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15)
레필리아 레소드-215화(215/398)
레필리아 레소드 215화
전쟁의 끝, 그리고 평화(11)
이 지역에서는 자신의 연인에게 머플러를 선물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곳에선 가족이나 연인 이외에 머플러를 선물하는 일은 없답니다.」
생명을 상징하는 목과 활력을 상징하는 심장까지 내려뜨리는 머플러는 연인이 안전하기를 기도하는 부적과도 같았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머플러 선물을 받지 마세요! 머리채 잡고 싸울 일 생기는 거니까요. 알았죠?」
누가 머리채를 잡는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굳이 의미 없는 말을 되새김질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멜런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마치 유이가 머플러를 선물할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머플러가 가지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처럼.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보였다.
턱에서부터 뜨겁게 느껴지는 기운에 삽시간에 귓불까지 붉어진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의미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간혹가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한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유이 페브리안은 리에르 아르빈트를 친오빠의 친구로 본다.
유이 페브리안은 리에르 아르빈트를 소꿉친구가 아닌 남자로 인식하고 있다.
리에르는 ‘왜?’라는 질문을 하고 싶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평소 같으면 유이에게 대놓고 물어볼 리에르였다.
그녀의 분위기가 점점 더 확신이라는 단어 쪽으로 기울어진다.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는데 기분 나빠할 남자는 없다.
하지만 리에르가 처해 있는 상황과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과거는 행복은 사치라고 속삭인다.
“바보 원숭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하는 유이를 보고 리에르는 깜짝 놀랐다.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는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유이의 투명한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오로지 자신만을 향했다.
진정이 될 리가 없다.
서늘한 바람의 결을 따라 허공에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은빛 머리칼.
“너무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마. 예나 지금이나 넌 리에르 아르빈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스스로의 어두운 과거를 버리지 못하고 고뇌하는 리에르를 향하여 유이는 작게 소리쳤다. 그러곤 빙긋이 웃어 보이는 그녀를 보면서 리에르는 하하, 짧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보다 어린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평소에는 투덕거리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지만, 서로의 솔직한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리에르는 지금 이 순간 유이의 진심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다.
그녀의 말은 응원도, 위로도 될 수 있는 마법 같은 단어로 조합되었다.
듣는 이로 하여금 기운을 복 돋는다.
“앞으로도 오빠랑 나, 에레사 언니 다 함께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테니까.”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유트 남매를 만나기 이전에 죽음만을 생각했다.
자신의 몸을 불태울 불꽃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애타게 보고 싶고, 그리웠던 사람들을 만났다. 가족을 다시 만났다. 이제는 제대로 말할 수 있다.
살고 싶다고.
언제 적이 노릴지 모르는 수풀 속에서, 제대로 다리를 펴고 누울 수도 없는 진흙탕 속에서 피를 마시고 풀뿌리를 캐 먹으며 생존했다.
차가운 비에 젖어 몸을 웅크렸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경계하고, 감기는 두 눈을 힘겹게 열며 살아왔다.
자신이 빼앗은 생명이, 원혼들이 발목을 낚아채고 어깨를 잡아당긴다.
끝없는 악몽이다. 스스로가 역겹고, 싫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문제는 아니었다.
끊임없이 굴러가는 죄의 굴레.
그 속에서 벗어나려면 결정을 해야 했다.
엘 파실드가 제안했던 달콤한 유혹. 미심쩍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리에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뿐만이 아니다.
최소한의 양심을 채울 수 있다. 최소한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혼자 남을 에레사는 리에르가 아니라면 영원히 외톨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에레사를 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전쟁이 끝나면 에레사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난다.
비루할지라도 죗값을 치러야만 한다. 비록 에레사 그녀가 거절한다 하여도. 평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조용한 곳에서 더 이상의 싸움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가길 원한다.
“아니.”
무겁게 내뱉은 리에르의 말에 유이는 눈동자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옅은 웃음을 지으며 리에르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난 교단과의 전쟁이 끝난다면 떠날 거야.”
예상치 못한 리에르의 말에 유이의 보석을 닮은 눈동자가 천천히 떨리기 시작한다.
한때는 다신 못 보는 줄 알았었다.
다시 만난 이후로는 영원히 함께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생각지 못한 말을 내뱉는다.
유이는 왜냐는 간단한 물음을 하지 못한다. 왠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서 리에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레사와 함께.”
모든 것이 끝나면 에레사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원래 결정되면 조용히 떠나려 했던 생각과는 다르게 예고된 이별을 이야기한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유이에게는.
“여기도 살기 좋을 거야.”
유이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이 보였다. 우는 것도, 슬픈 것도 아닌 듯이 태연해 보인다.
리에르는 그동안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 기억들이 귓가에 속삭인다.
그녀가 아파하고 있다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녀의 말마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평온한 삶을 사는 것도 행복할 터다. 하지만 그런 삶은 죄인에게 어울리는 삶이 아니었다.
리에르는 왜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에레사의 허락조차 구하지 않은 앞으로의 일이었다. 그녀가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직감하고 있다.
에레사는 자신과 함께해 줄 거라고.
