 들어오자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영업용 웃음을 지었다.
그는 페이서스에서 단골이었던 과일 가게 아줌마를 떠올렸다.
집 근처에 가게가 있어 얼마나 장난을 걸어댔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과일을 자주 얻어먹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인자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금세 굳어진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항상 자상하고, 다정하게 바라봤었다.
비극의 그날 이후, 그녀의 생사는 알 수가 없다.
아니, 죽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 비극의 한 부분을 자신이 차지하고 있었다.
어두운 기색이던 리에르는 갑자기 무언가가 휙 날아드는 것을 느낀다.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간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손안에 쥐어지는 딱딱한 물건.
손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니 시커멓고 못생긴 과일이 보였다. 기분 나쁘게 흰 털로 덮여 있는 것이 흉측하다.
“뭐야, 이건?”
“페리안에서만 나는 열매야. 먹어봐.”
유이는 털을 잡아당겨 찢듯이 뽑아냈다. 그러곤 크게 한입 앙, 하고 베어 문다.
리에르는 딱딱하게 생긴 열매를 속는 셈 치고 입안에 넣었다가 이빨이 얼얼한 것을 느껴야만 했다.
마치 돌덩어리처럼 단단한 이런 것을 먹으란 말을 한 유이를 향해 달갑지 않은 표정을 건네주었다.
“바보 원숭이. 거기 꼭지 홈을 잡고 비틀어 벗겨내서 먹는 거거든? 네가 먹을 줄 아는 것은 바나나밖에 없는 거야?”
“야, 처음 보는 걸 내가 어떻게 아냐?”
유이의 핀잔에 리에르는 시큰둥한 얼굴로 답하고서 시키는 대로 꼭지를 잡고 홈의 방향대로 당겨보았다.
조금씩 드러나는 속 안의 초록빛 과즙, 물렁물렁한 푸딩같이 흐늘거리는 그것을 보며 리에르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법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풍기자 속는 셈 치고 그것을 한입 베어 물자 부드러운, 하지만 씁쓸한 맛이 혀끝으로 느껴져서 리에르는 오만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어때?”
“네가 만든 음식 맛이 나.”
“그렇게 맛있을 리가 없을 텐데?”
“네가 만든 음식 먹어보긴 했냐?”
아무리 자기 발 냄새는 못 느끼고, 자신이 만든 조각상은 예술미가 느껴지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기에 리에르는 맹렬하게 비난했다.
리에르가 시작했으니 유이도 한바탕 퍼부어야 하지만 녀석은 눌러쓴 모자 사이로 쿡쿡,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거 아직 덜 익어서 시큼하고 맛없을걸.”
“그래, 여러 가지 의미로 네 음식처럼 덜 만들어진 느낌이 들긴 해.”
드디어 유이가 눈썹을 찌푸려 보였다. 리에르는 드디어 한판 붙는다고 생각하며 방어할 준비를 했으나, 여느 때처럼의 공격이 들어오지 않아 의아함을 느껴야만 했다.
“미미안트. 페리안의 후숙 과일이라서 숙성시켜 먹으면 맛있는 과일이야. 누구 씨처럼 처음 볼 땐 시커멓고 딱딱해서 재미없고 맛없는 음식이라 처음 보는 사람은 버리게 되지.”
“그래, 시커메서 미안하게 됐수다.”
투덜거리듯 내뱉는 리에르를 보고서 유이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다시 다른 곳으로 향했다.
소란스러운 상점가를 빠져나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언덕 가를 향해 유이는 걸어 나갔다.
모든 풀이 말라붙고 서릿발이 선 언덕은 미끄러운지라 몇 번이나 리에르는 넘어질 뻔하였다.
이렇게 언덕길이 미끄러운데 잘도 올라간다 싶어서 유이를 바라본다.
리에르의 시야에 의외로 탄력 있어 보이는 엉덩이가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흠칫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비록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달라붙은 옷이 더더욱 굴곡을 드러냈다.
“바보 원숭이, 잘 보이지?”
갑작스러운 유이의 말에 리에르는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으며 답변하였다.
“어, 어. 많이 성숙했…….”
퍽!
오늘 오랜만에 느껴지는 타격감에 리에르는 콧잔등을 움켜쥐면서 고통스러워했다.
“때릴 거면 미리 말하라고!”
“미리 말하면 피하잖아, 이 변태 원숭이야!”
아프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해서 리에르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인상을 찌푸렸다.
유이도 지지 않을 만큼 눈살을 찌푸리며 턱 끝으로 도시를 가리키며 입술을 뗐다.
“수도를 보라고, 바보 멍충아.”
“항상 보던 거잖아.”
리에르는 어느새 낮게 자리 잡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인 것을 보았다.
개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이니 왠지 모르게 신기하다.
눈으로 전부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도시. 전부 다 말을 걸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생명력.
그런 배경을 깔아놓고서 유이는 빙긋이 웃으면서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네가 지킨 도시잖아.”
유이의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게 상냥하다.
그녀의 미소가 청순하고 발랄함을 품고 있어서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낯부끄러워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돌렸다.
“내가 지키긴. 난 그저…….”
사람들을 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싸우지 않으면 소중한 지인들이 핏빛으로 물들 것이 두려워져서 검을 뽑았을 뿐, 그 이상의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사람들. 지금껏 스쳐 지나간 적도 없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검을 뻗어본 적은 없었기에.
