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17)
레필리아 레소드-217화(217/398)
레필리아 레소드 217화
음모(2)
오트리아의 황제, 필 루드비히 오트리아는 티미 아크우드의 부추김으로 오대 강국으로 서신을 보냈다.
비록 이름뿐인 황제지만 오랜 기간 대륙을 지배해 온 제국의 주인이 보내는 초대장이었다.
신이 아니지만, 신격화된 인간.
황제의 초대장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세력을 지닌 왕이라 할지라도.
황제라는 이름으로 칭해지는 권력을 무시한다면,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도 부정하게 되는 꼴이었다.
불구의 몸이 되고 영웅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만 만족하던 불운의 황제는 마치 아이처럼 순수한 설렘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순수함을 티미는 이용했고, 전국 시대가 된 이래 최초로 오대 강국의 유력자들이 모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교단의 만들어진 영웅, 티미 아크우드의 허영과 얕은 생각으로 대륙은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예고되고 있었다.
이후 벌어질 거대한 비극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륙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다섯 유력자가 한곳에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귀를 기울였다.
유력자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둘 황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백한 함정입니다, 전하. 가셔서는 안 됩니다.”
황제의 초대장이 도착한 곳 중의 하나, 신생 왕국 페리안의 회의실에서 나온 외침이었다.
유트가 황도로 향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습니다.”
“페리안은 지금 전하를 중심으로 이제 막 구성되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안 계신다면 페리안도 없는 겁니다.”
지금 발언하고 있는 것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단의 군사였던 빅스터 나이브만이었다.
전 황제 실 루드비히 오트리아를 곁에서 모셨던 빅스터는 아키서스 공방전에서 패전하고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유트와 그의 근위 기사들은 명성이 높고, 지략이 뛰어난 그를 포로가 아닌, 귀빈의 예로 대하였다. 그리고 빅스터는 유트 페브리안이라는 젊은 왕에게 매료되어 그의 군사로서 왕실에 머물게 되었다.
리즈와 빅스터, 두 군사를 얻게 된 유트. 그리고 힘을 착실하게 키워가는 페리안의 앞을 가로막을 것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페리안 왕실에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명목상으론 대륙에 명성을 떨치는 젊은 영웅들을 황제가 보고 싶다 하여 초대한다고 쓰여 있었으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역사가 말해주듯이 강성한 군주가 자신을 과신하여 하찮은 음모에 목숨을 잃고 대업에 실패하는 일은 빈번했다.
“그럴지 모르지만 필 황제께서 직접 서한을 보내셨소. 안 그래도 우리 페리안은 왕국으로서 정식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인데, 만약 황제의 뜻을 거역했다간 왕국이 아닌, 반도의 무리, 혹은 외적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르시오?”
근위 기사 레온 폴 하르츠의 부친이자 건국 공신인 하르츠 후작은 모두가 우려하던 사실을 가장 먼저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적국의 음모가 분명하다고 소리치던 각료들도 하르츠 후작의 말 한마디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페리안에 소속된 귀족들 가운데 높은 서열과 세력을 지닌 하르츠 후작의 말이다.
함부로 잘라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자칫 잘못하면 대륙의 공적이 되어서 다른 사대 강국과 싸워야 하는 일도 벌어지게 된다.
아무리 아렌과 로빈타에 리에르라는 연결고리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또한, 정치라는 것이 얇은 인맥에 좌지우지될 정도로 우스운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왕 혼자가 아닌, 몇몇 귀족들도 아닌 다수의 인재와 국민이다.
왕이 실행하려는 국법을 각료들은 회의를 통해 결의안을 발의해야 하고, 그 결과를 공포하고 호응받지 못하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다.
빅스터 나이브만은 이제 갓 망명해 온 몸이라 힘이 부족해 발언권이 강하지 못했다. 하르츠 후작의 말 한마디에 회의실에 즐비한 각료들은 수군거리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개중에는 이번 황제의 초대를 받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며, 이번 기회에 페리안 왕실도 정식으로 인정받고 작위를 받을 수 있다는 좋은 면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빅스터는 이번 일에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연회의 주최자는 필 루드비히 오트리아로 되어 있었지만, 뒤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실 황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심약한 황제는 간신배들에게 조종당하는 광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심증으로 각료들을 설득하기에는 빅스터의 입지가 작았고,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유혹들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우리 페리안은 대륙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세력을 키웠소. 하지만 빠르게 만들어진 탑은 그 주춧돌이 약하고, 무너지기 쉽게 마련. 베리타스께서 황제에게 정식으로 작위를 부여받고 체계를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소.”
하르츠 후작의 말에 각료들은 그 말이 맞다는 듯이 저마다 고개를 주억여 보였다. 빅스터가 듣기에도 그의 말에는 정당한 이유와 실리가 있었다.
하지만 빅스터는 하르츠 후작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지러운 전국 시대를 압도적인 힘으로 통일하는 것.
심약한 황제의 등극과 함께 온갖 간신배들이 득실거리는 황실 때문에 대륙은 사분오열되어 전국 시대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서막이 오름에 따라 겨우 수년 만에 수많은 생명이 피를 흘리고 산화했다.
황폐해지는 대지, 그리고 끊임없는 약탈. 피골이 맞닿은 전쟁의 희생자들.
비극은 불행을 부르고, 불행은 없어도 될 원망과 슬픔을 낳는다.