“꼭 에레사 언니랑?”
“응.”
“그래.”
유이는 리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수롭지 않은 듯, 태연하게 그렇구나 하고 넘겨 버리며 다시 언덕길을 내려갔다.
하지만 유이의 머릿속은 실타래가 엉킨 듯이 복잡해졌다.
리에르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가끔 보여주는 엉성한 모습들도, 한심할 정도로 심약한 마음들도, 그리고 에레사 한 명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예전부터 리에르는 그래왔었다.
오로지 에레사 한 명만을 바라보았다. 높은 곳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느라 주변에 있는 다른 여자들은 바라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유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듣고 싶지 않았지만, 들을 수밖에 없던 이야기였다.
세월은 흐르고 외모는 달라지고 몸은 성장하고 운명은 뒤틀려 버렸다.
세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어긋나 있었다.
스스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복잡한 마음을 리에르에게 전할 생각까진 없었다.
유이는 픽, 하며 실소를 머금었다.
왠지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 싹 가라앉아서 침울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그에게 마음을 전할 용기 따위는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지금의 관계도 끝날 거라는 공포가 어깨를 짓눌렀다.
왠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이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보 같아.’
속에서 뜨겁게 올라오는 복잡한 감정이 갈무리가 되지 않는다. 유이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뒤에서 따라오는 리에르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유이도 딱히 그에게 할 말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두 사람 간에 적막이 감돌았다. 서로 나란히 흙 계단 밑을 내려간다.
유이가 충격으로 혼란스러울 때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날이 쌀쌀해져 서릿발이 앉아 있는 언덕길은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지기 쉬웠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리에르의 말을 곱씹는 데에 몰두한 나머지 발밑을 주의하지 못했다.
어어, 하면서 뒤로 넘어가는 유이는 이내 손끝을 붙들어 주는 리에르가 보였다.
등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팔.
차갑지만, 점점 온기를 품어주는 손길.
유이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리에르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리에르는 짓궂게 놀리지도, 비아냥거리지도 않았다.
깜짝 놀란 듯한 그의 얼굴이 천천히 안도하는 것으로 바뀐다.
유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심장 고동 소리, 평소에는 들릴 리 없던 잔잔한 호흡 소리까지.
유이는 재빨리 몸의 균형을 잡고서 리에르의 품에서 벗어났다.
“조심해.”
“응.”
평소 같으면 불필요한 도움을 주었다고 투덜거릴 텐데, 유이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고분고분했다.
얌전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리에르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하는 게 느껴졌다.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은 그동안 생각해 두었고, 결정했던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또 다른 감정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뭐라고 형용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유이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는 소녀였고, 친오빠인 유트가, 그리고 이곳에서 친해진 멜런이, 넓게는 성안의 모든 사람이, 더 넓게는 페리안이라는 신흥 국가의 국민이 있었다. 하지만 에레사는 이 세상에서 오로지 리에르 하나였다. 사랑도, 증오도.
“손잡고 있어.”
다소 멍해져 있는 듯한 유이가 아까 넘어질 뻔한 뒤로 리에르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리에르가 지적했다. 유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놓으면 되잖아.”
떼어낼 수 없는 부드러움이 리에르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싫으면.”
평소와도 같은 시큰둥한 목소리.
리에르는 은빛 머리카락을 일렁이는 유이를 향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북방 대륙 연합, 페리안 대 코스모스 교단의 아키서스 공방전.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전쟁은 큰 반전을 맞이하여 페리안의 대승으로 종식되었다.
교단의 총대장으로 군을 지휘하던 티미 아크우드는 패잔병을 이끌고 씁쓸한 복귀를 하였다.
대패한 티미는 아크우드 가문이라는 이름 덕분에 사형은 면했다. 대신에 본래의 직급에서 물러나고 한직이 되었다.
교단의 입장에선 정예 중의 정예인 성기사는 더없이 소중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흑사자에 의해 수많은 성기사를 잃었다.
크디큰 전력손실이었다.
그 이후 남벌을 위해 아렌 왕국을 쳐들어갔다. 하지만 대패하여 다시 한번 전력을 손실한다.
그렇기에 교단은 마지막 수를 사용했다. 그것은 아직 왕국이 되지 못한 페리안을 점령하는 북벌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페리안에게 패한 교단은 연달아 두 번을 패전함으로써 신성 제국을 세운다는 계획에서 멀어졌다.
그와는 반대로 페리안 왕국은 순풍에 몸을 맡긴 배처럼 순항하고 있었다.
유트 페브리안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지 않던 북방 세력들은 교단의 군대에 스스로 속국이 되었었다. 하지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 같던 교단은 참패를 맞이하고서 물러나 버렸다. 그들에게는 뒤늦은 선택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없는 교단과의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
개인 영지의 힘으로는 페리안과 전쟁을 불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결국, 북방의 크고 작은 영지들은 하나둘씩 페리안에 복속되기 시작하였다.
젊은 패왕 유트 페브리안이 승리의 깃발을 들고서 수도에 복귀한 지 약 한 달여 만에 각지의 사신들이 승리를 축하하는 선물과 함께 신하임을 자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