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2)
레필리아 레소드-22화(22/398)
레필리아 레소드 22화
하늘을 그리다(5)
“리에르.”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붉은 미남자가 비릿한 조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당신은 크나큰 재능을 지니었습니다.”
아르빈트 가문의 둔재라고 쓰레기 취급받던 리에르였다.
요새 들어 그에게 꿈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운명을 두드릴 힘. 나와 같은 포식자의 재능을 썩힐 수 없지요.”
리에르는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어도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눈은 감겨 있으나 주변이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가지각색의 색(色)으로 빛나는 이공간이었다.
리에르는 떠 있는 상태에서 의식만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미남자는 양손을 들어 허공에 지휘하듯 움직였다. 뭔가가 기쁜 듯이 콧노래가 들려온다.
그는 음악에 도취한 사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리에르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소름을 끼치게 했다.
“나와 같은 운명의 힘을 지닌 자가 이런 조잡한 대회에서 무시받는 것은 견딜 수가 없군요. 지금부터 당신의 자체 육체 능력만으로 어떤 싸움이 벌어지는지 몸으로 잘 느끼세요.”
‘무슨 알아먹지 못할 소리야!’
소리치고 싶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리에르는 시야가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기장이 보였다.
리에르의 시야에 가검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카이샤 랭커와 대치한 것치곤 긴장감은 없었다. 오히려 깃털처럼 몸이 가벼운 느낌이었다.
“자, 당신이 나와 아르미안의 관심을 받아야 할 사람이란 것을 증명하세요.”
붉은 머리칼의 남성은 그렇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리에르의 몸이 보이지 않는 실에 조종되듯이 움직인다.
곧 밀리언이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때요, 당신이 사용하지 않는 당신의 힘이?”
악마처럼, 달콤함이 가미된 말투였다.
붉은 머리칼의 남성은 리에르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넌 대체 누구야.’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수수께끼의 미남자는 상대의 생각대로 대답해 주었다.
“난 당신의 선배라고 할 수 있겠군요. 아르미안의 전대 주인, 그리고…….”
붉은 머리칼의 남성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연인이기도 했던 남성이군요.”
‘아르미안과 연인?’
그녀는 검이었다.
말을 하는 신기함은 있었지만, 생명체는 아니었다.
“자, 다음 싸움이군요.”
제라드가 올라선다.
“부숴 버리죠.”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 덕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리에르의 가검에는 어느새 상대의 피가 묻어져 있었다. 기세 있게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던 제라드가 만신창이가 돼서 들것에 실려 가버렸다.
제라드를 내려치는 검을 멈추려 해도 그것은 리에르의 생각일 뿐이었다.
멈추려 할수록 더욱 강하게, 안 된다고 외칠수록 더욱 정교하게 상대를 내려쳤다.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는 공포, 그리고 알 수 없는 설렘.
결국, 그의 앞을 유트가 막아서기까지 했다.
친구를 향해 주저 없이 검을 휘둘렀다.
당혹스러운 은발 머리카락의 친구가 계속 뭐라고 소리치고 있다.
“당신은 머리보단 육체파였죠. 당신이 레필리아 레소드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검에 피를 묻히는 것이 최고라고 할 수 있죠.”
붉은 머리칼의 미남자는 다시 한번 속삭이며 손가락을 퉁겼다.
그와 동시에 리에르는 거부 의사에도 소용없이 유트를 향해 가검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친구마저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만……!”
리에르가 몸을 뒤틀면서 중얼거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묶여 있는 그의 몸이 천천히 움직인다.
그것을 목격한 붉은 남성은 놀랍다는 듯이 동공을 열었다.
“움직일 수 있습니까? 역시나 대단합니다.”
붉은 남성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넌 뭐야…….”
리에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겨우 몸이 조금 느슨해졌나 싶었는데, 다시 팔과 다리가 더 단단히 묶이기 시작했다.
“말했잖아요. 당신의 선배라고.”
붉은 남성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인다.
“나한테 왜 이러는…….”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요?”
붉은 남성이 하하, 시원하게 소리 내어 보인 뒤에 입을 열었다.