젊은 나이에 무에서 유를 창출한 유트 페브리안이라면 썩어빠진 황실을 뿌리 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고의 군사라고 칭송받는 빅스터도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선 굉장한 강경파였다.
아쉽지 않은 오트리아 황실에 꼬리를 흔들어 대는 것 따윈 관심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빅스터 역시 황실에 대놓고 송곳니를 세우는 것은 생각지 않았다.
아무리 없는 거나 매한가지인 황실이라 해도 페리안을 반역 무리로 규정짓게 되면 국민은 굉장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기들이 사는 터전, 그리고 평범하게 살아온 자신들이 한순간에 반역자가 되어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분의 의견은 더 이상 없습니까?”
듣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끌어모으는 목소리였다.
회의장 안에 자리 잡은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은빛 머리카락의 청년에게 향했다.
검은빛과 흰빛이 둘린 서클렛을 쓴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르츠 후작의 말이 맞습니다.”
빅스터는 속으로 난색을 표했고, 하르츠 후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번 황제의 초대에는 음모가 없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유트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이 자신의 의지를 피력해 보였다. 하지만 대신들은 왕의 말에도 이견은 좁혀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선 그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전하의 신변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교단이 수세에 몰려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지만 이번 연회에 세상의 이목이 전부 모여져 있소. 섣불리 행동하진 못할 것이오!”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 역사요! 이기는 것이 곧 정의인 세상에서 잠시간의 이목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다시금 소란이 벌어지자 유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숙시키기 위해서 단상을 두드리려던 유트보다 앞서,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미남자가 입을 열었다.
누가 뭐라 해도 현 페리안에서 제2인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여러분들이 베리타스를 걱정하는 마음을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리즈 지센라이드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 다중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굉장히 예의 바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지만 온화한 미소 속에는 맹렬한 독을 품은 독사 같은 섬뜩함이 있었다.
리즈는 붉은 입술로 미소 지으며 섬섬옥수의 아름다운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마법에 빠진 것 같았다.
리즈의 손이 움직였을 뿐인데 대신들의 눈과 귀는 온통 그에게 집중되었다.
마치 연주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오대 강국 중 가장 바쁜 곳은 페리안이었다. 페리안에 반목하던 북방 세력은 아키서스 공방전 이후로 빠르게 흡수되었고, 유트는 말 그대로 쉴 시간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하나의 예로, 항상 단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유트는 요즈음 제대로 면도도 하지 못해서 턱 언저리가 까칠까칠해져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유트의 모습은 왕성의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주었다. 하지만 그가 종일 고된 업무를 소화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전하께서는 이번에 흡수된 영지 관리로 여념이 없으시니 또 다른 베리타스를 대리로 보내면 됩니다.”
베리타스, 페브리안 일족의 핏줄을 지칭하는 단어이며 고귀하고 진실함을 상징한다.
선대의 베리타스 일족은 진실의 눈이란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어떤 거짓도 파훼시키는 이능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피가 옅어짐에 따라 지금은 그저 전설처럼 알려져 있다. 이들의 고귀함은 은색 머리카락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베리타스의 핏줄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두 명. 유트와 유이였다.
왕의 단 하나뿐인 혈족이자, 베리타스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유이가 왕의 대리자로 가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
아니,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
페리안의 꽃이라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황실의 그 어떤 미인들보다도 압도적이다.
리즈의 말에 대신들은 고개를 주억여 보였다.
“하지만 공주 전하께서 가신다고 해도 위험은 마찬가지일 거요.”
빅스터는 유트가 직접 가는 것보단 낫지만, 공주가 볼모로 잡힌다면 더 큰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유트가 여동생을 무척 아낀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니까.
자신의 단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된다면 유트는 만사를 제쳐두고서라도 복수하러 나설지도 모른다.
얼음이라는 말로 유트를 표현할 때가 많지만, 그도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젊은 청년에 불과할 뿐이었다.
마치 그러한 지적을 기다렸다는 듯이 리즈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공주님을 호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자가 있지 않습니까?”
황제의 도시에 들어서면 군대는 적어도 50㎞ 이상 멀리 두어야 한다.
황실 안에서는 근위 단장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다.
왕의 친구이자 새로운 근위 기사인 흑사자, 에레나드.
얼마 전에 있었던 수도 침략 사건을 목격한 병사들은 전투를 보고 입을 모아 똑같이 말했다.
원 맨 아미(One Man Army)라고.
그 정도의 압도적인 전투력이라면 유이를 수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노골적으로 군대를 끌고 오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성도, 출신도 알지 못하는 이가 근위 기사단에 배치되었을 때 적지 않은 반발이 있었다.
야만족이라고 배척받기도 했던 북방 대륙은 인재를 고용하는 데에 있어 귀천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근위 기사단은 각각 100명의 기사단을 거느릴 수 있을 정도로 큰 무력을 지니고 있다.
비상시엔 개인의 판단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는 특혜까지 있었다.
이 특혜는 대륙 사상 있을 수 없었던 권력이다.
즉,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아침에 모반을 꾀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네 번째 근위 기사에 대한 반발은 컸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한 덕분에 리에르는 정식으로 네 번째 근위 기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로는 부족하오.”
국가 일등 공신이자 모든 귀족의 대표 격인 하르츠 후작의 말이었다.
곧 공작 위까지 받게 될 권력자는 리에르라는 존재가 달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