“이유야 어쨌든, 이전의 북방 대륙은 약육강식의 세계였어. 규칙은 있었지만 무의미했지. 그런 곳에 아주 강력한 규칙이 생겼지.”
페리안의 존재 의미.
유트와 유이가 자신의 핏줄 정당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북방 대륙의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생존할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다. 죽고 죽이는 무의미하고도 끝없는 나선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나선에서 빠져나와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운명의 심판이다. 그러나 최소한은 혼자가 아니다.
하나의 이름 아래 모두가 손을 잡을 수가 있다.
“네가 지킨 것은 모두가 있을 수 있는 울타리야.”
유이의 표정이 천진난만했다. 그 모습이 왠지 눈부셔서 리에르는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유이는 기지개를 켜면서 모자를 벗어 틀어 올렸던 은회색 머리카락을 풀어 젖혔다.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이 옷깃을, 그리고 그녀의 어깨 위로 물보라를 튕기듯 은색 낱알이 춤을 춘다.
자신도 모르게 유이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 리에르는 갑작스럽게 한기를 느꼈다.
에취!
리에르가 재채기를 끝내고 코를 검지로 쓱 문댔다.
높은 곳에 올라와서 찬바람을 맞으니 저절로 옷깃이 여며진다.
리에르의 고향인 남쪽은 이런 추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런 리에르의 모습을 보면서 유이는 얼어붙은 원숭이를 떠올리며 킥킥, 웃어 보였다.
“자, 받아.”
유이는 그동안 들고 있던 가방을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 든 가방은 무게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리에르는 안을 들여다보고서 유이를 흘낏 바라봤다.
“날도 추운데 뭐 하나라도 더 걸치고 있어야지. 멍청한 게 감기까지 들면 더 귀찮아지잖아.”
“말을 해도 꼭 그런 식으로 해야겠냐?”
리에르는 볼멘소리하며 팩 안에 담긴 까만색 머플러를 보고는 눈을 깜박거렸다.
“나 주는 거야?”
에레사 이외에 그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아본 기억이 없기에 리에르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게다가 그 상대가 유이라는 것은 의외 중의 의외.
“이걸 왜 나에게?”
요령이 없는 리에르는 고맙다는 말 대신에 다소 당황스러움까지 묻어 나오는 말투로 묻는다. 일부러 유이에게 무안함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딱히 별 의미는 없어. 이번에 네게 빚도 있고, 날도 추워졌는데 목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어서야 감기 걸리기에 십상이거든.”
“…….”
리에르는 싫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리에르는 유이가 준 머플러를 목에 둘렀다. 차가운 기운이 감돌던 목을 감싸 안은 머플러는 따뜻한 온기를 기분 좋게 건네주었다.
“바보 원숭이.”
머플러를 말 그대로 대충 매고 있는 리에르를 보면서 유이는 시큰둥하게 입을 열어 보였다. 그러고는 리에르에게 다가와 직접 만든 머플러를 다시 감아주었다.
왠지 오늘따라 다정하게 느껴지는 그녀가 이질적으로 보인다.
리에르는 쑥스러움마저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였다.
차가운 바람을 통해 전해지는 유이의 체취.
“생각해 준 것은 고맙다만, 내가 받아도 되는 거냐?”
“딱히. 이 정도는 해야 앞으로 부려먹을 수 있을 거 아냐.”
그렇게 말하는 유이의 맑은 눈동자가 리에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투명하고 맑은 그녀의 눈동자에 빨려들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웃음을 짓는 것 같은 눈빛을 보며 리에르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니, 그것보다 너희 지역에선 머플러 선물은 연인끼리만 주는 것 아니었어?”
“…….”
리에르가 한 말을 듣고서 유이는 머플러를 감아주던 손을 멈칫하였다.
리에르는 굳어져 버린 유이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다.
경직되어 있던 그녀의 손은 이내 얼굴과 함께 새빨갛게 물들며, 말을 못 하고 벙긋거리기만 하는 입술이 보인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모르는 것이 많은 리에르다.
그런데 이 지역 젊은이들의 풍습을 알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덕분에 유이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는데 유이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왜?”
갑자기 조용해진 유이의 얼굴이 타는 듯 붉어진 것을 보고 리에르는 열이라도 있는가 싶어서 손을 들어 올렸다.
리에르의 긴 손가락이 이마에 닿자 유이는 그제야 눈동자를 굴리며 올려다본다.
“나, 나는 그딴 건 잘 몰라! 오빠 거 만들다 실패한 것을 버리기엔 아까워서 줬을 뿐이니까!”
“그래, 그래.”
리에르는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가려는 듯 발걸음을 서두르는 유이의 모습을 보며 리에르는 볼을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재회했을 때보다는 덜하지만 리에르가 요새 무언가를 고민하고, 힘들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었다.
나름대로 선물을 준비했는데, 설마 머플러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창피했다. 부끄럽다.
평소 같지 않게 묘하게 부드러운 유이가 토라진 듯이 돌아서서 혼자 내려간다.
리에르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당최 그녀가 왜 그러는지 리에르는 알 수 없었다.
물결 같은 은색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걸어 나가는 유이의 뒷모습.
오늘 유이와 함께 외출을 나오기 전에 멜런이 넌지시 말했다.
「그거 알고 있어요?」
「저희 지방은 연인들끼리 머플러를 선물하는 전통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