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19)
레필리아 레소드-219화(219/398)
레필리아 레소드 219화
음모(4)
“앞이나 보시죠. 길에서 벗어나면 곤란하니까요.”
-Master, 결투를 원한다면 잠시 제가 내비게이션(Navigation) 할 수 있습니다.
“넌 닥치고 있어, 고철.”
-사자는 자신의 암컷을 노리는 다른 수컷 사자는 공격합니다. 그것이 야생의 법칙인 겁니다.
“고철의 법칙은 찌그러지는 거다.”
아르카는 심심하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 노력했다.
팔에 매달려 있는 아르카를 내려다보면서 리에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옆에 있는 레온은 아르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친놈 보듯이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다.
레온은 가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가 아르카가 말하는 것을 듣고서 노골적으로 얼굴을 종이처럼 구겼다.
리에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아르카의 대단함을 깨닫게 되었다.
“경의 마검은 참으로 불경하군요. 감히 공주님을 암컷이라고 부르다니.”
레온은 당장에라도 자신의 검을 뽑아 들어 결투를 신청할 것 같았다. 갑자기 삭막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평소 냉정한 레온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의외라고 할 수 있다.
기사가 검을 상대로 검을 들고 결투 선언을 한다는 것도 참 우스운 꼬락서니가 아닐 수 없다.
-아르카는 유이 페브리안 공주 각하를 암컷으로 지칭한 적이 없습니다. 아르카는 묻습니다. 갈색 수컷은 어째서 Master의 암컷이 공주라고 생각한 겁니다.
레온은 순간적으로 안색이 굳어졌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리에르는 속으로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대번 레온의 날카로운 시선이 화살이 되어 날아온다.
리에르는 시치미를 뚝 떼고서 말고삐에 신경 쓰는 척했다.
“흠흠, 제가 실언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면서 레온은 고개를 돌려 보였다. 시뻘게진 얼굴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레온은 억지로 화를 참아내며 아르카를 상대하지 않았다.
일정표에 따라 이동하며, 점차 주변의 환경도 바뀌는 것이 보였다.
대 제국, 오트리아가 만들어낸 도로가 보인다.
이 도로 덕분에 오트리아는 대륙 어디든 빠른 시간에 갈 수 있었다.
마차가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하자 마차에 탔던 여성들도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비포장도로는 아무리 안락한 마차라 해도 괴로울 테니까.
“이제 슬슬 마을인가 봐.”
에레사는 점점 숲이 옅어지는 것을 보았다.
숲 대신 보이는 것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었다.
“마을……!”
유이도 마을이라는 말에 눈이 희번덕거렸다.
마을이 있다면 당연히 제대로 된 음식이 있다.
뿐만이 아니라, 샤워를 할 수 있는 시설도 있을 터.
유이는 창문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커튼과 함께 엇갈려서 바람에 흩날리는 긴 은색 머리카락이 펄럭인다.
그것을 손으로 감아 붙잡으며 유이는 빼액 소리 질렀다.
“바보 원숭이, 빨리빨리 이동해!”
“급하시면 내려서 뛰든가.”
“뭐야?”
유이의 앙칼진 외침이 들려와도 리에르는 듣는 둥 마는 둥 느긋하게 마차를 몰았다.
무엄한 리에르의 말투를 보고 레온은 당장에라도 결투를 신청할 것 같은 삭막한 눈매를 들어 보였다.
“부럽군요, 소꿉친구라는 것.”
정말로 부러운 건지, 아니면 화가 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
리에르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쉬릭!
매서운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리에르의 머리가 있던 자리로 화살이 스쳐 지나간다.
다시 고개를 들며 리에르는 레온에게 물었다.
“이래도?”
“역시 부럽군요.”
“부러워?”
“네.”
리에르는 레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유이가 괜찮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항상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고, 수틀리면 화살을 날려댄다. 그녀의 과격한 모습을 보고도 부러워하는 것은 콩깍지가 씐 거다. 아주 단단히.
