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21)
레필리아 레소드-221화(221/398)
레필리아 레소드 221화
음모(6)
“불경하군요, 경은 기사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할 말은 해야지.”
레온은 리에르의 기사답지 않은 행실과 언동을 보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페리안은 지금 대륙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신흥 강국이었다.
그런 강국의 왕을 수호하는 근위 기사다.
그의 품행은 명예로운 기사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물론 텟사 경은 예외지만.’
괜히 뭐라고 했다가는 리에르가 텟사 이야기를 할까 봐 레온은 억지로 참았다.
테스타롯사가 하는 짓은 리에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것을 생각하며 레온은 애써 참았다.
먼저 식사를 마친 리에르는 자리에 일어서서 낮은 창가로 시선을 향했다.
바깥에서 구경하던 아이들은 갑자기 나타난 리에르를 보고 깜짝 놀라 몸을 숙여 버린다.
“약한 자를 수호하는 기사 나리답게, 없는 사람들이 배곯으면서 만들어준 음식, 깨끗이 먹어 치우라고.”
리에르는 절반 이상 남아 있는 레온의 죽 그릇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레온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고, 그런 그의 모습에 리에르는 피식, 웃으며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리에르는 힘없이 식사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촌장 부인이 벌써 식사를 끝낸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손님으로 오셨는데 차린 게 없어서 죄송해요.”
미안한 표정의 촌장 부인에게 리에르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고기만 먹으면 살쪄요.”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 리에르의 말에 촌장 부인은 어색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근래에 페리안으로 정착하게 되면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평화로움을 누리고 있었다.
리에르는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길 수 없었던 나날을 떠올렸다.
누군가가 차려준 음식이 즐거울 수밖에 없다.
많이 먹으면 많이 배출된다.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살기 위해서는 맛은 따지지 않고 영양분을 섭취해야 했다.
적은 자신이 죽여야 할 상대가 자고 있는지, 씻고 있는지, 혹은 아픈지를 따지며 공격하지 않는다. 빈틈이 있다면 그저 공격할 뿐이다.
“마을에 먹을 것이 많이 부족해 보이네요.”
지금 일행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는 풀죽만 해도 이들에게는 감지덕지한 음식이리라. 마을 사람들의 초라한 행색과 분위기로 봐서 리에르는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방금 식당을 훔쳐보던 아이들도 유이나 에레사 같은 미인을 훔쳐보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굶주린 눈빛에 불과했다.
그 굶주림이라는 적과 수없이 싸워본 적이 있는 리에르이기에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우리만 어려운 게 아니에요.”
촌장 부인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처녀 적엔 제법 고운 미모를 지녔을 것 같은 얼굴이다.
그녀는 여간 고생이 많았는지 이마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뒤편으로는 걸걸한 목소리를 지닌 촌장이 화를 내듯이 소리쳤다.
“썩을 놈이 황제랍시고 세금을 무겁게 걷어 가는데 약소 마을은 제 밥 챙겨 먹기도 힘들지.”
한 번 불평을 입 밖으로 낸 촌장은 한참 동안 떠들어 대기 시작하였다.
리에르는 자신이 도화선에 불을 지핀 것은 아닌가 고민했을 정도였다.
촌장은 지금의 제국에 대해서 저주처럼 욕설을 퍼부었다.
전대 황제가 있을 때와 지금은 천지 차이라는 것.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은 너무나 달랐다.
황제의 명으로 무겁게 내려지는 세금이 있다. 문제는 한 번 더 세금이 매겨진다.
황제를 수호하고, 제국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루나레이크 왕국에서 다시 한번 세금을 매긴다.
이중으로 부과되는 세금은 일반 서민을 먹고살기 어렵게 만들었다.
황실의 힘이 약화되자 루나레이크 왕국 같은 곳이 폭정을 시작했다. 문제는 루나레이크가 오대 강국 중 하나이기 때문에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급자족을 할 방법은 있다.
“산에서 나는 과일과 동물들도 있을 건데…….”
촌장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모르는 소리. 산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은 끝도 없긴 하지. 하지만 산에는 디에고 무리가 있어. 올라가려면 목숨을 걸고 올라가야 해.”
우거진 숲에서 서식하는 디에고는 약 1m 크기의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도마뱀과 몬스터였다.
포식자인 녀석들은 후각이 매우 예민해서 한 번 발견한 사냥감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고, 공격이 시작되면 지치지 않고 달려드는 끔찍한 녀석들이었다.
튼튼한 두 다리로 뛰기 시작하면 아무리 성인 남성이라 해도 붙잡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숙련된 전사라 할지라도 녀석들이 기습적으로 뱉어내는 독침이 눈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못 하고 먹이가 된다.
인간에게 풍족함을 가져다주는 숲이라 해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혜택 아닌 혜택이었다.
“녀석들 종을 생각한다면 무리 지어봤자 50여 마리도 안 될 텐데, 토벌대를 보내주진 않았나요?”
리에르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리석은 질문을 내뱉었다. 애초에 토벌대를 보내줄 만큼 성실한 제국이었다면 이중 세금을 내리는 사악함은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흥분한 촌장이 들고 있던 담뱃대를 들어 리에르의 머리통을 때렸다.
갑작스럽게 한 대 얻어맞은 리에르는 억울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고 자신보다 한창 연장자인 상대에게 함부로 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중에도 없고 예술 번영만 떠들어 대는 어리석은 황제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사는 루나레이크가 잘도 군대를 내어주겠다!”
