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20)
레필리아 레소드-220화(220/398)
레필리아 레소드 220화
음모(5)
마차의 문이 열리자 눈부신 금빛의 머리카락이 찰랑댄다. 시원한 바람의 일렁임을 맞으며 마차 바깥으로 걸어 나온 에레사는 리에르의 마부석 옆으로 올라와 앉으며 얼굴을 마주하였다.
“그렇지?”
에레사의 물음에 리에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 정도 외모에, 이 정도 능력이면 감점이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리에르의 능청에 에레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르카는 때를 놓치지 않고서 한마디 내뱉는다.
-정말 재수 없습니다.
“넌 주인님에 대한 말투나 다시 배워.”
아르카의 건방진 말투에 리에르는 대번 으르렁거렸고, 에레사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얘가 어렸을 적엔 안 이랬는데. 전엔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지만.”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리에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에레사의 손길.
참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손길이었다.
다정한 에레사의 얼굴에 분노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단둘이 노숙을 하던 날, 광기와 슬픔으로 얼룩졌던 그녀의 일그러짐은 전부 착각인 것 같았다.
“지금은 어떤데?”
리에르는 나지막하게 입술을 열었다. 에레사의 마음속 깊은 곳에 맺혀진 서슬 퍼런 칼날을 알면서,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지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리에르는 에레사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이채를 띄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리에르가 본 순간적인 감정은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곧 에레사 특유의 온화한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잘하고 있잖아? 내 친구들이 지금의 너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궁금해질 정도?”
스스로 민감해진 것인지 리에르는 에레사의 말이 왠지 모르게 차가운 비수처럼 느껴졌다. 이미 그녀의 친구들은 고향 페이서스에서 생사를 알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유트, 유이 남매가 저렇게 쳐다볼 수 없을 존재가 된 것도 놀랍지만, 옆집 살던 꼬마가 누구나 뒤돌아볼 만한 미남자로 자라준 것이 대견하지.”
묘하게 장난기가 어린 눈동자로 무릎을 모아 턱을 괴고 바라보는 에레사를 보면서 리에르는 차라리 사과를 하고 싶었다.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널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 사과의 끝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다.
리에르는 입술만 달싹이다가 굳게 다물었다.
선량하고 자상하던 그녀의 마음에 비수를 꽂고 균열을 만들었다. 독기어린 칼날을 소유하게 된 에레사에게 사죄하고 싶다.
차가운 모멸감을 느낄지라도, 가식적인 다정함을 보지 못하게 될지라도.
그녀에게 사죄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항상 곁에 있었던 소녀.
지금은 다정함으로 포장된 그녀의 얼굴이 악몽으로 잠식되던 그날 밤처럼 냉랭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같이 살지 않을래?”
리에르는 대신 그녀에게 하지 못했던 다른 말을 꺼내 들었다. 에레사는 뜻밖의 말을 듣고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싫어?”
“어……?”
아무런 대답이 없이 굳어 있는 에레사를 돌아보며 리에르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제야 에레사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말을 내뱉었다.
“시집오라고?”
혼란으로 뒤엉켜진 에레사는 리에르가 한 말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보았다.
“진심이야?”
에레사는 천연덕스럽게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전부터 그녀는 항상 옆집에 살았었다.
옆집이 같은 집이 될 뿐이다.
아니,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 그녀와 함께라면 리에르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응?”
결혼까지는 생각 못 했다는 리에르의 모습을 보고 에레사는 킥킥, 작게 웃어 보이더니 몸을 옆으로 밀어 넣었다.
리에르는 가까이 다가온 에레사를 눈으로 좇으며 겸연쩍게 말했다.
“뭔 상관이야.”
“예전엔 좋아한다며.”
에레사가 빙긋 웃어 보였다. 한참 전, 에레사와 같이 카이샤에 진학하기 위해 출전했던 검술 대회. 그곳에서 생각지 못하게 고백을 했었다.
리에르는 대번 얼굴을 붉혔다.
“주변에 예쁜 여성들이 많아서 잊어버렸다거나.”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세월이 흘러서 감정이 시들시들해졌다거나.”
“네 이야기 하는 거 아냐?”
부끄러워하는 리에르의 모습을 보면서 에레사는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잡았다. 자신의 품 안까지 끌어당긴 리에르의 팔은 말라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돈 잘 벌어온다면 생각해 볼게.”
에레사가 장난스럽게 리에르를 골리기 위한 말을 한다. 리에르는 흥,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침대 테크닉은 이 아르카가 Set-Up 시켜 드리겠습니다.
“넌 앞서 나가지 마, 고철!”
빨개진 얼굴로 리에르는 팔목에 매달린 아르카를 보고 소리쳤다. 자기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면서 화를 내려니 묘하게 바보 같은 모습이었다.
에레사도 리에르의 얼굴이 아닌, 그의 팔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뭘 앞서 나가?”
“뭐?”
“그러니까 뭘 앞서 나가냐고.”
에레사가 배시시 웃으면서 심술 맞게 묻는다. 리에르는 입을 벙긋거리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던지 모르겠지만, 뭔가 굉장히 능숙한 것 같던걸. 저번에 혀도 막 왔다 갔…….”
“그, 그만!”
리에르는 깜짝 놀라 에레사의 말을 끊으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런 리에르의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며 웃는 에레사는 겉과는 다르게 차갑게 식은 열기가 가슴 한구석에 꾸물꾸물 올라섰다.
‘웃기고 있네…….’
에레사의 차가운 눈동자 안으로 아르카를 뜯어내려고 노력하는 리에르의 모습이 보였다.