“포식자는 포식자일 뿐. 피식자일 수가 없습니다. 알고 있나요?”
붉은 남자는 가벼운 걸음으로 리에르의 앞까지 다가왔다.
“사자 새끼가, 분명 사자인 것이 분명한데도 사슴 새끼들이랑 같이 풀을 뜯어 처먹고 있어요. 어찌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붉은 남자가 리에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리에르는 괴로워했다. 갑자기 그는 미친 듯이 광기를 뿜어냈다.
“모욕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나와 같은 힘을 지녔지요. 포식자가 피식자의 흉내를 내는 것은 이제 그만하시죠.”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
그것이 광기 어린 안광을 뿜어내며 상냥하게 웃는다.
그의 손이 천천히 리에르의 목에 닿았다.
차가웠다.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길고 흰 손가락이 목을 쓸어내리며 가슴까지 닿는다.
“편하게 해드리죠. 이제 풀 맛은 느끼지 못하는 세상이 될 겁니다.”
붉은 남자의 손이 리에르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리에르는 찢어질 듯한 통증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날붙이로 사정없이 살갗을 찢는 것처럼 느껴졌다. 싸늘한 손가락 끝에 붙은 손톱이 칼날처럼 매섭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리에르는 동공을 흔드는 것만으로 고통을 표현했다.
“이제는 내가 보이나요?”
붉은 남자가 귀까지 닿을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속삭인다.
리에르는 어릴 적에 붉은 광인 이야길 떠올렸다.
밤에 자신도 모르게 만났던 붉은 광인.
아르미안이 말하던 붉은 광대. 그 모든 생각이 하나로 합쳐지자 의식이 혼미해졌다.
-남의 것에 손대지 마!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앙칼진 목소리가 이렇게 반갑게 느껴질 수 없었다.
곧 리에르의 정신은 끊어졌다.
“리에르 군. 다음에 보죠.”
붉은 광대는 그렇게 화사한 미소를 끝으로 옅어지기 시작했다.
* * *
“리엘……!”
누군가가 부른다. 하지만 다시 의식이 끊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리에르는 다시 누군가가 부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무게추를 단 것같이 무거운 눈썹을 연다.
그의 시야 안으로 보이는 것은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었다.
“리엘, 정신이 드니?”
“누구……세요?”
리에르는 이제야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느꼈다.
“다행이다.”
녹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혹시 아르미안?”
리에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낯익다는 것을 느끼고 그렇게 말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리에르가 알고 있는 아르미안의 생김새는 투명한 검신을 가진 롱소드였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긴 녹색 머리카락 위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는 여인이었다.
“정말로 사람으로도 변신 가능했어요?”
리에르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생뚱맞은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실소했다.
예전에 리에르가 사람으로도 변신할 수 있냐고 물어봤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도 참 엉뚱하다.”
“기억력이 좋다고 말해주시죠. 그런데 여긴 어디예요?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리에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흰색의 도화지처럼 공간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그 위로 가지각색의 기둥이 아지랑이처럼 위로 올라가서 다른 기둥과 엮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곳이었다.
“네 심상 세계야.”
“제가 여길 왜 왔어요?”
“기억이 전혀 안 나는가 보다?”
아르미안의 말에 리에르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검술 시합을 하던 것까진 기억이 났다.
힘겹게 겨우 한 명을 이기고, 다음, 또 다음을 이겼다.
두근.
그 순간 리에르는 붉은 광인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얼굴에도 불구하고 잔혹한 미소를 머금던 그 남자.
리에르는 그것을 떠올리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인한 그의 손길에 가슴이 찢기고 심장이 도출되었었다.
리에르는 옷깃을 열어 자신의 가슴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왜 그러니?”
“아뇨…….”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사람 뭐예요?”
“그 사람?”
“아르미안을 알고 있던데요?”
“그래…….”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말에 잠시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항상 대화하면 목소리만 들려왔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눈앞에서 마주하고,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니 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아르미안의 연인이라고 했었어요.”
리에르는 붉은 남자의 말이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인간 형태인 아르미안을 보니 생각이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연인.”