“지금 내가 죽을 뻔한 것 본 거 맞지?”
“공주님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오로지 경이 있을 때뿐이니까요.”
만약 힘과 실력이 월등해진 지금이 아니라면 유이에게 이미 죽어 없어졌을지도 몰랐다.
흥, 코웃음을 치면서 유이는 활을 내려놓는다. 그 모습을 보고 멜런은 어휴, 소리 내며 입을 열었다.
“공주님도 틈만 나면 활시위를 당기는 짓 좀 하지 마세요. 그러다 정말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일반인이 사용해도 활은 대단히 위협적인 무기다.
일단 맞으면 아무리 못해도 중상을 입는다.
고대부터 가장 사람을 많이 죽인 병기가 괜히 활인 것이 아니다.
특히 유이는 대륙의 신궁이라 불리는 아로운에게 직접 궁술을 사사받았다.
멜런은 왕국 최고의 레이디가 되어야 할 유이가 전사처럼 구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에레사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멜런에게 말했다.
“리에르는 안 다칠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할 수 있는 거예요.”
이전에는 나약하기 그지없었던 리에르. 에레사의 검술에도 밀렸던 소년이다.
그랬던 소년이 이제는 대륙 최강이라 말할 수 있는 괴물이 되었다. 에레사의 입장에서는 묘한 감정이 찾아들었다.
“아니거든? 미꾸라지처럼 졸졸 피해 다니는 게 얄밉기만 하지.”
유이는 절대로 아니라는 듯이 부정했다.
에레사는 그녀의 강한 부정을 보고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 보니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원숭이였지?”
“응?”
에레사의 말을 듣고 멜런이 눈을 깜박거리며 유이를 바라보았다. 원래 그녀가 동물들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그다지…….”
에레사의 말에 유이는 그렇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멜런은 호오, 하는 감탄사를 냈다.
“왜, 예전에 페이서스에 찾아온 유랑 극단에 원숭이들 있었잖아. 평소 표정 하나 없이 인형 같던 애가 꼬마 원숭이를 보고선 얼굴이 상기되어 눈도 못 떼던 게 생각나는데 말이야.”
자못 그때가 떠오른 듯이 입가에 손을 대며 웃는 에레사.
유이는 그녀의 말에 당황한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따, 딱히 원숭이뿐만 아니라 동물은 다 좋아하니까.”
“그래, 그렇겠지.”
농담이었다는 듯이 손사래를 쳐 보이는 에레사.
그녀는 웃고 있는 입과는 다르게 싸늘한 눈으로 유이를 관찰하듯이 훑어보았다.
곧 목욕할 수 있다고 좋아하던 유이의 바람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마을의 입구로 커다란 신전이 서 있다.
옹기종기 모인 건물의 수로 보아 제법 인원이 있어 보였다.
기대와는 다르게 마을은 폐허였다. 사방은 온통 시체였고, 화장터였다.
마을의 입구에는 양 머리를 단 거인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많은 사람의 숭상을 받아야 할 신상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몰골이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게 오갔을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집마다 낡은 집이 초췌함을 드러낸다.
무언가가 살았었던 흔적들은 이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거리 곳곳에 사람의 뼈로 의심되는 하얀 백골들이 을씨년스럽게 놓여 있었다. 백골의 주변으로 거무튀튀하게 남아 있는 자국. 갈비뼈 사이, 정수리에 꽂힌 단검은 보기만 해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교단의 문양이군요.”
레온은 근처를 살피더니 확신을 담아 입을 열었다.
이 마을은 코스모스 교단의 입장에서는 이교도인 셈이다.
교단이 대두되기 이전의 대륙은 종교의 자유가 있었다.
넓은 대륙에 각기 다른 나라와 각기 다른 부족이 군집해 있었다.
각기 다른 신앙을 품은 사람들에 대해 제국은 아무런 박해도 가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자유로운 종교 생활을 허락하며 민심을 다스렸다.
제국의 몰락과 동시에 코스모스 교단은 모든 종교를 박해했다.