‘네 싸구려 동정이 나에게 먹힐 거라 생각했니?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널 잘 알고 있어.’
리에르의 마음속 한구석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에레사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여성으로서의 직감이라고 말해도 좋았고, 오랫동안 함께 지낸 소꿉친구로서의 경험이기도 하였다. 그 직감과 경험들은 말하고 있었다.
리에르 아르빈트의 저 말은 에레사 레이나드를 사랑해서가 아닌, 구역질 나는 동정심에서 비롯된 거라고.
더욱 차갑게 식어가는 에레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에르는 애꿎은 아르카를 괴롭히다가 눈에 익은 백마가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움직였던 레온이 일행을 데리러 오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 왠지 모르게 반갑게만 느껴진다.
에레사의 기쁜 듯한 얼굴을 봐서 다행이었다.
그녀를 더 이상 외롭게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곳이 먹먹했다. 유이의 얼굴이 스쳤다.
리에르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자신의 마음은 확실하게 밝혔다. 서로가 가야 할 곳이 다른 것이다. 그뿐인 이야기였다.
지금은 오로지 에레사를 위해.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은 전부 그녀를 위해서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래, 앞으로가 있다면 에레사에게 모든 죄를 갚아가면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거야.’
리에르가 에레사에 대한 마음을 확고히 하고 있을 때, 마차 안에 있던 유이는 푸르스름하게 내리쬐는 달빛을 긴 속눈썹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몇 번 깜박거린 그녀의 긴 속눈썹은 이내 다시, 닫히고 눈을 뜨지 않는다.
* * *
“누추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만 푹 쉬고 가게나.”
나이가 지긋지긋한 노년의 촌장은 갑자기 찾아온 손님들에게 객실을 내어주며 입을 열었다.
촌장의 말은 예의상 하는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누추했다.
비라도 오면 지붕에서 물기가 새어 나올 듯 보였다.
벽면 틈에선 솔솔바람이 불어오는지라 모포를 몇 겹으로 해놓고 잠들지 않는다면 찬바람에 얼어 죽을 판국이었다.
당연히 유이나 다른 여성들이 원하던 목욕 시설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여성들은 실망스러운 얼굴을 감추기 위해 방긋 웃어야 했다.
바람과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노숙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마을의 사정이 좋지 않아서 그러니 대접이 시원찮아도 이해해 주세요.”
멜런은 하마터면 “혹시 이걸 먹으란 건가요?”라고 되물을 뻔했다.
일행들에게 손님 접대용으로 만들어진 음식은 식사라기보단 이름도 알 수 없는 풀뿌리들로 쑨 죽이었다. 촌장과 그의 아내에게 객실과 음식을 대접받은 일행들은 잠시 정적이 돌았다. 눈앞에 의문의 음식이 있다.
레온은 전사지만 귀족 출신이었고, 좋은 식사와 좋은 옷, 그리고 좋은 잠자리만을 경험했다.
그는 풀죽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그가 지금 모시는 사람은 공주였다. 그녀에게 이런 음식들을 먹인다는 것 자체가 난감했는지 입을 차마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을이…… 상당히 어렵나 보네요.”
일행 중 멜런이 가장 먼저 입을 떼 보이며 깨진 그릇에 담긴 풀죽을 나무 수저로 휘휘 저어 보였다.
잔뿌리들을 내보이며 멀건 스프 위에 떠다니는 풀은 아무리 생각해도 맛있기는커녕, 먹기에도 곤욕스러워 보였다.
일행 중 식사에 입을 대는 것은 리에르 하나였다.
낡은 그릇을 왼손으로 들고서 익숙하게 후루룩, 소리 내어 죽을 먹는 리에르를 보면서 일행들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바보 원숭이……. 먹을 만해?”
순식간에 그릇을 비워낸 리에르의 모습을 보며 유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녀의 물음에 리에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단답했다.
“맛없어.”
“그런데 잘 먹는다?”
“네가 만든 음식도 먹었는데, 이 정도야 뭐.”
퍽!
유이의 주먹이 어김없이 리에르의 명치를 가격하였다. 맞은 곳을 움켜쥐면서 리에르는 대번 도끼눈을 뜨며 으르렁거렸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에레사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알고 있던 리에르는 반찬 투정도 심하고, 어리광만 부리던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그는 이전과 너무나 달랐다.
자신이 모르는 리에르. 그리고 다른 여성에게 눈길이 향하는 리에르의 모습은 자신이 알고 있던 그가 아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고, 예측할 수 없는 리에르는 에레사에게 불쾌함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소중한 가족을 앗아간 존재.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 가장 슬퍼할 사람도 그였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사실을 알기에 에레사는 더욱 괴롭고 괴로웠다. 그녀는 병들어가고 있었다.
에레사도 리에르처럼 그릇을 들어 풀죽을 마시듯 먹으며 수저를 움직였다. 푹 고아 삶은 풀이 약간의 쓴맛을 냈다. 어느 정도의 영양가가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적어도 먹으면 포만감은 있다. 그것은 그저 생존을 위한 식사에 불과했다.
에레사까지 식사에 입을 대기 시작하자 나머지 일행들도 어쩔 수 없이 죽을 먹었다. 하지만 다들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배고픔 때문에 먹기는 했지만 제대로 그릇을 비워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차라리 여행 중에 먹는 건조 식량이 더 맛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심하군요. 황도로 가면 갈수록 참담한 광경입니다.”
군집 형태를 이루지 않는 북방의 소수 민족도 이렇게 살지는 않았다. 마을 안에 들어서면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제국이라는 곳도 그리 살 만한 곳은 못 된다는 거지.”
레온의 말에 리에르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