소리치는 촌장을 보며 리에르는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던 그의 시야에 달빛을 반사시키는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초라한 마을에 어울리지도 않는 기마 무리에 불온함을 느낀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낡은 집 안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당하게 리에르의 이마에 담뱃대 딱밤을 먹였던 촌장도 낯빛이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그는 안으로 도망치진 못한 채 의자에 못 박힌 듯 앉아 있었다.
촌장의 집까지 당도한 그들은 하나같이 단단한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무엇이든 베고 부술 것 같은 무장을 한 녀석들이 촌장을 내려다보았다.
어스름한 달빛 사이로 흉흉한 모습을 드러내는 흑마.
힘없는 촌장에게 겁을 주기엔 충분했다.
“영광으로 알 거라, 네놈들의 마을에 방문한 것을.”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냉랭하고 딱딱한 말투. 그것은 마치 잘 벼린 칼날 같은 음성이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한 위압감을 느꼈는지, 리에르 앞에선 말 잘하던 촌장도 혀가 굳어버린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무례는 오래 가지 않았다.
촌장은 상황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고개를 넙죽 숙이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이 작고 보잘것없는 마을에 무슨 일이신지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발대발하면서 날뛰던 촌장은 온데간데없고, 힘없이 늙은 노인장만 남아 있었다.
자신보다 한참 아래 연배로 생각되는 사람들임에도 감히 반말은 하지 못했다.
리에르는 고개를 들어 갑주를 걸친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정체가 짐작이 됐다.
갑주에 잘 새겨진 금빛 테두리. 몸을 보호하는 갑옷치고는 너무나 호화스러운 금빛 선들은 얽히고설켜서 화려한 장미의 문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 문양이 의미하는 것은 오대 강국 중의 하나인 루나레이크의 핵심, 장미 기사단이었다.
“설마 이 지저분한 마을에서 묵는 건 아니겠지, 라헬 경?”
화려한 금빛의 장미 마차 속에서 요염한 여성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들려왔다. 라헬이라고 불린 기사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답변했다.
“황공합니다, 폐하.”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서 차가운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제국 황실의 모든 실정을 장악한 어둠의 장미, 여제 베로니카의 행차인 것 같았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그녀답게 수십 명은 들어갈 수 있을 듯한 장미 마차에 타고 있었다. 보석으로 치장된 장미 마차가 굶주림을 겪는 초라한 마을에 있는 것 자체가 희극과도 같았다.
마차에 수 놓인 보석 중, 몇 알만 빼내도 이 마을 사람들이 몇 해는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으리라.
“네놈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뭘 하느냐!”
촌장을 다그쳤던 장미 기사가 리에르를 향해 호통을 쳤다. 가지고 있던 검으로 당장에라도 내려칠 기세를 보이는 모습에 리에르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나한테 관심 끊고 하려던 거나 계속해. 먹을 거 구걸하러 온 거지?”
장미 기사는 리에르가 하는 말을 듣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별 같지도 않은 녀석에게 하대를 받았단 충격이 그의 몸을 굳게 만들었으리라.
촌장은 리에르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상대는 여자 셋과 그녀들을 호위하는 듯한 기사 하나.
반면 갑주는커녕 검도 지니지 않은 리에르는 일개 마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황실을 쥐었다 폈다 하는 루나레이크의 사람들에게 저렇게 당당한 것은 목을 내미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의 주인님께선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하시지. 아름다운 장미를 닮은 핏빛의 선혈을 말이야.”
까불면 네 몸 안의 피를 뽑아내 주겠단 의미였다. 그것을 듣고 리에르는 콧방귀를 뀌면서 손사래를 쳐 보였다.
“설마 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자결이라도 하려는 거야?”
리에르의 말에 일순간 루나레이크의 기사들은 침묵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욕을 당한 기사는 번개처럼 빠르게 검을 빼내어 리에르에게 휘둘렀다.
자신들과 같은 엘리트 기사 앞에선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것이 상례였다.
하물며 벌레 같은 일반인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조차 금기였다.
감히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다니. 참수를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중죄였다.
촌장과 그의 부인은 소름 끼치는 검의 파공음을 듣고서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잘생긴 청년의 목이 순식간에 떨어져 땅바닥을 나뒹구는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들의 상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리에르는 여유 있게 피했다. 의자와 함께 몸을 뒤로 젖힌 리에르의 가슴께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검.
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리에르는 긴 다리를 앞으로 뻗어 기사의 팔을 걷어차 버렸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사의 검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다른 장미 기사들도 상상하지 못한 이변을 보고서 놀랐고, 촌장 부부도 스스로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끄으으…… 우우욱.”
리에르에게 팔이 걷어차인 기사는 앙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었다.
검을 들고 있던 그의 팔은 바깥쪽으로 꺾인 기괴한 형태가 되어 있었다.
리에르는 당장에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골절을 겪고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장미 기사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마상에서 상대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무기는 기동력과 창이다. 겉멋으로 검 따위를 휘두르니까 그렇게 되는 거다. 실력이 없으면 검이 아닌 창을 들어.”
리에르의 말과 동시에 장미 기사들이 하나둘씩 자세를 취했고, 서슬 퍼런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달빛에 번뜩이는 흉물스러운 물건들을 보고서 리에르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기사들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대충 오십 명인가.”
리에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