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24)
레필리아 레소드-224화(224/398)
레필리아 레소드 224화
음모(9)
리에르는 라헬의 말을 듣고 위기를 느꼈다.
한때 많은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교단의 암살자, 적혈의 악마.
적혈의 악마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그리고 정체가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시커먼 날개를 달고 진홍빛 눈을 가진 암살자. 그가 나타나는 곳은 많은 사람이 죽었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담아 그를 적혈의 악마라 호칭했다.
온갖 악행을 일삼았던 냉혹한 살인마는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직도 적혈의 악마라는 호칭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처럼 인식되었다.
적혈의 악마가 두려운 존재가 된 가장 큰 이유로는 페이서스에서 벌어진 피의 축제가 있었다.
대낮의 길바닥에서 사냥감의 살점들을 도려내고, 목격자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살해했다.
자신의 사냥감을 죽이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엮이는 이가 있다면 개나 고양이라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냉혹한 괴물.
그 괴물의 출신지가 아르빈트 가문이라는 소문 때문에 로이스타는 대원수의 자리에서 실각당했다.
리에르는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과거를 깨닫고 입술을 사리물었다. 순간적으로 들떴던 감정들이 차갑게 식어 내려갔다.
리에르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흑사자라는 칭호를 알게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온통 칠흑처럼 도배된 리에르의 차림새는 근래 대륙 용병들의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였다.
흑사자의 이미지는 그만큼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물론 차림새가 흑사자와 같다 해도 의심받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월등한 실력이 있어야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아무리 검의 달인 정도가 되었다 해도 수십 명의 기사를 상대로 가지고 놀 실력은 되지 못한다.
장미 기사단도 여느 기사단처럼 헐렁한 곳이 아니니만큼,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은 대륙에서도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리에르가 의아한 것은 다른 문제였다.
자신과 일면식도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성을 아느냐는 것, 그리고 그가 확신하고 있다면 리에르에게 있어서, 아니, 페리안에게는 큰 위험으로 작용한다.
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이끈 장본인이 한 나라의 근위 기사로서 활동한다면 왕인 유트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고, 페리안의 시민들도 불신을 품게 된다.
만약 유트가 군권을 지닌 힘 있는 왕이 아니었다면, 리에르를 자신의 곁에 두는 일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리에르이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라헬은 먼저 선제공격을 가했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클레이모어를 빠르게 횡으로 베어온다.
그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리에르는 아르카를 뻗어냈다.
챙!
검의 굉음이 울렸다. 리에르는 다시 한번 손목의 시큰함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도 모르게 리에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을 때, 라헬은 한 걸음 앞으로 당기며 클레이모어를 횡으로 베어 들어왔다.
육중한 괴력이 담긴 검격,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속도는 이전에 마주했던 레이루나를 떠올리게 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제대로 해야지, 아르빈트의 차남이여.”
순간 리에르의 귓가로 라헬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괴력이 실린 클레이모어는 횡에서 종으로, 종에서 횡으로 변화무쌍하게 날아들었다.
스치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바람의 파공음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 떨리게 했다.
“뭐야, 너.”
아르카를 비틀며 라헬의 클레이모어를 받아낸 리에르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설마, 하는 생각이긴 했지만, 라헬은 분명하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라헬이 마음만 먹는다면 흑사자는 아르빈트의 차남이며, 악명 높은 적혈의 악마란 사실이 밝혀질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린다. 그동안 평화로웠던 일상 때문에 이런 식으로 협박당하게 될 거라곤 상상치 못했었다.
“원하는 게 뭐야?”
다른 기사들처럼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그러나 리에르는 지지 않으리란 자신감이 있었다. 상대 또한 자신이 이기지 못할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재미는 이쯤 보고 물러서라.”
라헬의 명령조가 기분 나쁘다.
하지만 리에르로선 큰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라헬에게 있어서도 흑사자에게 밀렸다는 정도로 최소한의 자존심은 챙길 수 있다.
상대를 제압할 자신이 없다면 차선책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 전투를 보는 사람들에겐 라헬이 유리한 것으로 보였다.
리에르는 공격을 받으면서 계속 뒤로 물러서고 있었으니까.
“더 했다가는 마을 사람들이 무서워서 잠을 못 잘 것 같긴 하네.”
리에르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라 아르카를 들었던 팔을 내렸다. 검은 분자가 일렁거리며 리에르의 팔목에 감겨들었다.
라헬도 자신의 클레이모어를 등 뒤에 있는 검집에 넣어 보였다.
갑자기 싸움이 중단되자 장미 기사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 유명한 흑사자를 상대로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라헬을 보고 역시 대장이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라헬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리에르로선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인간을 자극해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적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어서 불리한 형국이 된다면 모두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이 운 나쁘게 휘말릴 것이 자명하다.
결국, 리에르는 싸움을 중단했다. 장미의 기사들도 분하지만, 상대를 죽이지 못하고 물러섰다.
“잘한다, 잘해. 힘자랑하는 게 그렇게 좋아?”
유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리에르를 힐난했다.
레온도 마찬가지로 불편한 얼굴을 한 채로 리에르를 맞이했다.
“경은 자신의 위치와 책임에 대해서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대가 먼저 시비 걸었거든?”
두 사람의 질타에 리에르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실제로 리에르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긴 했다. 그렇다 해도 처신이 너무 극단적이었다.