창과 칼로 무장한 교단의 핏빛 세례 속에서 무참한 비극이 일어났다.
제국은 이것에 대해서 침묵하였다.
기울어 가는 국운, 그리고 재정이 바닥난 제국으로선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받아들이는 대신 모든 종교 권한을 그들에게 쥐여주었다.
“세상에…….”
멜런은 현기증마저 느끼면서 입가를 틀어막았다. 극도로 역겨운 비린내가 사방에 그득하다. 날벌레들이 날개를 비벼대는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진 것은 비단 이름 모를 마을뿐만이 아니었다.
일행이 황도를 향해 가는 길에 보인 마을들은 대다수 일방적인 전투의 흔적이 있거나 지독한 기아에 시달리는 마을들뿐이었다.
나라의 경제가 기울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빈번히 나온다지만 이것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
더더군다나 황도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이 이 정도라면 더 할 말이 없다.
유이는 할 말을 잃은 채 입술을 사리물었다. 에레사는 이미 몇 차례 보았던 광경이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은 레온과 함께 있는 리에르의 뒷모습을 좇는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일행 중에서 손에 가장 많은 피를 묻힌 사람은 리에르다.
그 혼자서 모든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는 그런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비록 그가 제정신으로 했던 일은 아니지만, 그의 손에 그득하게 묻은 진득한 피는 씻어도 씻기지를 않았다.
망자들의 저주, 소중한 이를 빼앗긴 자들의 비난과 원망.
그것을 짊어지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살육의 현장을 보고 눈가에서 경련이 일어난다.
레온은 비극적인 광경에 소리 없는 분노를 토했다.
일행은 죽음으로 뒤덮인 도시를 지나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시 출발하시죠, 이미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은 여기에 없으니.”
레온의 현실적인 말 한마디에 리에르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일행은 길을 떠나 황도로 향하기 시작했다. 저녁을 알리는 붉은 노을, 그리고 밤의 커튼이 드리운다.
늦은 저녁, 일행은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비극을 피했다. 그 이유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코스모스 십자가가 서 있었으니까.
마차를 몰고 있던 리에르는 당장에라도 십자가를 베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죄 없는 마을 사람들만 피해를 볼 것이 뻔하다.
“오늘은 이곳에서 묵으면 되겠습니다.”
레온은 열린 마차 문 안으로 시선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여행이 체력을 소모했는지 유이는 멜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곤하게 잠들었다.
멜런 역시 유이의 체온을 느끼면서 잠들어 있었다.
맞은 편에 혼자 앉아 있는 에레사만이 레온의 말을 받아 미소를 머금었다.
“네, 저녁이 맛있었으면 좋겠네요. 미리 꿈나라로 떠난 소녀들이 어서 돌아올 수 있도록.”
“아름다운 세 여자를 미소 짓게 만들 식당을 찾아봐야겠군요.”
레온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서 에레사의 말을 받았다.
큰 마을이 아닌지라 여관이나 식당이 없을지도 몰랐다.
레온은 숙박 시설을 찾아보기에 앞서, 리에르에게 불필요한 말을 붙였다.
“경과 아주 잘 어울리는 정숙한 아가씨군요.”
“부담스럽게도.”
레온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리에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유난히도 에레사와 리에르의 관계를 강조하려는 듯한 레온의 행동을 보니 실웃음이 흘러나온다.
둔하디둔한 리에르가 보아도 레온은 유이에 대해서 남다른 연심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페리안의 신하로서가 아닌, 남녀 간의 미묘한 감정을 의미했다.
사실 리에르가 페리안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유이와 레온을 이상적인 연인으로 그리던 사람들이 많았다.
유이는 누가 보아도 청순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빼앗았고, 레온은 야만 전사들만 있다는 북방 대륙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기사다운 기사였다.
그에 비해서 리에르는 자신의 성조차 밝힐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누구도 저 정도 매너는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차 창문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금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입을 연다.
“여성을 배려하려는 마음이라든지, 립 서비스라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