아르미안이 처연하게 웃었다.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네.”
리에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왠지 아르미안의 표정에서 여러 가지 의미가 묻어나오는 듯 보였다.
“자칭 연인 덕분에 내 꼴이 재미있게 되었지만.”
아르미안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양손에는 쇠사슬로 연결된 수갑을 차고 있었다.
“어? 그건 왜 차고 있어요?”
“여자에게 물어보지 말아야 할 것도 있어, 리엘.”
“그건 몸무게 아니었어요?”
“프라이버시를 묻지 말란 말이지.”
아르미안의 말에 리에르는 한숨을 쉬어 보였다.
아르미안은 곧바로 정색하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를 상대하지 마. 그는 괴물이니까.”
“상대하려 한 적 없었는데…….”
갑자기 조종당하는데 상대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 남자의 마법에 당해서 그래. 애초에 리에르 너는 마나의 혜택을 받았으니 그 정도 항마력은 금방…….”
아르미안은 말을 하다가 말고 잠시 멈췄다.
“항마력은?”
“아니, 잠깐만.”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뭔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르미안의 진녹색 에메랄드를 빼다 박은 눈동자가 천천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설마…….”
그녀가 놀라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잘생긴지는 몰랐다고요?”
리에르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장난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은 그의 장난을 받아주지 못했다.
그녀의 시야로, 리에르의 몸 안 마력이 넘쳐흐르는 것이 보였다.
‘뭐야, 이건.’
분명 리에르는 선천적으로 마나를 읽을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났다.
몸 안에 있는 마력은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펌프질하는 심장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혈액. 그것의 분포도와 어우러진 마력이 마치 혈액처럼 몸에 퍼져 흘렀다.
“뭐가 잘못됐어요……?”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학원에서 둔재라고 불렸었지?”
“갑지가 그건 왜요?”
리에르가 불만스러운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온갖 비아냥을 들어서 괜찮을 법도 하지만, 여전히 불쾌한 것은 불쾌하다.
“항상 뭘 하든지 재능이 없다고.”
“그래도 마법에 재능이 있다면서요?”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아르미안이 갑자기 리에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리에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르미안에게 안면을 맞고서 나가떨어졌다.
“아파……! 아르미안, 뭐 하는…….”
리에르는 찢어진 입술을 손등으로 훑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아르미안은 나가떨어진 리에르를 향해 내려찍기를 했다.
“으악!”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녀의 내려찍기를 피했다.
“왜, 왜 그래요! 그리고 팬티 보인다고요!”
아르미안은 냉랭한 얼굴로 가타부타 말도 없이 양 주먹을 휘둘렀다.
리에르는 그녀의 공격을 피하면서 있는 힘껏 밀어 보였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손길에 밀려 나가 호수에 던진 물 제비처럼 튕겨 나갔다.
“뭐야, 그렇게 세게 밀지는……. 아니, 그보다 바닥도 깨부숴지네? 여기 심상 맞아요? 돌도 부서지고. 어, 아르미안? 잠깐만요?”
아르미안이 어느새 일어나서 말없이 허공에서 수인을 맺었다.
리에르는 그녀가 뭘 하나 싶어서 멀뚱멀뚱하니 바라봤다.
그 순간 허공에서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마법진이 생성되며 그 안에서 얼음송곳이 튀어나와 리에르를 덮치기 시작했다.
“왜, 왜 이래요!”
리에르가 비명을 토해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자기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광인에게 조종당하고, 갑자기 이런 곳이고, 갑자기 공격받는다.
분명 죽을 만큼 아파야 했다.
아니, 죽을지도 몰랐다. 사방에서 거대한 바위보다 더 큰 송곳들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날아들었었다.
리에르는 살며시 눈을 떴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리에르는 휴우, 한숨 쉬면서 웃어 보였다.
“아, 진짜로 공격한 줄 알았잖아요. 깜짝 놀랐네.”
리에르는 아르미안에게 하하,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진짜로 공격한 거야.”
“아, 진짜로…… 네?”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말에 눈만 깜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