“네 행동 때문에 루나레이크에 속한 이 마을이 손해 입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 안 해? 어떤 빌미로 어떤 괴롭힘을 당할지 모른단 생각은 안 하는 거야?”
“설마, 그 정도로 쪼잔할까.”
천하 태평한 리에르의 대답에 유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기 시작했다. 그런 유이의 어깨를 짚으면서 에레사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리에르도 저쪽 사람들이 말을 험하게 해서 기분이 상했던 걸 거야. 너무 나무라지 마.”
“그래도 저 바보 원숭이는 누굴 돕기는커녕, 괴롭히는 꼴밖에 안 된다고. 마을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거 봐.”
어둠이 깔린 마을은 더 이상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부대를 정렬하는 장미 기사단이 리에르 쪽을 바라보면서 이를 가는 소리만 들려올 뿐.
머쓱해하는 리에르의 시야 안으로 촌장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부부는 덩치 큰 기사의 앞에서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덜덜 떨고 있었다.
오른쪽 눈에 움푹 팬 흉터가 있는 거구의 남성.
라헬은 마침 고개를 들어 리에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달갑지 않은 표정의 리에르와 마찬가지로 라헬 역시 굳은 얼굴을 풀어 보이진 않았다.
촌장 부부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마을 사람들을 몇몇 모으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지시하에 그들은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죠, 다행히도 저들도 더 이상 우리에게 관여하려는 모습은 없으니깐요.”
의외로 장미 기사단들은 리에르 일행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여제 베로니카까지 동행한 그들이 이대로 그냥 넘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으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촌장에게 말을 마친 라헬은 안으로 들어가려는 리에르 일행을 향해서 걸어왔다.
레온은 역시 그냥 넘어가지 않는 건가, 중얼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그러고는 여성 세 명에게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서 쉬라는 말을 건넸다.
곰 같은 체구를 가진 라헬이 왔으나 리에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 있는 험상궂은 얼굴을 노려본다.
“왜? 생각해 보니 억울해서 한 번 더 붙어보게?”
도발적인 리에르의 말투를 듣고 유이는 ‘저 바보 원숭이…….’라고 중얼거리며 고운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그대 때문에 우리는 입지 않아도 될 피해를 보게 되었다. 타국의 영내로 들어와서 이런 일을 벌이고 그냥 넘어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리에르는 한 번 더 자신의 정체를 가지고 어설프게 협박하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비로우신 여제께선 이번의 사태를 용서하시고자 한다.”
“그래? 잘됐네.”
의외였다. 소문으로는 루나레이크의 여제가 꽤 잔혹한 성향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신 그대를 만나고 싶다 하신다.”
“나를? 지금?”
“그렇게 되겠지.”
라헬의 말에 리에르는 눈을 깜박거렸다.
예상 밖의 제안이었다. 리에르 대신에 레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귀국에 실례를 범했는데 이 이상 무례를 끼칠 순 없소.”
“걱정하지 마시오. 성이 없는 천민도 거두어주실 정도로 자애로우신 분이니.”
레온의 정중한 거절은 라헬의 확답만을 불렀다.
“뭐, 어려울 것 없지.”
상대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나 리에르로선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을 힘을 지녔기에 혼자 적진으로 들어간다 해도 무서울 게 없었다.
더더군다나 등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아군들도 함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럼, 가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기를 겨누고 있던 사이지만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깥으로 나섰다.
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유이는 고운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별생각 없이 행동하는 리에르의 모습을 보니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느껴져 그리움마저 찾아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전투를 치렀던 상대다. 단신으로 적진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했다.
물론 리에르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언니, 저 바보가 괜찮으려나 모르겠어.”
유이는 옆에 있는 에레사 쪽으로 입술을 열어 보였다.
리에르 때문에 못마땅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스러웠다.
“괜찮겠지, 방금 봐서도 잘 알잖니. 죽여도 죽지 않을 것처럼 강하니까.”
항상 자상한 그녀의 말투가 어쩐지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유이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빛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에레사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리에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에르는 라헬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리에르는 상대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자신의 부하들을 상처 입혔으니 복수하려는 것이 정상이다.
리에르에게 얻어맞은 기사들이 한곳에 모여 치료를 받고 있었다. 당연히 달갑지 않은 시선들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마을에서 그나마 쓸 만한 집 하나를 억지로 빼앗은 루나레이크의 군인들은 자리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칼 대신 망치와 톱을 들고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군대가 아닌 숙련된 건축가로만 보였다. 낡은 집은 눈에 뜨일 정도로 모습이 나아지고 있었다.
“여왕벌의 둥지라는 건가.”
리에르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라헬은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추어 보였다. 그러고는 흉터 덕분에 더욱 흉포해 보이는 눈빛으로 리에르를 노려보면서 두꺼운 입술을 달싹인다.
“말은 피차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리에르 아르빈트, 아니, 적혈의 악마.”
리에르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에 라헬이 뱉은 말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리에르가 피식 웃어 보이자 라헬은 다시 말없이 걸음을 내디디며 여제가 있는 거대한 마차 쪽으로 향했다.
마차 쪽을 빙 둘러서 지키고 서 있는 기사들은 허락받지 않은 자가 근처에만 가도 공격할 것처럼 살기가 등등해 보였다.
여왕의 최측근에 있는 기사들은 확실히 리에르가 붙었던 기사들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정예 안의 또 다른 정예라는 건가.’